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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141)

44화

“그럼 편히 쉬세요.”

키리아가 문밖으로 나서며 인사하자 노부부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약제사님. 감사해요.”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세요. 식후에 약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키리아는 거동이 불편해 광장에 오지 못한 주민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 했다.

마지막 방문을 마치니 벌써 푸른달이 뜬 저녁이었다.

“아가씨,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조앤이 키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헤헤 웃었다.

손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아준 생명석이 담긴 병을 들고 있었다.

“응.”

키리아가 씩 웃었다.

“연구도 재밌지만 사람들을 직접 진료해주는 것도 재밌네.”

키리아에게 북부는 이상한 곳이었다.

독초로 약을 쓴다는 비난이 아니라 칭찬을 듣다니.

더 나아가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존경까지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절대 받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왠지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에, 키리아는 목소리를 명랑하게 높였다.

“생명석을 이렇게 박박 긁어서 모아주다니 라데츠 사람들 대단하지 않아? 그러니까 빨리 성으로 돌아가자!”

“네, 아가씨.”

“그래야죠, 키리아 양.”

조앤과 로하넨이 귀여운 조카를 보듯 실실 웃었다.

세 사람이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을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약제사님! 약제사님, 잠시만요!”

한스의 막내딸 리사였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뛰어오시고.”

“음, 그게요…. 별 일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약제사님께서 지시했던 일이니까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제가 지시했던 거라면… 뭐였죠? 하도 많아서.”

“격리해놓았던 남부 상인이 사라졌어요.”

“…네?”

º º º

“여기가 그 상인이 갇혀… 아니, 격리되어 있던 곳인가요?”

“네.”

키리아와 조앤, 로하넨은 루이스가 격리돼 있던 헛간을 둘러봤다.

헛간은 낡았긴 해도 제법 튼튼하게 지어졌다.

부서진 부분도 없고, 숨겨진 통로는 있을 수 없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리사가 의아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언니가 식사를 갖고 들어갔을 때 분명히 문은 잠겨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문으로 나간 것도 아니에요.”

“아가씨. 혹시 밀실 실종 사건 아니에요?”

키리아는 흥분한 조앤에게 맞장구치지 않고 로하넨에게 물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요?”

신성력을 거둔 로하낸이 신중하게 말했다.

“마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기운이 생명석과 비슷하네요.”

“생명석이라고요?”

끄나풀이 어떻게 생명석을 손에 넣었지? 기능은 어떻게 파악한 거야?

물음에 대한 답은 금방 떠올랐다.

키리아는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아…. 오늘 하루 종일 마을이 어수선했지. 생명석을 찾느라.”

끄나풀이 생명석과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경위를 대강 알 것 같았다.

얌전히 듣고 있던 리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도 도망갔으니까 이제 신경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로하넨이 고개를 저었다.

“그 상인이 변이 독감에 걸렸다면 다른 마을에 옮길지도 모릅니다. 잡아야 해요. 당장 인근 도시와 마을에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상인이 여러 마을을 거쳐서 북부를 빠져나갈 거라는 게 로하넨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키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마정석은 황실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는 희귀 자원이다.

그런데 북부에서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원이 발견된 거다.

생명석은 아직 출처 파악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

이대로 황제의 귀에 알려져 버리면 생명석은 북부만의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빼앗거나 수저를 올리려 들 테니까. 북부는 지금 세금을 면제받고 있어서 명분도 만들 수 있고.’

공작의 꼬투리를 잡는 데 실패한 끄나풀은 분명 차선책으로 생명석에 대한 정보를 물어가려 할 거다.

어딜 나눠 먹으려고 해?

키리아는 자신의… 아니, 공작령의 파이가 줄어드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럼 로하넨은 마을을 맡아줘요. 전 숲과 산쪽에서 그 사람을 찾아볼게요.”

“예? 키리아 양, 위험합니다. 역할을 바꾸죠.”

“마을이나 도시에 연락하는 건 로하넨이 더 적합하잖아요. 전 가울을 데려갈 거니까 괜찮아요.”

키리아는 리사에게 요청해서 상인이 쓰던 옷가지를 받았다.

가울도 일단 개니까 냄새를 잘 맡겠지?

º º º

촛불이 일렁이는 어둑한 방.

홀로 푸른달을 바라보고 있던 제논은 로하넨의 보고를 받았다.

“…둘이서 상인을 쫓아갔다고?”

문밖에서 로하넨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울이 함께 갔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다른 마물들도 수색에 동원됐고요.”

“찾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모르지 않나. 다른 녀석들은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래도 야밤에 숲을 헤매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가울과 맞붙어 이길 수 있는 마물은 이 주변에 없으니까요.”

제논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로하넨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적을 학살하는 능력과 누군가를 보호하는 능력이 항상 같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검은 숲 깊은 곳에서 이름 모를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한군데가 아닌 숲 곳곳에서 경쟁하듯 울렸다.

“…….”

미간을 찡그리던 제논은 문득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마를 더 구기고는 거울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도록 뒤집어버렸다.

º º º

쐐액―

한밤중의 겨울바람이 귓가를 때리고 지나갔다.

키리아는 가울의 등에 바짝 업혀 바람을 피했다.

키엑! 켁!

바람 소리 사이로 마물들의 비명이 간간이 섞였다.

그때마다 양옆으로 튀는 피를 키리아는 최대한 못 본 척했다.

“가울, 진짜 이쪽이 맞는 거지?!”

가울이 팔에 흥건한 마물의 피를 옆으로 털어냈다.

“내 코 의심하냐? 이쪽으로 구린내가 난다고… 우왁?!”

가울의 몸이 단번에 끌어올려졌다.

그 바람에 떨어진 키리아는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꺅! 뭐야?”

주륵.

키리아의 눈앞으로 걸쭉한 액체가 가느다랗게 내려왔다.

고개를 천천히 위로 들자….

“……!”

수백 쌍의 눈들이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사되는 광택과 꾸물거리는 실루엣.

빽빽하게 군집해 있는 수백 마리의 거미였다.

어린아이만한 몸체의 거미들이 키리아를 향해 폴짝 뛰어내렸다.

키리아는 순식간에 거미들에게 둘러싸였다.

“꺅! 저리 가!”

마물 퇴치 스프레이도 소용이 없었다.

수가 워낙 많아서 다른 녀석들이 꾸역꾸역 자리를 채워버렸다.

키리아를 원형으로 둘러싼 거미들이 그녀를 향해 일제히 거미줄을 분사했다.

“……!”

“키리아!”

가울이 앞으로 뛰어들며 거미줄을 향해 손톱을 내리그었다.

촤아아!

가울의 손끝에서 일어난 마력이 거대한 맹수의 발톱처럼 거미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가 손톱을 한 번 더 휘두르자 거미는 물론 초목까지 거칠게 패이며 길이 뚫렸다.

“키리아, 도망가!”

“어, 그치만 너는?!”

“네가 있으면 싸우기 불편하다고!”

버럭하는 가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빠르게 수긍한 키리아는 곧장 길을 따라 달려갔다.

키이이익!

뒤에서 거미들이 날뛰었지만 가울 때문에 한 마리도 키리아를 쫓아오지 못했다.

키리아는 한참을 달리고서 겨우 멈췄다.

“헉, 헉. 가울 괜찮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뒤돌아봤을 때였다.

퍼펑―!

뭔가가 터지는 폭발음이 났다.

가울이 있는 방향에서 폭발음과 함께 거미들이 팝콘처럼 튀어 오르고 있었다.

펑― 퍼퍼펑―

묵혔던 답답함이라도 푸는 건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는 리듬까지 느껴지는 폭발이었다.

“…완전 신나게 놀고 있네. 쟤 나 잊어버린 거 아니야?”

왠지 그럴 거 같았다.

키리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내 일이나 걱정하자.”

혼자서 밤의 숲을 돌아다니는 건 안 좋은 선택이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도 위험했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오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으니까.

차려 놓은 밥상은 되기 싫으니까 적당한 곳에서 숨어 있기로 했다.

“다 놀면 나 찾으러 오겠지.”

마물 퇴치 스프레이를 온몸에 뿌리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러다 어두운 발밑을 못 보고 비탈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몸이 사정없이 아래로 굴러갔다.

“꺄아악! 윽! 악!”

비탈이 끝나고서도 몇 바퀴를 구른 뒤에야 멈췄다.

욕설과 신음을 번갈아 하던 키리아는 몸을 일으켰다가 놀랐다.

눈앞에 나타난 뜻밖의 광경 때문이었다.

“웬 굴이 저렇게 많지?”

비탈진 바위 면에 여러 개의 작은 굴들이 있었다.

수십 명, 혹은 수십 마리의 무리가 모여 살기 적당해 보이는 장소였다.

키리아는 굴 가까이 다가갔다.

“…조용하네.”

마물이 사는 곳 같은데 기척은커녕 생활감도 없었다.

옆에 있는 다른 굴도 마찬가지였다.

“빈집인가? 이사라도 간 걸까.”

아무도 없다면 잠깐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할 것 같다.

키리아는 램프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각종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무심히 훑어보던 키리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저건…?”

어둠 속에서 녹색의 빛이 번들거렸다.

키리아는 얼른 다가가 살펴봤다.

“역시 생명석이잖아?”

꼭 먹다 남은 것처럼 애매한 양이 쌓여 있었다.

굴을 비우면서 놓고 간 게 분명했다.

“마을에서 모은 것하고 합하면 모두의 치료약을 만들 수 있겠어.”

신이 난 키리아가 생명석을 바쁘게 챙길 때였다.

키리아의 뒤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는 한 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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