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41)

43화

“하, 하하…….”

“끄악, 마을의 평화가!”

창백해진 키리아와 비명을 지르는 로하넨과 달리 제논은 무덤덤했다.

알을 집어 든 제논이 손바닥을 알에 대고 맥동을 감지하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살아있다.”

“저, 정말입니까?”

“가사상태같군.”

“깨어날 수 있는 거예요?”

걱정스러워하는 키리아에게 제논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알을 돌려준다면 포이즌 리저드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상황이 더 성가셔지니까 이대로도 상관없습니다.”

“전 제 환자가 무사하길 바라는데요.”

제논이 멈칫하더니 여전히 냉정한 태도로 말을 바꿨다.

“…상황이 성가셔져도 상관없다는 얘기였습니다. 나 역시 그대의 환자가 무사하길 바랍니다. 이 알은 그대를 좋아하니까 그대가 데리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네.”

키리아는 깨진 알을 자신의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로하넨을 재촉했다.

“로하넨. 마을 사람들은 괜찮아요? 포이즌 리저드의 독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지 않아요?”

“아, 네! 중독된 분들이 있습니다. 마침 키리아 양에게 그분들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좋아요. 지금 바로 가요.”

어차피 변이 독감 치료약을 건네주러 가야 했다.

키리아는 조앤을 불러 함께 성을 나섰다.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로하넨도 채비를 하고는 제논에게 말했다.

“저도 마을의 상황을 상세히 살피고, 키리아 양을 돕고 오겠습니다.”

“상황을 직접 살필 수 없어 답답하군.”

제논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심정을 짐작한 로하넨이 위로의 뜻을 담아 싱긋 웃었다.

“주군은 성에 계셔 주십시오. 특히 오늘 밤에는 푸른달이 뜨니까요. 걱정 마세요. 잘하고 오겠습니다.”

환영식이 있던 날로부터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 있었다.

제논이 끄덕이자 로하넨도 인사를 한 후 키리아를 쫓아갔다.

º º º

공작성에서 변이 독감 치료약을 가져왔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렸다.

그 수가 광장을 바글바글 채우고도 남았다.

조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렇게나 많다니!”

“조앤, 환자들의 줄을 세워줘.”

키리아의 지시에 조앤이 정신을 차리고 크게 소리쳤다.

“한 줄로 서세요! 증상이 심하신 분들께 우선 양보해주시고요. 아니, 싸우지 마시구요!”

조앤이 꽥꽥 소리쳤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워낙 많은 통에 목소리가 묻혔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은 일부러 무시하기도 했다.

“제발 한 줄로 서세요오옷!”

다들 서로 먼저 치료약을 받겠다고 웅성대고 조앤이 꽥꽥대는 난리통 속에서….

“변이 독감은 아니고 마물의 독에 단순 중독된 거네요. 저쪽 로하넨 신관께 가세요.”

키리아는 신속하게 로하넨과 일을 분담하고 있었다.

포이즌 리저드에게 중독된 환자는 로하넨이 신성력을 써주기만 하면 됐다.

남은 환자는 자신의 몫이었다.

키리아는 환자를 차례대로 받기 시작했다.

“쿨럭쿨럭, 야, 약제사님. 제가 약을 먹는다고 나을까요…?”

어머니의 부축을 받고 온 젊은 남자가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위태로운 상태에 눈물을 참고 있었다.

“당연하죠.”

키리아는 힘있게 대답하고 치료약을 건넸다.

“쭉 마시세요.”

“네….”

일전의 방문으로 공작성 약제사에 대한 소문이 난 덕분에, 남자는 키리아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조금이라도 나았으면 좋겠어요….”

남자의 어머니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울먹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 세상에!”

남자의 어머니가 화들짝 놀랐다.

얼굴이 보랏빛이던 남자의 혈색이 눈에 띄도록 빠르게 돌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남자가 어머니의 부축에서 벗어나 혼자 멀쩡히 서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기까지 하자,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부축을 받아도 몸을 가누지 못하던 녀석이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낫다니!”

“혹시 저거 신전의 포션이었나?”

그 광경을 본 키리아도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예, 예상보다 효과가 굉장히 빠른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생명석이다.

‘약의 흡수를 돕는 능력이… 지나치게 좋잖아?’

키리아가 개발한 포로나 치료약은 효과는 뛰어나지만 완치까지는 다른 약들처럼 시일이 걸렸다.

그런데 생명석이 약을 포션급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당황했던 키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고 얼른 계산대로인 척 시치미를 뗐다.

“거 봐요. 제가 낫는다고 말씀드렸죠? 그럼 다음 분이요.”

그런데 사방이 조용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키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약제사라고 들었는데… 아, 아가씨는 마법사인가요? 아니면 혹시 신전에서 오신 분이에요?”

“둘 다 아닌데요.”

키리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마법사나 신관일 리 없죠. 왜냐면 그 치료약에는 독초가 재료로 들어갔으니까요. 제 특기가 독초를 약으로 쓰는 거라.”

“……!”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의 눈이 더 커졌다.

‘역시 싫어하는 건가?’

그래도 공작성에서 마계 해독수를 시연했던 것처럼 받아 들여주지 않으려나?

아냐. 그 사람들이 특이했던 걸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자.

그렇게 키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마침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신성력도 아니고 독초라니!”

“독초로 약을 만들 수 있었단 말이야? 심지어 약초보다 훨씬 효과가 좋잖아!”

“약제사님, 정말이에요? 정말 독초로 약을 만드신 건가요?”

“혹시 다른 독초로도 만들 수 있어요?”

키리아는 뜻밖의 환호에 얼떨떨했다.

약이 순간접착제마냥 효과가 빠른 건 독초 때문이 아니라 생명석 덕분이지만….

척. 키리아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물론입니다. 다양한 약을 만들 수 있는 독초의 세계로 오세요.”

일단 좋은 건 먹고 보는 거다.

“오오오!”

사람들이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키리아가 3초 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자신의 말이 딱히 거짓말은 아님을 깨달았다.

포션은 신전에서 소량 생산되는 고급품이다.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약초를 써야 하는데 남부의 약재는 지나치게 비쌌다.

결국 북부 사람들은 귀족이 아닌 이상 아파도 끙끙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물이 아니라 잔병을 치료하지 못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독초로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눈앞에서 증명된 것이다. 약효가 즉각적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다치거나 병이 나도 돈 걱정 없이 약을 쓸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어른들을 따라서 웃던 아이가 키리아를 가리켰다.

“독초 마법사 아리키 같아!”

조앤이 쓴 소설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소설을 읽어봤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키리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소리를. 언니는 그런 사람 몰라요. 자자, 다음 분이요! 상태가 심한 분들에게 순서를 양보해주세요.”

키리아는 엉망으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조앤이 아무리 애써도 정리가 안 되는 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반응이 달랐다.

“약제사님 말을 들어야지.”

“약제사님한테 예쁘게 보이라고.”

사람들이 알아서 이동했고, 그에 따라 구불구불 몇 겹이나 겹쳐 있던 줄이 날씬해지더니 아주 깔끔해졌다.

병세가 가벼운 환자는 심한 환자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완벽하게 줄을 선 사람들이 순진무구한 병아리처럼 ‘저희 잘했죠?’라는 눈빛으로 키리아를 바라봤다.

조앤이 멍하니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대단해요…. 공작성 마물들에 이어 라데츠까지 접수하시다뇨….”

“…….”

자화자찬을 자주 하는 키리아지만 지금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한스 씨에게도 치료약을 나눠줬고… 일단 급한 환자는 이걸로 된 거겠지?”

약을 더 만들려면 생명석도 더 필요했다.

피로가 쌓인 숨을 후 뱉으며 키리아는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키리아가 일하는 내내 옆에서 그녀를 열심히 구경하던 아이가 키리아를 가리켰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세 번째 했다.

“아리키 같아.”

“씁.”

키리아는 나무라듯 숨을 짧게 들이켰다.

그게 재밌는지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그래… 네가 재밌으면 됐다.”

피식 웃던 키리아가 아이의 손에서 녹색 광석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어? 그거 언니 잠깐만 보여줄래?”

“웅.”

가져가 살펴보니, 크기는 조금 작아도 확실히 생명석이었다.

“이, 이거 어디서 났어? 언니한테 알려주라.”

“주웠어.”

“어디서?”

“조오기.”

아이가 가리킨 곳은 포이즌 리저드들이 난동을 부리고 떠난 장소 부근이었다.

키리아는 즉시 조앤, 로하넨과 함께 그쪽을 탐색했다.

탐색을 마친 후, 로하넨이 키리아에게 생명석 조각 하나를 건넸다.

“마물들이 휘젓고 다닌 곳에 떨어져 있었어요. 아무래도 포이즌 리저드들이 흘린 것 같습니다.”

“저도 주웠어요.”

키리아는 두 사람에게 받은 생명석 조각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이걸 포이즌 리저드들이 왜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급한 대로 마을에 있는 생명석을 모아야겠어요. 로하넨, 사람들과 함께 생명석을 찾아주세요.”

“알겠습니다.”

º º º

키리아의 부탁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흔쾌히 생명석을 모았다.

생명석이 예뻐서 가져갔던 사람들도 갖고 있던 것을 먼저 내어놓았다.

이윽고 사람들은 다른 곳에 떨어진 게 없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그게 치료약의 중요한 재료래.”

“그럼 얼른 찾아야지. 작은 거 하나라도 찾아야 빨리 나을 수 있다고.”

“포이즌 리저드가 지나갔던 자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봐.”

곳곳에서 이런 대화가 퍼졌고 광석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들의 대화는 헛간에 격리되어 있던 루이스에게도 들렸다.

“이게 뭔 말이야. 녹색 광석? 치료약?”

남부 상인으로 위장해서 왔다가 어처구니없이 격리된 지 몇 주 째.

식사를 가져다주던 사람에게 정말로 변이 독감이 옮아버린 루이스는 연신 기침을 했다.

병세가 심하진 않지만 몸에서 열이 났다.

“으, 아티펙트만 작동이 됐어도.”

루이스는 앞섶에 있는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위급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순간이동 아티펙트였다.

북부에서 마물들을 여러 번 맞닥뜨리는 바람에 좀 썼더니, 금방 마나가 바닥나고 말았다.

“제길, 마정석만 있다면 이런 헛간 따위 진즉 탈출했을 텐데.”

투덜대던 루이스는 헛간과 바닥의 좁은 틈 사이에 떨어져 있는 녹색 수정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밖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녹색 광석이 저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었다.

이쪽으로 툭툭 쳐서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희한하게 생겼군.”

수정 안쪽에 금빛이 반짝거리긴 하는데 혼탁했다.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광석을 손에 꽉 쥐었을 때였다.

마나가 고갈되었던 아티펙트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희미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

생명석과 아티펙트를 번갈아 보던 루이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반신반의하며 아티펙트를 빠르게 두드려 작동시키자….

“헉!”

다음 순간, 루이스는 마을 외곽에 서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마정석과 같은 거였나? 그런데 치료약의 재료라고?”

루이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잘은 모르지만 마나를 품고 있는 광석이 치료약에도 쓰인다니, 돈 냄새가 났다.

어차피 이대로 남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뭐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그분의 눈 밖에 나니 이판사판이다.

루이스는 오기에 가득 찼다.

“포이즌 리저드가 있던 자리를 찾아보라고 했었지. 그럼 그 마물들이 떨어뜨렸단 얘긴데.”

어쩌면 포이즌 리저드의 둥지에 이 광석이 잔뜩 쌓여있을지도 모른다.

용병들이 포이즌 리저드를 잡을 때 따라갔었기에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다.

루이스는 기억을 더듬어 포이즌 리저드의 둥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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