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데구르르.
조앤의 황당해하는 시선이 굴러가는 알을 따라서 움직였다.
“보통 동물들이 어미를 각인하려면 먼저 알에서 나오는 게 순서잖아요, 아가씨?”
“으응.”
“마물은 알일 때부터 각인하나요?”
“글쎄….”
키리아로서도 마물의 알은 처음이라 알 수 없었다.
마물들은 원래 이렇게 보호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까? 알에서 깨기도 전부터?
어젯밤 알을 주워온 후, 키리아는 점점 차가워지는 알의 체온을 높이기 위해 작은 욕조를 만들었다.
거기에 가울의 조언으로 독을 풀고 켈베로스를 불러다 지속적으로 불을 때게 했다.
이런 정성을 알았는지, 알은 키리아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면 욕조에서 튀어나와 데굴데굴 굴러오곤 했다.
“귀엽긴 한데….”
키리아는 난감하게 한숨을 쉬고는 굴러온 알을 다시 욕조에 놓고 몸을 돌렸다.
삐― 삐―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욕조를 빠져나와 키리아의 옆에서 울어대는 알이었다.
“으, 이러지 마. 난 일이 밀려 있단 말이야.”
키리아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가울이 작게 혀를 차고는 알을 잡아채서 욕조에 풍덩 담갔다.
삐―!
“시끄러워, 인마!”
꿍!
가울이 알을 한 대 쥐어박았다.
알은 놀라고 분한 듯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가울이 주먹을 가까이 들이밀자 더 울지는 못했다.
흥, 가울이 승리의 콧김을 내뿜었다.
“풀떼기. 이건 내가 맡을 테니까 넌 네 할 일이나 하라고.”
“오…. 가울, 너 좀 멋있다?”
때린 게 아니라 나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게 말야.
“너한테 그런 말 들어봤자 전혀 안 기쁘거든?”
가울이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갑자기 너그러워진 태도로 조앤과 켈베로스에게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 알 하나에 몇이나 달라붙을 필요는 없잖냐.”
“그래, 가울 말이 맞아. 가봐.”
“네, 아가씨.”
“존명.”
조앤과 켈베로스가 물러갔다.
키리아는 한결 후련해진 기분으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가울. 마을의 독감에 대해서 들은 거 없어?”
“아, 그거 말이냐.”
가울이 턱을 괴고 옆집 소식을 전해주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쭉정이가 왕에게 보고할 때 들었는데, 그게 좀 심한 모양이야.”
“얼마나 심한데?”
“환자가 계속 속출하고 있다던데. 금방 전염되어서 간병도 힘들고. 안 그래도 쭉정이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더라.”
“사망자는?”
“내가 알기론 없어. 아직은.”
그렇다면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한스가 내 말대로 잘 해줬구나. 다행이야.’
한스에게 변이 독감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한 수칙을 전달한 건 정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 치료제를 빨리 개발하지 않으면 사망자도 생기고 병이 마을 밖까지 퍼질 거야.’
그러면 영민들뿐만 아니라 제논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가니까 서둘러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공작님의 마나진단보다 알의 치료와 변이 독감 치료제를 우선순위에 두는 수밖에.
º º º
밤이 되자 피로를 느낀 제논은 키리아를 호출했다.
‘어제 작은 소동이 있었다 들었는데. 마물의 알을 발견했다던가.’
키리아에게 직접 듣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키리아는 방문하지 않았다. 업무가 바쁘다는 거였다.
그래서 제논은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환영식 날도 마나 진단을 못 했으니 오늘 저녁엔 분명 오겠지.
내 건강을 나보다 더 신경 쓰는 주치의니까.
그런데….
“왜 네가 왔지?”
나타난 건 키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하녀였다. 주근깨가 핀 얼굴이 낯익었다.
“아, 안녕하세요, 공작님! 아가씨께서 제게 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긴장한 하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사부터가 공작을 대하는 예법에는 맞지 않았지만 제논은 대강 넘어갔다.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관심이 없어서 딱히 외워두지 않았다.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쭈뼛거리던 하녀가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생명석이에요.”
그건 키리아가 가울에게서 받은 생명석을 마기 해독수로 정화하고 반으로 쪼갠 것이었다.
남은 반은 연구에 써야 했으니까.
독이 빠진 생명석은 반투명한 녹색으로 빛났다.
마치 에메랄드 같았는데 내부에 황금빛 빛무리가 선명하게 보여 아름다웠다.
제논은 광석을 손에 들었다.
“이건….”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발작하지 않아도 제논의 마물화한 팔에는 늘 약간의 통증이 잔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석을 손에 쥐자 통증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잠시 편안해진 숨을 길게 내뱉은 제논이 말했다.
“이 생명석이란 것에 대해서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왜 키리아가 아니고 그대가 온 거지?”
“아, 그게… 아가씨께서 당분간 마나 진단을 못하신다고 공작님의 양해를 구하셨어요. 직접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도 함께요.”
“…뭐?”
제논의 표정이 굳어지자 하녀가 힉,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뭔지는 몰라도 제가 죄송해요! 아가씨를 혼내지 말아주세요!”
“혼내지 않는다. 왜 그렇게 겁을 먹은 건지 모르겠군.”
“그… 방금 얼굴이… 충격받으신 거 아니었어요…?”
하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제논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아니. 주치의도 일이 바쁘면 환자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지 않은가.”
말하고 보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답한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제논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키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아, 저, 급하게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시거든요.”
“돌봐야 할 환자?”
내 주치의가 나 이외에 누구를 우선시한다는 말인가?
“그게… 환영식 때 발견한 마물의 알이에요.”
“…….”
황당한 대답에 제논은 하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 탓인지 잔뜩 당황한 하녀는 키리아가 왜 마물의 알을 돌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횡설수설했다.
결국 제논이 말을 끊었다.
“내가 직접 듣는 게 낫겠군. 이만 물러가도록.”
“네에.”
하녀가 울상이 되어 물러간 후 제논은 혼자 잠을 청했다.
그러나 뒤척이는 시간만 길어지자, 결국 몸을 일으켜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키리아는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틈으로 방의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일이 바쁜 게 사실이었군.”
마나 진단을 억지로 요구할 생각은 없는데 난 왜 여기까지 왔을까.
우두커니 서 있던 제논은 몸을 돌렸다.
‘…연구를 방해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겠지. 피곤할 텐데 간식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어.’
방 안의 대화가 들린 건 그때였다.
“이 몸이 도와주니까 고맙지 않냐?”
“그래, 저엉말 고마워.”
가울과 키리아의 목소리였다.
제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엄청 마지못해서 고마워한다, 너? 솔직히 내가 있으면 얼마나 이득이냐? 도움도 되지 눈호강도 하지.”
“헐. 눈호강이라고?”
“뭐, 뭐야 그 경악하는 얼굴은. 설마 이 몸이 못생겼다고 말할 참이냐?”
“음….”
잔꾀를 굴릴 때처럼 키리아가 비음을 길게 났다.
“오, 그렇네. 가울, 네가 공작성에서 최고 잘 생겼어. 맞아. 외모 1위야.”
“헹. 그치?”
“응, 진짜 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네. 그니까 내일도 낼 모레도 내 옆에서 도와줘.”
“하, 진짜 어쩔 수 없다니까.”
툴툴거리면서 히죽거리는 가울의 대답을 끝으로 방 안은 조용해졌다.
제논은 저도 모르게 마족인 가울을 속일 만큼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지그시 좁아졌다.
‘가울이 공작성에서 가장 잘 생겼다고? 진심인가?’
제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왔기에 자신이 분명 미남 축에 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미남 중에서도 어느 수준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때는 자신이 미남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가울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신경쓰는 거지.’
제논은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메데이아의 제자니까 그런 것 같았다.
키리아의 취향이 메데이아의 취향과 비슷할 것 같으니까.
“…후. 한심하군.”
제논은 멈췄던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외모의 우열을 논하는 건 그에게 하등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º º º
다음날 밤, 앨마는 콧노래를 부르며 공작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도련님께서 야식을 준비하라 하다니, 기뻐서 노래가 절로 나왔다.
“도련님, 앨마입니다.”
“들어와.”
방으로 들어간 앨마는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제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도, 도련님? 그 모습은 뭐예요?”
제논은 연회에 참석하는 귀족 영식처럼 앞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반듯한 이마며 강인하면서 부드럽게 뻗은 눈썹 등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앞머리가 거슬렸을 뿐이다. …이상한가?”
“아, 아니에요! 아주 멋집니다. 멋져요 도련님!”
“그래.”
제논의 입꼬리가 살짝 깊게 패였다.
앨마는 제 눈을 의심했다.
도련님이 외모 칭찬을 받고 기뻐하시는 건가 지금?
“말했던 간식은 가져왔나?”
“아, 예! 그러믄요. 말씀하신 쿠키를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가울은 오늘도 키리아와 함께 있나?”
“예.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더라고요.”
앨마가 재밌다는 듯 킬킬 웃었다.
“가울 녀석은 귀찮아하면서도, 아가씨가 잘생겨서 옆에 있어 달라고 하면 싫은 척하면서 온갖 수발을 다 들더군요.”
“…가울이 잘생겼나?”
“객관적으로 그렇긴 하지요.”
곱게 패였던 제논의 입꼬리가 딱딱해졌다.
“하지만 도련님이 훨씬 잘생기셨지요. 수많은 미남을 거쳐간 저도 도련님만큼 잘생긴 사람은 보질 못했어요.”
“의견 고마워. 하지만 앨마의 의견은 너무 편향된 것 같군.”
제논이 쿠키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니 좀 더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야겠어.”
그는 곧장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º º º
“휴우….”
시약 도구와 연구 일지에서 한참 만에 눈을 든 키리아가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야. 괜찮냐?”
가까이서 부르는 가울의 목소리에 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엄마얏, 깜짝아! 왜 이렇게 가까이 있어?”
삐―!
알이 튀어 올라 가울의 턱을 가격했다. 그리고는 키리아의 품으로 굴러갔다.
“저 미친 알 같으니…!”
가울이 으르렁댔지만 전처럼 알을 때리지는 못했다.
알의 병증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키리아는 눈의 피로를 느끼고 미간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었다.
안구 정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 가울의 약발도 떨어졌네. 이제 가울을 봐도 기운이 안 나.”
“뭐야? 내가 가장 잘생겼다면서?”
“사실 최고는 아니지. 공작성 명실상부 최고 미남은 공작님이잖아.”
“그건 그렇지.”
환영식이 있던 날부터 오늘까지 본의 아니게 제논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나 진단을 며칠째 못했으니 걱정도 됐다.
“에구구, 피곤해도 시간을 내서 공작님께 가봐야 하려나.”
“그 정도냐?”
“그럼. 공작님 미모는 국보급, 인간문화재라고.”
장난스레 웃으며 기지개를 켜자 굳어 있던 척추에서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났다.
끼이익.
그때, 덜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앗, 공작님?”
“…내가 인간문화재라고요?”
왠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을 한 제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