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41)

39화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변을 두리번 살핀 키리아는 얼른 전서구를 받았다.

숲지기와 편지를 주고받는 걸 공작성 사람들에게 들키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니까.

‘공작님이 내 숨은 팬이었다니 놀랍긴 한데.’

요 며칠 마음속에서 숲지기의 주가가 수직 상승하는 중이라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채혈 좀 하자고 할 때마다 맛있는 걸 먹여버리는 공작님이 얄밉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숲지기에게 푸념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너무 조잘대는 건 메데이아의 컨셉에 맞지 않으니까.

그렇게 푸념을 자제하며 편지를 썼고 지금 그 답장이 온 참이다.

“무슨 얘기를 썼을까?”

키리아는 편지를 펼쳤다.

고민이 있음을 넌지시 비쳐서 그런지 이번엔 숲지기가 제 고민을 토로하고 있었다.

[…혹시 메데이아 님께서도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계속해서 싫은 일을 강요하는 일 말입니다.

최근 한 여성분이 제 거절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정말 곤란합니다.

그분이 확실히 단념하도록 할 방법이 없을까요?]

쯧쯧. 키리아가 혀를 찼다.

무슨 고집을 부린다는 건지 명확하게 쓰여 있지는 않았지만 뻔했다.

“연애 문제구만.”

숲지기를 따라다니는 끈질긴 여자가 있는 모양이다.

‘팬의 연애문제라니, 귀여워.’

그래도 인내심이 강해 보이는 숲지기가 이럴 정도라니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인지도 몰랐다.

“음.”

펜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키리아는 이내 답장을 썼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거머리 같은가 보네요? 그런 상대에겐 맞불 작전이죠.

상대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강수를 둬서 이걸 안 들어주면 나도 안 해, 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효과는 보장해드리죠.]

“같이 힘내자구요, 숲지기 씨.”

키리아가 손가락으로 전서구의 부리를 건드렸다.

“부탁해.”

“삣.”

편지를 삼킨 전서구가 날아갔다.

창문을 닫은 키리아는 불면증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재들을 골라냈다.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약이 거의 통하지 않는 몸이니까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 숲지기의 조언을 실행하려면.”

강력 수면제가 완성되는 대로 공작의 방에 몰래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소드마스터라 청각도 되게 예민할 텐데, 발소리 때문에 깨버리면 어떡하지?

“뭔가 발소리를 줄일 만한 게….”

“피루루.”

그때 하피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늦은 조공을 바쳤다.

하피를 빤히 바라보던 키리아는 녀석의 깃털을 붙잡았다.

“이 깃털, 되게 따뜻해 보인다.”

1위 님의 칭찬에 소녀 하피가 기뻐하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피루루 피루피룻! (겨울을 대비해서 털갈이를 한 깃털이에오!)”

“이거 나 줘.”

“피룻…!?”

심상치 않은 탐욕을 감지한 하피가 새파랗게 질렸다.

하피의 귀여운 얼굴이 울상이 되자 당황한 키리아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러고는 책상에 있던 사과 한 쪽을 내밀었다.

“너 이거 없지? 내가 먹으려던 건데 깃털 주면 이거 너한테 줄게.”

“피루룻!? (1위 님의 먹이를 저에게요?!)”

잠시 후, 홀쭉해진 하피는 사과를 두 손에 소중히 들고 다른 마물들에게 자랑하러 갔다.

그렇게 강탈한 하피 털은 바느질 잘하는 하인의 손에 의해 슬리퍼로 재탄생했다.

이제 몰래 채혈할 준비가 끝났다.

º º º

모두가 잠든 밤.

부우— 부우—

밤눈 밝은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키리아는 성의 복도를 살금살금 지나갔다.

한 마리 고양이처럼 사뿐하면서도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키리아는 제논의 방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하피 슬리퍼의 효과가 아주 탁월해서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은 덕분이었다.

제논도 깊게 잠들어 있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해서 키리아는 채혈 성공을 거의 확신했다. 아니, 확신했었다.

주사기를 제논의 팔에 꽂기 직전, 그에게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래서 지금 키리아는….

‘칫.’

제논에게 짐짝처럼 안겨서 문밖으로 실려가는 중이었다.

키리아는 야속하게 꿍얼거렸다.

“공작님은 정말… 정말… 주치의 맘도 모르는 바보예요!”

“감봉당하고 싶습니까?”

“죄송합니다….”

키리아는 꿍얼거리듯 사과했다.

분명 성공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주사기를 꽂으려 했을 때, 어둠 속에서 번뜩 나타난 제논의 진홍빛 눈은 정말이지 섬뜩했다.

놀란 나머지 키리아는 딸꾹질이 절로 나왔다.

채혈을 한 번만 하자, 안 된다, 제논과 실랑이도 벌였다.

하지만 제논은 키리아가 주치의로서 건강한 생활 습관을 권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여도, 치료를 위한 본격적인 행동은 허용하지 않았다.

키리아가 그와의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낀 건 그때였다.

“근데 공작님, 방금 할 수 없다고 하셨죠? 하기 싫다가 아니라.”

“…….”

정곡을 찔렸는지, 표정이 굳은 제논은 급기야 키리아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그럼… 나와 결혼할 수도 있겠습니까?”

“네에?”

“나와 함께 여기서 평생 사는 겁니다. 그 약속을 한다면 그대에게 치료받고. 어떻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결혼하기 싫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결혼을 하자니, 어불성설이지!’

게다가 결혼을 언급하는 제논의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키리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거렸다.

“죄송한데 공작님은 제 타입이 아니세요.”

“후―.”

“지금 안도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대답과 달리 제논의 표정이 금세 편안해졌다.

아주 현명한 결정이라고 칭찬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키리아는 더 자존심이 상했다.

“공작님, 다시 말씀드리는데 진짜진짜 제 타입 아니시거든요? 그리고 저 남부에서 인기 많아요. 결혼시장에서 1순위라고요.”

뒤에서 1순위.

“제 이상형과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져 계시니까 저한테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마세요. 아주 당황스럽네요.”

“알겠습니다. 약속드리죠.”

“약속한 거예요! 왕의 이름으로!”

“네.”

제논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럼 얘기는 끝난 거 같은데.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나가 보십시오.”

“꺅!”

그렇게 몸이 달랑 들어올려졌고, 지금 이렇게 그에게 안겨 문밖으로 쫓겨난 참이었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여기서 물러나면 채혈은 진짜 물 건너간다!’

다급한 나머지 문틈에 발을 잽싸게 끼워 넣었다.

놀란 제논이 멈칫한 사이에 얼른 말을 쏟아냈다.

“뭘 걱정해서 치료를 거부하시는지 몰라도 절 믿어보세요. 공작님의 그 병, 제가 치료할 수 있다고요.”

“내 병은 치료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네…?”

이대로는 키리아도 물러서지 않을 걸 짐작했는지, 제논이 조금 더 자세하게 말했다.

“치료되어선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남이 내게 해줄 일도 없고. …그녀라면 몰라도.”

“그녀요?”

“메데이아 말입니다. 뛰어난 약제사이자 독초 연구의 전문가.”

“어, 정말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병을 더 키운다고 욕을 하던데….”

제논이 자신의 팬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키리아는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팬이라는 로하넨의 말이 맞는지, 제논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극구 메데이아를 변호하기까지 했다.

내심 흐뭇하게 듣고 있던 키리아가 문득 손을 들었다.

“공작님.”

“뭡니까.”

“전에는 분명 메데이아를 그냥 유명하니까 알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그런데 이 태도는 마치… 오래된 열성 팬 같으신데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키리아의 태도에 제논은 더 숨기는 걸 포기했다.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특별히 더 잘 해드렸을 텐데요. 메데이아의 사인, 혹시 필요하시면 갖다 드릴까요?”

흠칫.

“네― 니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제논의 대답이 급히 방향을 틀었다.

키리아는 입을 막고 푸흡 웃었다.

얼굴이 상기된 제논이 미간을 찌푸렸다.

“필요 없… 없습니다. 그런다고 그대에게 내 병을 다루게 하진 않을 테니까. 메데이아만 다룰 수 있으니까 단념하십시오.”

눈앞에서 침실 문이 냉정히 닫혔다.

키리아는 고개를 천천히 갸웃했다.

“…그 메데이아가 바로 난데?”

내가 메데이아라는 건 비밀인데 병을 치료하려면 메데이아가 되어야 하는 이 상황.

내 실력을 알아주는 팬이 또 있었다니, 흐뭇하면서도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린 건 방에 돌아와서였다.

“어? 그러고 보니.”

숲지기도 북부에 살지 않나?

게다가 요샌 답장이 엄청 빨랐다.

마치 아주 가까이에 사는 것처럼.

“…….”

순간 굳어졌던 키리아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에이, 설마아.”

객관적인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이상은 전부 추측일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키리아의 기억력이 숲지기에 대한 정보 하나를 불쑥 떠올렸다.

‘금색의 눈동자!’

어쩌다 나온 얘기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신체적 특징에 대해 서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숲지기는 분명 금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공작의 눈은 마족과 같은 붉은색.

“아… 다행이다. 역시 아니었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키리아였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왜지? 공작님이 숲지기가 아니면 기뻐해야지 왜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거야?’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

키리아의 환영식 날짜가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푸른달이 뜨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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