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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141)

38화

로하넨은 주군의 오전 시중을 들기 위해 침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가울이 옆에서 졸졸 따라왔다.

“야, 안경…. 진짜 왕 괜찮은 거야? 막 실실 웃었다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는다니까요. 주군이 너무 안 웃으셨던 겁니다.”

“아니 진짜 얼굴이 고장난 줄 알았다고! 그렇게 히죽거리는 왕은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그건… 휴. 아닙니다. 그냥 저한테 맡기세요.”

분명 메데이아 님의 답장이라도 받았던 거겠지.

“다음부터 그런 모습을 보면 함구하시고 저한테만 말하세요. 당신이 다룰 사안은 아닙니다.”

“어, 알았어. 나도 왕의 위엄이 쪼끔 사라진 모습을 다른 놈들이 아는 건 짜증나니까.”

웬일로 순순하게 대답하네요…?

로하넨이 보기엔, 주군보다 가울이 오히려 고장난 것 같았다.

작위를 받았다고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태도가 싹 바뀌다니?

정말 마족의 사고방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제논의 침실 앞에서 키리아와 마주쳤다.

로하넨이 빙긋 웃었다.

“키리아 양. 좋은 아침입니다.”

“여, 풀떼기. 오늘도 짜리몽땅하네.”

“좋은 아침이에요, 로하넨. 가울 너는 상체 노출 좀 그만하고.”

“노출이 아니라 조끼 입은 거야!”

키리아는 무시하고 말했다.

“공작님께 영양제를 드리려고 왔어요. 급한 업무시면 제가 밖에서 기다릴까요?”

“아닙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키리아가 손에 든 약병에는 알약들이 가득했다.

정말 열심히 해주는구나, 감탄하면서도 로하넨은 씁쓸했다.

‘저렇게 애써 만들어도 주군은 분명 안 드실 텐데….’

건강과 관련해서는 귓등으로 흘려버리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칩거 전에는 인간 시계라 불릴 만큼 매일 정해진 일과를 칼같이 수행하던 분이었다.

덕분에 제국 인기 1위남이기도 했지만, 기사단 내에서는 가장 재미없는 기사 1위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동안 피우지 않던 게으름을 한 번에 부리시는 듯했다.

그나마 영지 관련 일은 미루지 않고 처리하셔서 다행이지만.

‘이젠 조금씩이라도 규칙적인 생활로 돌아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키리아가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로하넨은 제논의 침실로 들어갔다.

제논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베개 밑으로 편지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주군의 사생활은 적당히 눈감아주는 게 충신의 미덕이다.

“착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주군. 그리고 키리아 양이 영양제를 만들어 왔는데….”

“영양제가 필요하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로하넨이 키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뭐예요, 공작님.”

아니나 다를까, 키리아가 새초롬하게 톡 쏘았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침대에 계시면 어떡해요. 어서 일어나서 옷 입으세요.”

로하넨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키리아 양, 잔소리는 역효과라구요.

메데이아의 제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주치의로서 하는 말입니까?”

“네? 음, 그야 당연하죠.”

“…….”

얕게 숨을 내뱉은 제논이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혼자 잠옷을 벗으려 했다.

“……?!”

예상치 못한 주군의 행동에 사고가 잠깐 멈췄던 로하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직접 하시다뇨!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얼른 다가가 시중을 들었다.

그러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뭐지? 주군이 왜 이렇게 순순히 일어나시는 거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계속 이어졌다.

“영양제도 드셔보세요. 배합 시약 대신 알약으로 만들었으니까 훨씬 편하실 거예요.”

“…….”

“마, 맛을 느낄 틈은 없을 거예요.”

키리아에게 알약과 물컵을 받은 제논이 약을 한입에 삼켰다.

“오….”

이번엔 키리아도 놀랐다.

제논이 웃나 안 웃나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던 가울이 이제 안심한 듯 말했다.

“왕. 그동안 산책을 안 하시던데 저랑 같이 오전 훈련이라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로하넨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울은 정말 바보군요. 산책도 안 하시는데 훈련을 하시겠습니까?

역시나 제논은 가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키리아가 손뼉을 쳤다.

“오, 좋은 생각이에요. 공작님,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몸은 계속 움직여주셔야죠. 가울과 검술이든 뭐든 훈련을 하시는 게 어때요?”

“…그것도 주치의로서?”

“넵.”

그러자 제논은 대답 대신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울이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본 로하넨의 턱이 바닥에 닿을 듯 벌어졌다.

맙소사.

로하넨은 저도 모르게 키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키, 키리아 양.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주군에게 마법이라도 거셨어요?”

“네? 아! 로하넨이 봐도 좀 이상하죠? 공작님이 왜 제 말을 갑자기 잘 듣는 거죠…?”

키리아도 어리둥절해 보였다.

“로하넨도 짚이는 게 없어요?”

“그, 글쎄요. 키리아 양이 메데이아 님의 제자라는 게 유일한 가능성이긴 한데 이 정도는 좀.”

“네? 메데이아의 제자인 게 왜요?”

말도 안 된다는 듯 키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메데이아의 제자라고 잘 해줄 이유는 없지 않아요? 공작님이 메데이아의 팬도 아니고.”

로하넨이 제 입을 틀어막은 채 굳어버렸다.

웃고 있던 키리아의 표정도 점점 뜨악해졌다.

“…서, 설마… 정말로요?”

“그, 그게. 으으, 제가 흘렸다는 건 주군께 비밀로 해주세요.”

“우와. 진짜 팬이라고요? 거짓말.”

눈이 동그래진 키리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영 믿어지지 않는지 표정이 얼떨떨했다.

“키리아 양….”

“아, 네. 그럼요. 공작님의 사생활이잖아요. 비밀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어쨌든 메데이아의 팬이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신 거군요?”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공작님을 움직일 수 있는 카드가 손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리아가 히힛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º º º

주방에서 앨마의 요리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현란하게 손목을 움직여 접시에 음식을 담아낼 때마다 하인들이 굵은 탄성을 터뜨렸다.

“양념치킨!”

“우오오!”

“후라이드 치킨!”

“우어어!”

“그리고 아가씨가 최근에 알려준… 마늘 치킨!”

“우아아!”

닭고기를 튀긴 고소한 냄새에 마늘 특유의 풍미가 향긋하게 섞여들었다.

마늘은 양념으로나 소량 쓰였지, 이렇게 메인디쉬로 활용한 음식은 처음이었다.

냄새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구경하던 임프들도 박수를 치며 군침을 흘렸다.

“늙은 인간 대단함!”

“나 치킨 먹고 싶음!”

“이건 도련님 몫이야. 너희들은 먹고 싶으면 일을 해야지.”

“크흉…!”

마물들이 치킨을 먹는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서열 1위 키리아가 내려주는 포상.

‘이번 주 조공왕’으로 선정되면 상으로 치킨 한 마리를 받을 수 있었다.

“나 조공 바치러 간다!”

“나도!”

앞다퉈 주방을 뛰쳐나가는 임프들.

그 사이 앨마는 치킨을 스테이크처럼 품위 있게 접시에 담고, 다른 요리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져갔다.

‘어차피 식당에 도련님은 안 계시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 늙은이의 정성을 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앨마는 매일 주인 없는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트레이를 끌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

“도, 도련님?”

앨마는 정말이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련님이 식탁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옆에 앉아 있는 키리아가 경악한 앨마를 향해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오늘은 몸을 많이 쓰셨거든요. 공작님께서도 배가 무척 고프실 거예요.”

“아, 아! 그래요. 제가 너무 늦게 왔군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다. 천천히 해.”

앨마가 서둘러 두 사람 앞에 식사를 차렸다.

그리고 도련님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서, 시중드는 하인을 다 물리고 자신이 대신 대기했다.

덕분에 도련님이 여기 앉은 건 순전히 키리아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공작님, 이것도 드셔야죠.”

“아직 반도 안 드셨잖아요. 조금 더 드세요.”

“오늘부터는 조금씩이라도 주무시도록 해보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가울이 잘 막아줄 거예요. 저도 금방 도와드릴 거고요.”

“물론 전부, 메데이아의 제자이자 주치의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엣헴.”

“…….”

제논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늘어놓는 대신 치킨을 큼직하게 썰어, 키리아가 입을 또 열 때 쑥 밀어넣었다.

“웁, 우물우물.”

“이제 좀 조용하군요.”

“저 입 다물게 하시려고― 웁. 우물우물.”

그런 식으로 키리아가 귀찮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먹여줬다.

특히 키리아가 채혈 얘기를 꺼내면 고기와 채소를 연속으로 넣어줬다.

채혈의 채 자만 꺼내도 볼이 볼록해져서, 키리아는 나이프 한 번 안 들었는데 이미 배가 불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이좋게(?) 식사하는 광경을 보고 앨마는 내심 감격했다.

이 놀라운 목격담을 하인들에게 전했더니 예상대로 전부 놀랐다.

거기에 로하넨의 목격담까지 더해지니 다들 뒤집어졌다.

“주, 주군이 가울과 훈련을 하셨단 말임까?”

“접시를 깨끗이 비우시고요?”

“오늘부터 밤에 잠을 주무신단 말임까?”

이 순간 공작성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경탄했다.

‘우리 주군이 달라지셨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키리아의 환영식에 쓸 술을 일부 뜯어 조용히 잔치를 벌였다.

“주군의 건강을 위하여!”

주군이 예전처럼 건강해지길 기원하기도 하고.

“아가씨의 승리를 위하여!”

키리아의 성공적인 공작님 조련을 응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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