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창문을 통해 방으로 돌아온 제논은 먼저 손을 깨끗이 씻었다.
책상에 바르게 앉은 그는 편지를 자신의 앞에 똑바로 내려놓았다.
“…….”
그렇게 기다리던 편지였건만, 막상 손을 대기가 머뭇거려졌다.
손끝을 탑처럼 모으고 편지를 투시할 기세로 바라봤다.
제논의 눈가에 음영이 졌다.
‘혹시 이제부터 편지를 그만하겠다는 내용이면 어쩌지…!’
걱정과 간절함으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뭐든지 할 테니 부디 칼럼 연재처럼 편지도 그만두겠다는 말만 아니기를.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페이퍼 나이프로 천천히 봉투를 개봉했다.
오랜만에 보내온 답장은 어김없이 한 장.
역시 차갑고 지적인 메데이아답다.
제논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숲지기 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감사해요.
인기투표 3등, 숲지기 님이 애써주신 거죠? 그런 비생산적인 투표는 관심 밖이었는데 당신의 노력이 눈에 보여서 정말 감동이었답니다.]
제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데 그 미소는 편지를 읽어내려감에 따라 굳어졌다.
[그동안 편지를 못한 건 미안해요. 갑자기 까다로운 환자를 돌보게 되어 바빴거든요.]
환자?
설마 리안 경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계속 읽어내려갔다.
[참 골치 아픈 환자예요. 제가 권고하는 처방은 잘 따르지도 않고요. 절 못 믿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니.
아무래도 ‘환자’는 본인을 돌봐주는 약제사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사실은 지금도 계속 설득 중이죠. 그동안 마나 진단을 수시로 하면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네요.
그런 이유로 어쩌면, 앞으로도 답장이 늦어질지도 모르겠어요.]
“…….”
제논의 붉은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동요했다.
처음에 든 감정은 편지를 계속할 수 있다는 안도.
다음으로는 차가운 분노였다.
전문가의 소견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환자가 편지를 늦춘 원흉이었다고?
마나 진단까지 받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제논은 마나 진단이 얼마나 편안하고 효과가 뛰어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메데이아가 제 손을 잡고 깍지를 끼는 상상을 해봤다.
하지만 메데이아의 얼굴을 몰라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키리아로 바뀌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공작님의 손을 놓지 않을게요. 약속.」
그 순간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 버렸다.
“…아.”
이런 엄청난 실수를?
당황한 제논은 얼른 구겨진 부분을 몇 번이고 정성스럽게 폈다.
어쨌든.
감정 소모는 쓸모없다.
메데이아가 곤란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돕는 게 진정한 팬의 자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거침없이 답장을 써내려갔다.
길이가 편지지 한 장을 넘기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지금은 내 구구절절한 잡담보다 메데이아의 고충이 더 중요하니까.
그가 편지 봉투를 전서구에게 주며 당부했다.
“죽을힘을 다해 날아가라.”
음산한 살기가 실린 목소리였다.
“늑장을 부리면 네 머리를 교체해버릴 테니까.”
“삑…!?”
살벌한 위협을 받은 전서구는 파드득 몸을 떨며 죽을힘을 다해 숲으로 날아갔다.
º º º
그리하여.
“삐잇, 삐. 삐삣! 삐히.”
부품 교체의 위협 속에서 전력 질주한 전서구가 키리아에게 한탄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랬어? 대박이네.”
물론 키리아는 전서구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한결 후련해하는 전서구를 내버려 두고 편지를 뜯어보았다.
무척 짧은 분량에 내심 서운했던 것도 잠시.
편지 내용을 다 읽은 키리아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 황금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어리석은 환자도 언젠가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느새 당신의 팬이 되어버렸다는 걸.
그러니 저와의 편지는 계속하시되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십시오.
당신은 항상 옳으니까요.]
“평소답지 않게 취소한 문장도 있네.”
너무 반듯한 글씨체와 재미없는 글솜씨 때문에 숲지기가 로봇처럼 생각되곤 했는데….
“사람은 사람이었네. 히힛.”
조금 귀여워 보였다.
은근히 귀찮게 여겼던 숲지기에 대한 호감도가 요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다른 작가들처럼 사인회를 열 수 있다면 숲지기에게는 아주 열정적인 사인을 해 줄 텐데.
사인이 뭐냐. 허그까지 해줄 수도 있다.
근데 숲지기는 자기가 까는 사람이 마물 공작이라는 걸 알까?
킥킥 웃음이 났다.
“음, 그래도 나름 속사정이 있는데 공작님이 바보 취급당하니까 좀 찔리는 걸.”
에이, 서비스다.
“그래도 내 고용주니까 실드는 쳐주자.”
키리아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펜을 꺼내 바로 답장을 썼다.
“자, 부탁해.”
“삐힉.”
흠칫한 전서구가 마지못해 편지를 입에 물고 퍼드득 날아갔다.
º º º
“어째서 돌아왔지?”
전서구가 전에 없이 빠르게 돌아오자 제논은 편지 전달이 실패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틀림없는 메데이아의 답장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설마, 메데이아가 이 근방에…?”
가능성이 높았다.
독초를 연구하는 약제사니까 북부를 수시로 드나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는 건….
실물 영접의 기회인가?
“…헉.”
정신을 차려보니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 직전이었다.
‘이런 행동은 안 돼!’
제논은 극한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아 제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메데이아다.
그녀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팬이 마물 공작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녀의 이미지는 회복불능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도움은 못 될망정 민폐만큼은 절대 끼치고 싶지 않았다.
‘큭, 그래도 사인 정도는 받고 싶다….’
고민하느라 붙잡고 있는 창틀이 우그러지는 줄도 몰랐다.
결국 창문에서 손을 떼고 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실제의 메데이아는 어떻게 생겼을까.
메데이아의 이목구비를 상상해보는데, 완성하고 보니 키리아의 얼굴이었다.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미간을 검지와 엄지로 지그시 눌러 잡았다.
메데이아 본인을 본 적도 없고 그 제자만 알다 보니 상상력이 빈곤해진 모양이다.
어쨌든 궁금한 마음으로 메데이아의 답장을 읽어내렸다.
“……!”
그러다 어느 구간에서 우뚝 멈췄다.
[고집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제 환자는 볼 때마다 새로워요.
굉장히 잘생긴 데다 풍채가 좋고 과묵해요. 눈빛은 은근히 관능적이면서 자세히 보면 꽤 귀엽다니까요?]
“풍채가 좋고 잘생겼다….”
기사니까 당연히 풍채는 좋겠지.
리안 경이 관능적인 눈빛의 소유자인지는 몰랐지만… 메데이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절세미남이 분명했다.
제논은 자기도 모르게 거울 속 제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귀여워도 주치의인 제 처방을 따라주지 않으면 속상하죠.
본인이 환자라면 주치의의 소견을 따르는 게 기본 예의 아닐까요? 전 기본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정말 싫거든요.
숲지기 님은 당연히 기본을 지키시겠죠?]
움찔.
“…….”
갑작스럽게 양심이 찔렸다.
º º º
“들어가겠습니다, 주군.”
로하넨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창밖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제논에게 라데츠의 이상 상황을 보고했다.
“포이즌 리저드들이 라데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는 정보입니다. 암컷 포이즌 리저드의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요?”
“그보다는 약탈을 계획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 녀석들은 개체 하나가 당한 정도로는 복수 같은 비효율적 일을 하지 않아. 우두머리의 자식이 당했다면 모를까.”
“아, 그렇겠….”
로하넨과 제논이 동시에 멈칫했다.
죽은 암컷 리저드는 알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라는 게 떠올랐다.
로하넨이 불안하게 말했다.
“…일단 기사급 인원을 배치해 밤마다 경계하도록 하겠습니다. 낮에는 자경단으로도 충분할 테니까요.”
“그래.”
“휴. 그래도 그분들이 마을을 지켜주시니 한결 부담이 덜하네요. 성에 들이시진 않을 겁니까?”
제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듯 로하넨이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로하넨.”
물러나려는 그를 제논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불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뭔가요?”
창가에서 몸을 돌린 제논이 진지하게 로하넨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기에 난 잘생겼나?”
“…예?”
“아니면 귀엽다거나.”
휘잉.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
로하넨이 간신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잘생기신 건 맞는데 귀엽다는 표현은 조금.”
“아니다?”
“죄송하지만 주군의 몸집은 귀엽다기엔 좀… 건장하시지 않습니까. 어깨도 넓으시고요.”
제논은 입을 다물었다.
오랜 눈치 보기 경력으로 로하넨은 그가 조금 실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그렇지만 분명 잘생기셨습니다. 아름답기까지 하시고요!”
“그래도 외모에서는 밀린다는 건가….”
“밀린다니요? 누구와 승부라도 하십니까?”
“아니야. 나가.”
로하넨이 걱정스러워하며 떠난 후, 제논은 새 펜을 들었다.
[환자의 뛰어난 외모도 메데이아 님의 속상함을 덜어낼 순 없었나 보군요. 환자가 처방을 따르지 않으면 당연히 그렇겠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톡톡, 펜 끝을 두드리다가 계속 이어 썼다.
쓸데없는 오기인 건 알지만, 그녀의 팬으로서 외모에 밀린다면 다른 부분에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저는 제 주치의의 말을 아주 잘 따르는 편입니다.]
…오늘부터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아니지.
‘하지만 환자 때문에 메데이아가 스트레스를 받게 할 순 없는데.’
잠시 생각하던 제논이 내용을 덧붙였다.
[때로는 환자의 허락보다 치료를 우선해야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인 희망과 진전이 보인다면 아무리 바보 같은 환자라도 마음을 바꿀 겁니다.
저도 주치의를 둔 환자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옆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반드시 필요한 처방이 있다면 소신 있게 밀고 나가십시오.]
º º º
숲지기가 보낸 이 편지를 받고 키리아는 고민 끝에 결심했다.
기회를 봐서 공작님을 몰래 채혈하자고.
[숲지기 님도 주치의를 두었을 줄은 몰랐네요. 같은 환자이니 그 심정을 잘 아시겠죠.
조언대로 해 볼게요. 고마워요.]
제논도 키리아도 만족스러운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