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키리아는 질문을 한 사내가 황제의 끄나풀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이쪽으로 꽂히는 시선들을 보니,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경단원 모두가 자신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키리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까 잡화점에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특히 루이스에게서 울긋불긋한 반점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질문해 준 덕분에 잘 하면 저 끄나풀을 이곳에 묶어둘 수 있겠는데?’
치료제 개발에 걸리적거리니까 내 선에서 처리해버리자.
금방이라도 큭큭큭, 하는 음침한 웃음을 흘릴 것처럼 키리아의 눈빛이 빛났다.
공수가 뒤바뀐 줄도 모른 채, 루이스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아, 오해는 마세요. 전 남부에서 온 상인인데, 장사를 계속 하려면 북부가 안전하단 걸 확인해야 하니까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래요?”
키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공작님의 마물병이 두려우실 수 있겠네요. 주제넘게도 제가 답변을 드리자면,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마물병의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아….”
사람들이 실망하여 길게 탄식했고 루이스는 의기양양해했다.
바로 그 순간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여러분이 걱정하는 것처럼 마물병은 저주도 불치병도 아니에요. 그저 우리가 처음 보는 병일 뿐이죠. 그건 여러분도 걸릴 수 있어요. 사실은 이미 걸린 사람도 있죠.”
“뭐, 뭐라고요?”
“여기 이 분.”
키리아가 한스를 가리켰다.
“한스 씨라고 하셨죠? 지금 한스 씨가 마물로 인한 병을 앓고 있어요.”
“그, 그럴 리가요! 대장은 그냥 독감에 걸린 건데요? 겨울이 다가오면 누구나 걸린다고요.”
자경단원이 말했다.
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누구나 걸려요. 제 말은, 누구나 걸리는 독감이 마물 때문에 변이됐다는 거예요.”
키리아는 잠깐 양해를 구한 뒤 한스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의 팔뚝에 있는 크고 작은 보랏빛 멍들이 드러났다.
곰팡이라도 핀 것 같은 흉측한 증상에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한스가 민망해했다.
“난 약초를 먹으면 금방 사라질 줄 알았소.”
“그걸로는 소용없어요. 여러분은 과일과 채소가 마기로 오염된 모습을 잘 알고 계시죠?”
“……!”
“그게 사람에게 나타나게 됐다고 보시면 돼요.”
“그, 그럴 수가.”
“마기에 오염된 건 해독할 수도 없잖아!”
사람들이 동요했다. 어느새 관심은 공작의 마물병에서 새로 나타난 변이 독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주민들처럼 동요하던 조앤이 키리아의 눈짓을 받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핫. 그 말씀은.”
그녀는 불안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목청을 돋웠다.
“사람들이 여태 눈치채지 못한 걸, 아가씨는 여기 오자마자 알아차리신 거예요?”
“물론이야, 조앤. 난 무려 공작님께서 직접 내신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한 약제사니까.”
그 대화에 사람들의 동요가 빠르게 진정됐다.
“공작님께서 직접 시험을?”
“그렇다면 실력은 확실할 거야….”
키리아를 향한 시선에 조금씩 신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언젠가는 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네.”
“……!”
깔끔하고도 확신에 찬 대답이 사람들의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
“단, 그러려면 원인을 제대로 분석해야 해요.”
“원인이라면…?”
“독감이 갑자기 변이된 시기에 맞춰 일어난 일들 말이에요. 아마도 외부에서 온 누군가 때문이겠죠?”
거기까지 말하자 라데츠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낯선 상인인 루이스를 노려봤다.
“어어?”
순식간에 고립된 상황에 처하자 루이스가 당황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 전 아니에요!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다들 저 사람의 목을 주목해 보세요.”
키리아의 말에 사람들이 버둥거리는 루이스를 제압하고 목깃을 벌렸다.
그러자 울긋불긋한 반점이 훤히 드러났다.
키리아가 태연히 말했다.
“역시, 저 사람도 병에 걸렸네요.”
“아, 아냐! 이건 오면서 독초에 쓸려서 그런 거라고요!”
아마 깔깔이풀이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루이스 때문에 포로나가 시작된 건 사실이었다.
키리아는 짐짓 코웃음을 치며 루이스를 가리켰다.
“그런 변명은 누구나 할 수 있죠. 여러분. 제가 치료제를 만들 때까지 저 사람을 자가격리 시키세요.”
“이, 이게 무슨 자가격리야!”
루이스가 항변했지만 이미 험악해진 사람들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어쩐지 수상하게 굴더라니!”
“사실 포이즌 리저드도 당신이 끌고온 거 아니야!?”
“으악, 이거 놔! 이건 모함이야!”
결국 루이스는 사람들에 의해 마을의 빈 창고로 끌려갔다.
키리아는 그 뒷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정정당당하게 모함으로 승부해서 이겼어!’
양쪽 다 모함을 한 거니까 정정당당한 게 맞지, 맞고말고.
이어 한스에게는 친절하게 당부했다.
“한스 씨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피하시는 게 좋겠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독감이 옮을 수 있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키리아가 공작성의 약제사라는 걸 알게 된 한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참는 눈치였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키리아는 이때다 싶어 주사기를 꺼내보였다.
“한스 씨의 피를 좀 뽑아도 될까요?”
이상하게 신이 난 키리아의 태도에 한스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º º º
질 좋은 약재들과 멋진 혈액 샘플까지 얻고 성으로 돌아가는 길.
키리아는 시험관 속 한스의 혈액을 흐뭇하게 감상 중이었다.
마을에 변이 독감이 퍼지는 걸 최대한 늦추기 위한 예방 조치도 당부해 뒀다.
철벽 치는 제논을 보다가 말 잘 듣는 환자를 대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싱글벙글 웃는 키리아의 옆모습을 보고 몰래 엄마 미소를 짓던 조앤이 중간에 마차를 세웠다.
“아가씨, 잠깐 쉬었다 갈까요? 점심을 싸 왔거든요.”
“응.”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불 피울까요?”
“응.”
“앗, 장작이 없네요. 제가 금방 나뭇가지를 모아올게요!”
“응.”
멍하니 혈액을 감상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혼자 남아있었다.
“조앤은 어디 갔지? …아, 불 피우러 갔다 온댔지.”
적당한 돌 위에 쪼그려 앉은 키리아는 발장난을 치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때,
“삐삑!”
파란색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마을에서 볼일을 끝낸 후, 키리아는 잡화점에서 산 편지지로 숲지기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도 전서구에 날려보냈는데, 벌써 돌아올 줄이야.
“설마 숲지기가 어딨는지 못 찾아서 돌아온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
“헉. 답장이 벌써 왔다고?!”
“삑.”
편지를 뱉은 전서구가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부풀렸다.
키리아는 겉면에 적힌 숲지기의 필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숲지기가 아주 현실감있게 느껴졌다.
“역시 숲지기는 북부인이었구나! 그래도 설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사는 줄 몰랐는데…. 그나저나 숲지기는 좀 어때? 내 편지가 너무 늦어서 실망하진 않았어?”
“삐잇….”
이상하게 그 질문을 받은 전서구의 가슴털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왜 그래? 숲지기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럴 사람은 아닐 텐데.”
“삐히, 삐삐….”
공작성 방향으로 부르르 진저리를 친 전서구가 알아듣지 못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º º º
키리아가 숲지기의 답장을 받기 전.
“…….”
제논은 이미 몇 번이나 읽은 메데이아의 칼럼을 읽고 있었다. 연재가 중단되기 전의 잡지였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메데이아의 답장이 이렇게 늦는 건 처음이었다.
설마 칼럼처럼 편지 교류도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신경이 절로 곤두섰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소리가 저렇게 컸던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왕!”
옆에서 명령을 기대하고 있던 가울이 재깍 대답했다.
와장창!
가울의 주먹에 50년 역사의 고풍스런 엔틱 시계가 박살났다.
로하넨이 으아아 울부짖을 게 뻔했지만 제논도, 가울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잘했다.”
짤막하게 가울을 칭찬해준 제논은 책상을 손끝으로 초조하게 두드렸다.
메데이아가 인기투표 결과를 기뻐했다니까 분명 답장이 오겠지.
그런 기대감으로 답장을 기다리고 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자꾸만 초조해졌다.
이럴 땐 신경안정제가 필요하다.
“키리아는 언제 오지?”
제논의 질문에 가울은 이번에도 재깍 대답했다.
“어, 풀떼기라면 마을에 갔으니까 곧 돌아올 겁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제논은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을로 통하는 성의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삐삣!”
파란 새가 나타나 제논의 팔에 내려앉았다.
요즘 통 보이지 않던 마도 전서구였다.
“설마?”
전서구가 퉤 뱉은 편지 봉투에는 받는 이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숲지기 님께]
제논의 눈이 확 커졌다.
메데이아의 답장이다!
다행이 편지를 그만둔 게 아니었어.
초조했던 가슴이 이제는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편지를 펼쳐보려던 제논은 이내 생각을 바꿨다.
‘모처럼의 편지다. 빨리 읽어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봤다.
방은 이층에 있지만 성의 층고가 높아서 사실상 삼층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제논은 주저 없이 무릎을 굽혔다.
“왕! 산책 가시게요? 제가 간식을 가져올—”
휘익!
제논이 가볍게 뛰어오르면서 가울의 붉은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쳤다가 나풀나풀 내려왔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할 생각도 못하고 가울이 부들부들 떨었다.
“주, 주군이 싱글벙글 웃고 계셨어…! 미치신 건가? 마물병 때문인가? 이, 이럴 게 아니야.”
쭉정이. 쭉정이 신관 어딨지?
가울이 처음으로 로하넨에게 의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