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41)

35화

“…거 안 사려면 가슈.”

“고르고 있다니까요.”

루이스는 잡화점 주인의 눈초리를 무시하며 출입문을 연신 힐긋거렸다.

주인의 은밀한 명령을 받고 북부 라데츠 마을로 온 지 며칠이 지났다.

일단 공작성 인근 마을로 오기만 하면 공작에 대한 온갖 안 좋은 소문을 수집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의외로 녹록지 않았다.

“또 물건은 안 사고 공작님에 대한 것만 캐물으려는 거요?”

“아니라니까요, 거 참.”

“외부인 주제에 공작님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고 다니면 아주 찜질을 당할 줄 아쇼.”

억울해진 루이스가 버럭 반박했다.

“아니, 공작님 때문에 북부에 마물이 들끓는다고 투덜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위하는 척입니까?”

“뭐요?”

얼굴에 털이 수북한 잡화점 주인이 인상을 구기며 가슴을 들이밀었다.

“투덜대도 영지민인 내가 투덜대야지! 외부인인 당신이 뭐라 할 게 아니요!”

이처럼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인들이 모두 란페르세 공작을 싫어한다고 봤다.

루이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착각이었다.

공작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라도, 한껏 투덜거린 뒤에는 꼭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도 공작님은 우릴 위해서 희생하신 분이야.”

란페르세 가문의 가신들처럼, 영지민들 역시 공작이 마물병에서 회복하여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어설픈 이간질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포이즌 리저드를 마을에서 날뛰게 했을 때 기대보다 반응이 없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포이즌 리저드는 사람과 비슷한 몸집에 드래곤을 닮은, 중급 중에서도 위험도가 높은 마물이다.

그는 용병들을 고용해 포이즌 리저드를 포획한 후, 성수를 투여해 마을에서 미쳐 날뛰게 했다.

공작 때문에 푸른달이 아니어도 마물이 날뛴다는 소문을 내기 위해서였다.

녀석이 독을 뿜어내며 광분하면 사상자가 나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마을의 자경단이란 놈들이 출동하더니 꽤 능숙하게 마물을 제압해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닌데….

‘좀 더 제대로 된 접근이 필요하겠어.’

때마침 마을을 떠나는 용병들로부터 공작성에 약제사와 하녀가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고급 정보를 얻을 기회가 온 것이다.

루이스가 이 잡화점에서 미적거리는 것도, 이곳이 그나마 약제사나 하녀를 만날 확률이 높은 장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약제사는 이상한 구인공고에나 낚이는 온실 속 아가씨고, 하녀는 얼뜨기던데, 만나기만 하면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야.’

남부에서 유명한 약제사로 만들어준다고 하면 누가 넘어가지 않겠어?

그런데 며칠째 기다려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잡화점은 글렀나보다….’

루이스는 다음 장소인 약재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루이스가 떠난 후, 문 열리는 종소리와 함께 키리아와 조앤이 나타났다.

º º º

“아가씨! 있어요, 있어. 제가 말한 그 잡지요!”

“오, <월간 마법>을 사러 온 거요?”

조앤이 <월간 마법>을 여러 권 계산대로 가져오자 잡화점 주인이 흐뭇해했다.

그게 마탑의 잡지라는 걸 알게 된 키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월간 마법이 인기 많나요? 북부에서.”

“북부 전체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에선 갑자기 인기가 많아졌죠.”

잡화점 주인이 잡지를 포장해주며 말했다.

“이번 호에 실린 소설이 재밌다고 난리가 나서요. 한 권 사서 몇 명이 돌려보는 식이죠. 다들 꼬마 마법사 아리키의 활약이 대박이라던데요.”

“그, 그래요?”

“우리 딸내미가 벌써 잡초를 휘두르면서 아리키 놀이를 한다니까요.”

“하하, 하…. 다, 닮으면 안 되는데.”

키리아가 어색하게 씰룩 웃었다.

작은 시골 잡지인 줄 알았는데 마탑 잡지였다니!

이왕이면 큰물에서 데뷔하는 게 좋긴 하지만, 자신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인기라니 어쩐지 민망했다.

‘하긴 어차피 나랑은 별개의 인물(?)인데 뭐. 신경 쓰지 말자.’

그때 잡화점 주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리키가 쓴 마기 해독수 같은 게 실제로 있으면 얼마나 좋아. 독초고 뭐고 당장 사들일 텐데.”

“네?”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나저나 아가씨들 조심해요.”

잡화점 주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며칠 전부터 웬 남부 상인 하나가 안 좋은 소문을 캐고 다니지 뭐요.”

“남부 상인…?”

키리아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뭘 묻던가요?”

“푸른달이 뜰 때 마물들 때문에 무섭지 않느냐면서 피해 상황을 묻던데.”

“…아하.”

키리아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조심할게요.”

드디어 원작 이벤트가 시작됐구나!

키리아는 조앤과 가게를 나왔다.

“아가씨, 약재상으로 가실 거죠?”

“응. 그 전에, 이거 하나만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와.”

키리아의 지시를 받은 조앤이 잠시 후 돌아왔다.

“다녀왔어요. 아가씨 말대로 정말 며칠 전에 마물이 난동을 부렸대요. 사망자는 없구요.”

“역시.”

키리아는 원작의 정보를 더듬었다.

라데츠의 거리는 평범해 보였다.

사람들 모두 각자 할 일을 하러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전염병은 이미 시작됐다.

황제의 끄나풀이 마을에 마물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평범한 유행성 독감에 마물의 독이 섞였다.

그 결과 변이된 독감이 전염병의 정체였다.

원작에서는 이 병 때문에 인근 도시들까지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패닉에 빠진다.

독감의 정체를 알아냈을 땐 이미 라데츠에 사망자가 속출한 상황.

이때 여주인공 릴리가 백마법사로서 각성하여 마을과 도시를 구함으로써 명성을 높이게 된다.

‘하지만 라데츠의 민심이 공작에게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

기울어진 민심은 점점 악화되어 공작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이 영향이 공작의 가신들에게도 번져, 그들은 공작위 반납에 만장일치를 해버리고….

결국 작위를 뺏긴 제논은 마룡으로 각성한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여주인공 좋은 일만 해주고 욕이란 욕은 다 먹는 공작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공작은 내 환자이자 내 연구의 핵심 열쇠라고.’

공작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원작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병이 기승을 부리기 전에 차단해버려야 한다!

‘당장 포로나 백신을 만들어야겠어.’

키리아는 변이 독감을 전생에서 유명했던 바이러스와 독(포이즌)을 결합해 ‘포로나 독감’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가씨. 약재상을 찾았어요.”

조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의외로 손에 냄비나 꽃을 든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손님이라기보다는 꼭 병문안을 온 이웃들 같았다.

키리아가 약재상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와장창! 쿵!

“……?!”

가게에서 가구가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안에 있던 사람 몇 명이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왔다.

“마, 마물이야!”

“꺄악!”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가게에서 후다닥 물러났다.

“안에 한스 씨가 있는데! 빨리 자경단 불러와요!”

주민의 외침을 들은 키리아는 오히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가씨! 제가 엄호할게요.”

조앤도 뒤따라왔다.

가게 안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자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포이즌 리저드 두 마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망할 마물들! 당장 놓지 못해? 쿨럭쿨럭….”

“케륵! 인간이 아끼는 것! 고기가 틀림없다!”

“멍청한 놈들! 이건 고기가 아니라 약초야. 남부에서 가져온 귀한 거라고!”

“케르륵!”

포이즌 리저드 하나가 사내에게 달려들어 팔뚝을 물어뜯으려 했다.

“위험해요!”

키리아가 가게로 들어올 때부터 쥐고 있던 마물 퇴치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치이익—

“켁! 케흑!”

마물들이 눈물을 흘리며 켁켁댔다.

조앤이 뒤이어 외쳤다.

“파이어볼트!”

팍! 1서클의 파이어볼트가 고블린들의 발치로 쏘아졌다.

보잘것없는 마법이었지만 앞이 안 보여 당황한 마물들을 내쫓기에는 충분했다.

“크륵…. 다시 온다!”

포이즌 리저드들은 이를 갈며 후다닥 달아났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가게 주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키리아가 얼른 다가가 가게 주인을 부축했다.

“휴우, 고맙긴 한데… 다음부턴 용기를 자제하시오. 저것들이 독을 쓰면 실력 있는 용병들도 도리가 없으니. 쿨럭쿨럭. 가게도 엉망이군.”

“저희가 치울게요.”

방금 소동으로 널브러진 물건 중에는 무구도 보였다.

조앤이 신기해하며 투구를 집었다.

“우와, 이 투구, 전쟁이라도 한 거 같아요.”

“인마전쟁 때부터 쓰던 녀석이니까.”

“인마전쟁이요?”

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공작님의 옛 부하인가?

그렇다면 왜 성이 아니라 이곳에?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려는데 몇 명의 남자들이 안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한스 대장!”

서로 비슷한 모양새의 장비를 갖춘 라데츠의 자경단원들이었다.

“포이즌 리저드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왔는데, 마물들은 어딨어요?”

“너희들보다 신속하고 용감한 두 여성분이 이미 해결했다!”

그 말에 자경단원들이 키리아와 조앤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 여행객입니까?”

“아뇨.”

키리아는 모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공작님의 주치의, 키리아예요. 이번에 새로 왔죠. 이쪽은 제 조수 조앤이고요.”

“주치의? 공작성에 사람이 들어왔다고?”

한스라 불린 약재상 주인과 자경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가게 안으로 들어온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공작성에는 사람이 못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저 아가씨 말을 믿어? 공작님은 이미 마물들 편이라고. 공작성에도 마물들이 잔뜩 있다면서!”

공작이 마물들 편이라….

‘하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사람들은 마물을 제논의 부하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작성 밖에 있는 마물들의 행동까지 제논의 책임으로 돌리곤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저런 오해를 놔둘 순 없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님이 마물들 편이라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저는 공작성의 약제사로서 공작님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건강도 보살펴 드릴 거예요.”

그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루이스였다.

“마물병은 병이 아니라 치료할 수 없는 저주라는데, 사실입니까?”

“아뇨. 저주도, 불치병도 아니에요.”

“증거는요? 당신은 약제사니까 진짜 병이라면 당연히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죠?”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이 숨죽인 채 집중했다.

사내의 말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저게?

루이스를 향한 키리아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가늘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