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후후. 흐흐흐.”
키리아는 침대 위를 뒹굴며 잡지를 꼭 껴안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신호.
‘이걸 보고 주군께서 우울해지셨다’며 로하넨이 버리려는 걸 냉큼 받아왔다.
북부에서 이 잡지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가져온 것뿐인데.
‘인기 투표 결과가, 맙소사!’
매년 독자가 뽑는 연재 작가의 인기 순위에 이변이 일어나 있었다.
[3위: 메데이아]
이번에도 당연히 꼴찌겠거니 확신했는데 뜻밖의 결과였다.
나도 모르던 팬들이 동시에 화력을 모은 것일까… 라는 생각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이고.
“분명 숲지기겠지?”
그 사람 외에는 없었다.
키리아는 3위라는 글자를 매만지다가 잡지를 끌어안고 허공에 발장구를 쳤다.
“꺅, 진짜 어쩜 이렇게 대견한 짓을 했을까? 이뻐 죽겠어!”
그때 조앤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아가씨,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응, 그런 일이 있거든. 역시 세상은 아름다워, 조앤.”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따라서 웃던 조앤이 조공 장부를 키리아에게 내밀었다.
“처음엔 쓰레기가 많았는데 마물들이 점점 감을 잡나 봐요. 반짝거리는 귀중품이 더 많아지고 있어요. 은화랑 금화도 제법 되고요.”
“오, 기대 이상이네. 혹시 모르니까 마물들에게 도둑질은 안 된다고 신신당부 해둬.”
“맡겨주세요.”
키리아는 조앤이 정리한 장부를 훑어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다.
“참. 용병 동료들은 만나고 왔어?”
“네.”
숲에서의 사건 이후, 조앤은 마을로 내려가 동료들을 만나고 왔다.
그들에게 키리아 아가씨의 조수로 일하기로 했다는 자신의 결정을 전한 후 기분 좋게 헤어졌다.
“잘됐다. 용병들은 떠난 거야?”
“네. 이제 여기 더 머무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주무시기 전에 따뜻한 밀크티를 드릴까요?”
“응.”
키리아가 조앤이 건네주는 잔을 받았을 때였다.
책상 위에 걸린 구슬 중 하나에 빛이 깜박였다.
“아, 공작님이 부르시네.”
구슬들은 각각 제논의 침실, 집무실 등의 활동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구슬이 빛나는지를 보고 그쪽으로 가면 되었다.
“파란색은 침실인가요?”
“맞아.”
키리아는 입도 대지 못한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뱀독으로 앓아누웠던 그날 이후, 제논은 2, 3일에 한 번씩 키리아를 부르곤 했다.
키리아가 손을 잡고 마나 진단을 해주면 그제야 무거운 눈을 붙였다.
그전까지는 계속 잠을 자지 않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마나 진단이 어색해도 그렇지 고작 2,3일에 한번이라니.
몸 상태도 안 좋으면서 이렇게까지 철벽칠 일이야?
‘이번엔 단단히 한마디 해야지.’
키리아는 약재도구 가방을 챙겨 제논의 침실로 향했다.
“왔습니까.”
키리아가 방문을 열자 제논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른한 눈매 아래 다크써클이 여전히 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공작님.”
키리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일부러 엄격하게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왜 매일 부르지 않으세요? 이렇게 철벽 치시기 있어요? 우리가 남인가요?”
“남이죠.”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키리아는 입을 뻐끔거렸다가 기분이 상한 척 팔짱을 꼈다.
“우리가 무슨 남이에요? 전 공작님의 둘도 없는 주치의예요. 이렇게 단물 쓴물 가려가면서 부르시면 저 되게 서운해요.”
“…급여가 부족하단 얘깁니까?”
“더 주시면 좋지만 절 매일 부르시라는 거죠. 한마디로 수면을 규칙적으로 하시란 말이에요. 그게 건강의 가장 기본이라고요.”
키리아는 정식으로 공작성에서 지내게 되면서 제논이 얼마나 불규칙적으로 생활하는지 알게 됐다.
며칠씩 잠을 안 자는 건 예사였고, 하루에 한 끼조차 안 먹을 때도 많았다.
낮과 밤, 아침 점심 저녁의 보편적인 시간과 활동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햇빛을 받는 날도 드문데 이런 자기파괴적인 생활을 하다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잎이 노래진 식물마냥 말라비틀어졌겠지만, 제논은 높은 경지에 오른 기사인 덕분에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신체 밸런스가 망가질 게 뻔했다.
제논의 충직한 부하들은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키리아 양. 주군께 규칙적으로 주무시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난 도련님이 식사를 하루에 한 끼라도 꼬박꼬박 드시면 소원이 없겠수.」
「야, 풀떼기. 그… 왕께서 산책 얘기는 다시 안 하시냐? 전에 그런 일이 생긴 후로는 그나마 하시던 검술 연습까지 안 하시던데.」
이런 모두의 바람에 따라 키리아는 주치의로서 제논에게 규칙적인 생활을 권고하고 있었다.
“특히 밤엔 꼭 자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안 자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어떻게 그런 게 습관이 돼요?”
“내가 잠든 사이에 폭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논이 소매로 가려진 자신의 마물 팔을 내려다봤다.
“아주 깊게 잠들어야 안전합니다.”
“아….”
키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설마 마물병이 그가 잠든 사이에도 날뛸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무방비해진다면서 마나 진단을 주저했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됐다.
“그럼 식사를 거르시는 것도, 검을 잡지 않으시는 것도 전부 마물병 때문에…?”
“…그건 그냥 귀찮아서.”
제논의 중얼거림에 키리아의 아련함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마냥 잔소리만 할 수는 없었다.
제논이 자신의 몸을 돌보고 싶지 않아하는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엔 마물병이 더 악화 됐지.’
처음엔 뱀독, 다음엔 자신이 제조한 해독약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 둘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제논에게 있었다.
제논의 몸이 약을 밀어낸 거였다.
마물병으로 인해, 제논의 신체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이질적인 세 기운이 서로를 배척하는 특이 케이스였다.
‘해독약 효과가 오락가락하면서 더뎠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
한 쪽에 이로운 약효가 들어오면, 다른 기운이 그걸 밀어낸다.
결국 해결책은 하나였다.
‘세 가지 기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새로운 약재가 필요하다는 거지.’
근데 그런 게 어딨냐고.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약재는 없다.
그러니 대체재라도 만들어봐야 한다.
“뭐 좋아요. 그럼 대신 이거라도 협조해주세요.”
“뭡니까?”
“채혈이요.”
키리아가 주사기를 꺼냈다.
“공작님의 마물병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하거든요.”
“내 병을 치료할 필요는 없다고 했을 텐데요. 주치의가 아니라 그저 이곳의 약제사로서 다른 사람들을 돌봐주면 됩니다.”
“환자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잖아요.”
“채혈하면 급여를 삭감할 겁니다.”
“우와, 어떻게 그런 악덕고용주 같은 말씀을….”
“그보다.”
제논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버렸다.
“들어올 때 보니까 그대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평소라면 왜 말을 끊냐며 불평했겠지만, 이번에는 키리아도 넘어갔다.
안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아, 그렇게 보였어요? 사실은….”
생각하니 금세 웃음이 나왔다.
“제가, 아니 메데이아가 인기투표에서 3위를 했거든요!”
“고작 그거 때문에?”
제논이 키리아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1위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세요?”
키리아가 단호하게 반박했다.
“공작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스승님한테 이 정도로 열성적인 팬은 한 명뿐이거든요. 숲지기 님이라고.”
“……!”
“그동안 쭉 꼴찌만 하다가 처음으로 3등을 한 건, 분명 숲지기 님이 노력해 준 덕분이에요.”
그때의 감동을 다시 만끽하며 키리아는 제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혼자서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이건 1등보다 훨씬 기분 좋은 3등이에요.”
“그렇습니까…?”
어째선지 제논의 귀가 붉어졌다.
우울함을 뿜어내던 먹구름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메데이아가 기뻐한단 말이군요…?”
“그럼요!”
키리아가 방긋 웃었다.
“그동안은 리안이 마나 진단을 받을 때마다 해주는 호들갑 칭찬뿐이었으니까요.”
“……!”
키리아의 손을 잡고 있던 제논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리안, 그자가 메데이아에게 마나 진단을 받는단 말입니까?”
“네, 네에.”
“몸이 아픈가보군요.”
“그렇죠. 하지만 스승님이 무슨 처방과 진단을 하든 잘 따라요. 아주 대견… 아니, 훌륭하죠.”
“…나도 잘합니다만.”
“네?”
그가 키리아의 가방을 눈짓했다.
“어제 내가 거부했던 그 시약, 지금 먹죠.”
“배합 시약 21호요?”
키리아가 가방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안에는 보기만 해도 불길한 녹색의 걸쭉한 액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논이 채혈을 거부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혈액분석 없이, 막연히 효과가 있을 법한 약재를 섞어서 만들어본 대체재 샘플이었다.
특이사항은 맛이 아주 극단적이라는 것.
21호는 레몬을 생으로 씹는 것보다 더 강한 신맛이다.
“…진짜 드시려고요?”
키리아가 묻자마자 약을 가져간 제논이 단번에 삼켰다.
“욱.”
키리아는 전율하는 제논의 상태를 꼼꼼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효과가 없네요. 그럴 줄 알고 22호도 미리 만들어왔는데….”
코끝을 찌르는 은행 열매 냄새에 제논이 창백해졌다.
“…….”
“이것도 한 번….”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키리아는 어느새 자신의 방에 서 있었다.
“앗. 쫓겨났다.”
결국 이번에도 설득은 실패였다.
“아무래도 마물병이 치료될 리 없다고 체념한 거 같은데….”
하지만 키리아가 본 제논은 중요한 문제를 그리 쉽게 단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체념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몰라도.
“흠…. 어쨌든 치료는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냐. 공작님부터 마음을 바꾸셔야 하는데….”
실력 있는 약제사보다, 충직한 신하들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어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품은 채, 다음날 키리아는 공작성 인근 마을 라데츠로 향했다.
약재 보충도 할 겸, 숲지기에게 감사와 푸념을 편지로 쓰기 위해서였다.
º º º
키리아가 떠난 뒤 로하넨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주군. 보고 때 빠뜨린 사항이 있어서 보충을… 주, 주군! 안색이 안 좋습니다. 혹시 독약이라도 드신 겁니까?”
“비슷해.”
찬물을 연신 들이킨 제논이 겨우 일그러진 미간을 폈다.
철야까지 하면서 엽서를 썼는데 고작 메데이아에게 3위 밖에 안겨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치솟은 스트레스가 키리아의 말 한마디에 사르르 녹았다.
또 다른 말 한마디에 다시 치솟고 말았지만.
병과 약을 동시에 주는 엄청난 여자였다.
“신경 쓸 것 없으니까 보고해.”
“아, 예.”
의아해하던 로하넨이 서류를 들었다.
영지의 일을 보고하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포이즌 리저드 한 마리가 마을에서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자경단이 처리했고요.”
“늘 있는 일이지.”
“예. 그런데….”
흐려지는 말꼬리에 서류를 살피던 제논이 시선을 들었다.
“마을까지 내려올 리 없는 녀석이 마을에 왔다니 좀 이상합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잡은 게 아닐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알을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암컷 포이즌 리저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