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탁.
제논의 침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문고리를 놓지 않은 채 뭔가를 생각하던 가울이 이윽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논의 상태를 살피러 오던 로하넨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가울이 로하넨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가울….”
“이봐, 안경.”
“안경이 아니라 로하넨입니다.”
“풀떼기 어딨냐.”
“키리아 양이라면 아마 주방에… 잠깐, 설마 계속 그녀를 괴롭히려는 겁니까?”
가울은 평소라면 대답을 대신했을 콧방귀도 뀌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로하넨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저렇게 무섭지…?”
언뜻 보기에 가울은 부글거리는 속을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뭘 참는 성격이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이런! 키리아 양이 위험할지도 몰라!”
로하넨은 서둘러 가울의 뒤를 쫓았다.
헉헉거리며 겨우 모퉁이를 돌자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가울과 키리아가 보였다.
“이봐, 풀떼기!”
쿵.
가울이 키리아가 등지고 있는 벽을 양 주먹으로 쳤다.
“왕께 그런 말을 했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 은인이라도 될 줄 알았어?”
가울이 으르렁거리자 졸지에 봉변을 당한 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소리야?”
제 발 저린 키리아는 일단 시치미부터 뗐다.
‘내 계획이 역효과였나? 갑자기 얘 왜 이래?’
당황하는 키리아를 내려다보는 가울의 시선이 이글거렸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제논과의 대화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º º º
제논이 상을 주겠다며 침대에서 내려와 검을 들었다.
“꿇어라, 가울.”
“예? 설마 절 베시려고….”
“…….”
“조, 존명.”
가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의 무서운 팔에 가슴이 찢기던 당시의 고통이 되살아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툭, 툭.
예리한 칼날이 아닌, 평평한 칼등이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
가울이 고개를 들자, 제논이 그를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나와 그대는 신의로 맺어진다. 그대는 란페르세 가문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내게 충성을 바치고, 나는 그대를 남작에 봉함으로서 내 신의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어, 어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주군의 심복이 된다니. 그것도 남작이라니!’
가울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닌지 계속해서 곱씹어봤다.
그러자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제논이 슬슬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받들겠는가?”
“…바, 받들겠습니다. 꼭 받들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 성은 뭐지?”
“성은 버렸습니다.”
“그래.”
제논이 검을 거두고 침대에 앉았다.
“그렇다면 이름을 쓰지. 넌 이제 가울 남작이다. 비록 봉토를 하사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설마 제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가울은 자신의 손등을 들어 자세히 쳐다봤다.
거기엔 전에 없던 작은 표식이 빛나고 있었다.
왕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마족에게 나타나는 충성의 증표였다.
그래서 보통 상급 마족의 증표라고도 불렸다.
마족인 가울에게 있어 이 증표는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것이었다.
“와, 왕, 와아앙, 저는, 저느으은.”
결국 울먹이기 시작하는 가울은 꼭 결혼반지를 받은 신부 같았다.
그래서 제논은 좀 거북해졌다.
“내 앞에서 훌쩍거리면 작위를 도로 거두겠다.”
“커흐윽, 커헝.”
가울은 필사적으로 코를 삼켰다.
덕분에 제논의 속이 더 거북해졌다.
그가 이만 물러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키리아에게도 인사를 하도록.”
“그 풀떼기는 왜요…?”
“키리아가 널 추천했다.”
가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예?”
“내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상세하게 전해주었다. 네가 상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제논은 가울에게 작위를 주는 게 어떠냐는 키리아의 강력한 추천을 사실 떨떠름해 했다.
가울의 공은 인정해도, 작위까지 줄 생각은 없었다.
그 결정을 바꾼 건 가울 본인의 태도였다.
그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너를 불러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겠지.”
“…….”
가울은 멍해졌다.
‘날 쳐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내가 한 일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다고? 그것도 왕에게 추천까지 하면서?’
난 그 녀석을 쳐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서서히 붉어지는 얼굴을 손으로 어설프게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젠장.
‘더럽게 멋있잖아.’
º º º
그때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었다.
키리아를 반쯤 팔에 가둔 지금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끓어올랐다.
“풀때기, 너….”
으르릉.
험상궂은 가울의 기세에 결국 로하넨이 나서려던 참이었다.
“가울! 키리아 양을 건드리면 제가 신의 이름으로!”
그런데.
“…응?”
로하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안경을 고쳐 썼다.
‘저기 정신없이 흔들리는 저건?’
가울의 엉덩이에 달린 긴 꼬리가 붕붕붕 흔들리고 있었다.
태풍에 휘말린 바람개비 수준이었다.
“…….”
꼬리가 짧은 것도 아니라서 키리아의 눈에도 분명히 보였다.
가울의 엉덩이 좌우로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못 본 척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키리아와 로하넨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겉 다르고 꼬리 다른 가울의 태도에 당황했다.
키리아가 눈짓으로 가울을 가리켰다.
‘얘 왜 이래요?’
‘그, 그러게 말입니다.’
‘로하넨, 저 일해야 하는데 얘 좀…’
‘아, 죄송하지만, 전 주군을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로하넨은 부담스러운 짐을 떠맡기 전에 얼른 도망쳤다.
그와 눈빛으로 대화하던 키리아는 기가 막혀 쫑알거렸다.
“치사해.”
“뭐, 뭐? 내가? 뭐가? 왜?”
순식간에 험상궂은 기세가 와르르 무너진 가울이 허둥거렸다.
엉뚱한 곳에서 반응이 오자 키리아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가울이 자신에게 돌진하듯 다가올 때는 한 대 때리려나 싶어 솔직히 조금 쫄았는데.
이렇게 꼬리를 붕붕 흔드는 걸 보면….
‘계획이 먹혔나 봐. 다행이네!’
그렇담 가울이 나한테 제대로 빚을 졌단 말이지?
흐흥. 키리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너 나한테 엄청 고맙지?”
“뭐뭐뭐래?!”
가울이 버럭했다.
“고맙긴 내가 왜 고마워! 아무도 날 마족이라며 제대로 봐주지 않았는데 네가 처음으로 인정해준 덕에 왕의 심복이 됐다고 고마워? 아주 웃기시네! 치, 친구가 되고 싶어서 먼저 난리친 게 누군데 그래?”
“응? 아닌데.”
헉.
왠지 충격 받은 듯 가울이 돌처럼 굳었다. 그러다 다시 버럭했다.
“나, 나도거든?! 난너랑친구할생각절대없어! 이제부터엄청잘해줘야지라고생각한적도없고멋지다거나친구가되고싶다고바란적도절대로절대로없다고!”
헉… 헉… 헉.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낸 가울이 어깨를 들썩였다.
뭐라고 하는지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키리아는 가울이 잔뜩 당황했다는 것만은 눈치챘다.
‘뭔가 예상과는 조금 다른 거 같긴 한데.’
어쨌든 보아하니,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쩔쩔매는 게 확실했다.
불편한 사이가 된 건 성공한 것 같았다.
키리아는 상쾌하게 웃으며 제 얼굴 양옆을 가로막은 가울의 굵은 팔을 가볍게 쳐냈다.
“그래? 유감이네. 그럼 안녕.”
“어? 그, 그냥 가는 거야?”
“왜? 아직 할 말이 남았어?”
“크윽, 그딴 엄청난 짓거릴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다니.”
가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인간 주제에… 적당히 멋지라고!”
빽 소리를 지른 가울은 번개 같은 속도로 달아나버렸다.
까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가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키리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흠. 어쨌든 좋게 끝난 거 같네.”
원작에서 가울은 작위를 갈망했다.
그게 왕에게 인정받은 신하라는 증표였으니까.
그래서 제논에게 권유했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서 걱정했었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잘 풀린 모양이었다.
“이걸로 공작성에서 날 훼방 놓는 녀석은 더 이상 없겠지?”
키리아는 가뿐해진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연구를 마저 해야지.”
제논의 병간호와 함께 키리아는 한 가지 연구를 병행하고 있었다.
바로 마기 해독수의 상용화 연구였다.
지금은 해독 대상에 따라 일일이 독초의 양을 따져가며 쓰고 있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이, 일반인들도 쓰기 쉽게 시약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공작성의 식재료만 깨끗하게 만들 게 아니라, 공작령의 영지민들에게도 그 혜택을 나눠주고 싶었다.
그렇게 마기 해독수가 완성되면 공작성의 약제사 명의로 발표할 예정이다.
그래야 공작의 평판이 올라가고, 평판이 올라가면 나한테 고마워할 거고, 나한테 고마워하면 나중에 노다지 지분이 올라가고….
‘크. 이런 게 빅 픽쳐, 아니, 의료인의 참다운 도리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필요한 물건을 챙겨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조앤이 반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제가 아가씨께 한 가지 허락을 받고 싶은 게 있는데요.”
“허락?”
“네. 실은 제가 소설을 하나 썼는데, 계약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우와, 정말? 대단하다!”
“에헤헤.”
원작에서 조앤은 릴리의 선행을 알리는 기사를 써서 성공했고, 그로 인해 원작의 주인공인 릴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진 지금도 조앤의 타고난 글솜씨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제 재능을 개척하는 조앤이 무척이나 기특했다.
“제가 일기처럼 쓴 걸 하인 분들이 투고해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연락을 받았는데… 먼저 아가씨께 허락을 받고 싶어요.”
“나한테 왜?”
“소설 주인공이 아가씨거든요.”
“엥?”
이건 조금 의외였다.
동시에 조금 걱정도 됐다.
‘혹시 그거 때문에 내가 메데이아라는 사실을 들킬 일은 없겠지…?’
키리아의 걱정스런 표정을 다르게 이해한 조앤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의 프라이버시는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소설 속의 아가씨는 어둠의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아 독초로 마법을 부리는 어린 소녀거든요. 이마에 번개무늬 흉터가 있죠. 북부의 마법학교 신입생이고요.”
“…왠지 집 요정도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긴데.”
“그것도 좋네요! 아, 참. 인세도 당연히 나눠드릴 거예요.”
메데이아라는 부캐만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었기에 키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앤의 앞날을 응원해주고 싶기도 했다.
“인세는 무슨. 처음 출간하는 작가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구 그래. 너 다 가져.”
“그래도 아가씨의 활약을 소재로 쓰는 거니까 당연히 나눠드려야죠. 그럼 허락해주시는 거죠?”
“응.”
“꺅, 감사합니다!”
조앤이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을 보는 키리아도 기분이 좋았다.
조앤이 계약할 잡지사가 어딘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