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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41)

31화

“…저렇게 편안하게 잠든 주군은 처음 봅니다.”

키리아가 마나 진단을 시작하자 조용히 방을 나온 로하넨이 말했다.

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천사 같으신지 꼭 어릴 적 도련님 같았다우. 그때는 좋아하는 담요가 손에 없으면 절대 주무시지 않았는데.”

“주군에게 애착 담요가 있었다고요? 전 몰랐는데요.”

“이 늙은이가 도련님의 잠자리를 봐 드렸으니까요. 담요에 대한 애착이 어찌나 강하시던지. 마님께서 담요를 강제로 치워버리자 병이 나시고 말았다우.”

“헉, 한 달 동안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던 그때군요?”

수군수군 수다를 떠는 두 사람 사이로 가울이 지나갔다.

“…….”

웬일로 시비도 걸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가울을 보고 로하넨이 의아해했다.

“주군과 산책 나갔다 온 뒤로 가울의 상태가 좀 이상하군요.”

“도련님한테 두드려맞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게지요. 어쨌든 나도 도련님을 위해 뭐라도 좀 준비해야겠수.”

“저도 일하러 가겠습니다.”

로하넨과 앨마가 자리를 떠났다.

문밖이 조용해지면서 제논의 침실도 아주 고요해졌다.

하지만 키리아는 주변의 소음 여부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제논의 손을 꼭 잡은 채 마나 진단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해독약의 효과가 예상보다 불안정했기에 마나 진단을 통해 수시로 기운을 안정시켜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십 분 간격으로 제논의 상태를 진단하고 기록도 해야 했다.

그러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º º º

제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가구를 보니 자신의 침실이 분명했다.

‘…다행히 꿈이었군.’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특히 몸을 휘감은 뱀의 차갑고 매끄러운 촉감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작은 손의 감촉은 꿈인 게 아쉬울 정도로 따스했다.

마치 지금도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촉촉하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

꿈이 아니었나?

진짜로 누군가가 제 손을 잡고 있었다.

키리아였다.

그녀가 손깍지를 낀 채, 침대에 볼이 짓눌린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제논은 키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밤중. 벽난로의 훈기가 스민 아늑한 실내.

거기에 색색거리는 편안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늘 답답하기만 했던 방이 왜 지금은 안락하게 느껴지는 건지….

제논은 자신과 손가락을 엇걸고 있는 키리아의 엄지손톱을 조심조심, 문질러봤다.

‘작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로하넨이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길 권했던 적이 있었다.

반려동물은 마음에 안정감을 준다고.

그게 이런 기분인가?

뭔가 간질간질하고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

키리아의 복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니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조심조심 빼낸 손을 그녀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거품을 감싸듯 신중하게 보듬으려는데.

흠칫!

키리아가 갑자기 한쪽 다리를 크게 떨더니 제 움직임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기겁한 제논도 재빠르게 손을 거뒀다.

“헉, 공작님, 언제부터…?”

경황없이 주변을 훑던 키리아는 제논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 쪽팔려…. 언제부터 보고 계셨어요?”

“나도 방금 일어났습니다.”

“그럼 더 주무세요. 어차피 아직 밤이니까….”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한 키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진료 일지를 주워들었다.

진료 일지에 빼곡한 기록을 본 제논이 물었다.

“계속 여기 있었던 겁니까?”

“네. 손이 마비될 거 같아요.”

키리아가 뻐근한 손목을 탈탈 털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십시오.”

“아뇨, 아직은 제가 곁에 있어야죠.”

키리아가 싱긋 웃으며 연필을 손가락 위로 멋들어지게 돌렸다.

“공작님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

“그러니까 공작님도 제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협조해주셔야 해요.”

“…그러죠.”

제논이 낮게 중얼거렸다.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

“……!”

평소 같지 않은 대답에 놀랐는지 툭, 연필이 손등 위에서 튕겨져나갔다.

“아우.”

괜히 투덜거리며 키리아는 연필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앙증맞은 정수리를 보고 제논은 자신의 왼손을 꾹 쥐었다 폈다 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키리아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 쓰담쓰담했다.

폭신거리는 감촉이 평화로운 기분을 안겨주었다.

“…지금 제 머리를 개처럼 쓰다듬고 계신데요.”

“그대는 개가 아닙니다.”

제논이 진지하게 정정했다.

“성질이 고양이에 가깝습니다. 머리카락은 양 같고.”

“…….”

키리아는 괴상한 농담을 들은 것마냥 눈썹을 찡그렸다.

“…물론 그대가 고양이는 아니지만.”

제논은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뒀다.

“그보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뱀에게 물린 뒤의 기억이 나질 않아서. 혹시 내가 그대를… 공격했습니까?”

“아뇨. 전혀요. 공격당한 사람은 따로 있는걸요. 정확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실 키리아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뒤의 일은 가울을 통해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왕이 이성을 잃었고, 난 피하지 못하고 부상을 당했다. 그때 인간들이 왔고. 그게 다다.’

제논에게도 들은 그대로 전달해주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직전, 키리아는 생각을 바꿨다.

‘그 녀석에게 진짜 빚을 지울 좋은 기회잖아!’

가울의 치명상을 치료해주긴 했지만, 약제사의 재주를 우습게 아는 녀석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최대한 불편한 사이가 되려면, 요리보고 저리 봐도 고마울 수밖에 없는 빚을 딱 지워놔야 안심이다.

좋아. 결정했어.

원작에서 가울이 갖지 못했던 최종 목표, 내가 안겨주겠어.

“공작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요….”

키리아는 짤막한 사실에 잔뜩 살을 붙여 작정하고 가울을 띄워주기 시작했다.

º º º

짐가방에 옷가지를 비롯한 잡동사니들이 휙휙 쌓여갔다.

가울이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하자 켈베로스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가울 님, 왜 짐을 싸십니까?”

“난 이제 성을 나간다.”

“예?”

켈베로스의 세 개의 머리가 서로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뭔 소리지?

“그 말씀은… 왕을 저버리시겠다는 뜻입니까?”

“아냐!”

가울이 탁자를 주먹으로 탕 내려쳤다.

탁자가 우지끈 부서지고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왕의 옆자리를 건 승부에서 난 풀떼기한테 졌어. 패자에겐 퇴장뿐이다. 그래도 내게 있어 왕은 언제나 한 분뿐이야.”

가울의 비장한 명령이 이어졌다.

“난 성 밖에서라도 왕을 지킬 거다. 너희는 그대로 있으면 돼.”

“가, 가울 님…!”

키리아는 언제 그런 승부였냐며 어이없어 하겠지만, 가울은 진지했다.

“안 됩니다 가울 님. 정말로 이렇게 나가시려고요?”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켈베로스를 질질 끌며, 가울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가울.>

머릿속으로 제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쪽으로 와라.>

오랜만의 소환 명령이었다.

머뭇거림도 잠시, 가울이 소환에 응하자마자 주변 풍경이 휙 바뀌었다.

가장 먼저 침상에 앉아 있는 제논이 보였다.

그 외에 다양한 가구들도 보였지만, 풀죽은 가울의 눈엔 제논밖에 안 보였다.

평소라면 ‘부르셨습니까, 왕!’ 하며 호다닥 달려갔겠지만….

가울은 어정쩡한 거리에 서서 발끝으로 바닥만 툭툭 찍었다.

“…전부 전해 들으신 모양이군요, 왕.”

가울은 맥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본분을 망각한 죄를 얼마든지 물으셔도….”

“수고했다.”

“…예?”

가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논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미건조했다.

가울이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무언의 장벽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 제논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착각? 아니, 환청인가?

가울은 저도 모르게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널 공격했다고 들었다. 그때 네가….”

“그건 신경 쓰지 마십쇼! 왕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즉시 냉정한 일갈이 돌아왔다.

“말을 끊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널 부른 이유는 내가 널 공격했기 때문도, 네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 그럼 왜….”

“네가 이성을 잃은 나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어, 죄송합니다…?”

이해도가 0에 수렴하는 가울의 대답에 제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나를 막지 못했다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을 거다. 우선 용병들이 죽었겠지. 그리고 라데츠 마을도. 어쩌면 그 다음에는….”

제논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다.

“마족인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너의 행동은… 음.”

제논이 머뭇거렸다.

그는 이마를 찡그린 채, 불편함과 난감한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마족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 겁니까?”

어찌 된 일인지 가울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평소보다 더 호들갑을 떨어댈 거라 생각한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왜 그러지? 칭찬이 달갑지 않은가?”

“그럴 리가요! 단지….”

망설이던 가울이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전 왕이 생각하신 의도로 행동한 게 아닙니다. 인간들이 죽든 말든 별로 관심도 없고…. 그러니까 어… 왕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왕의 신뢰가 더 떨어질 걸 생각하니 가슴이 타는 듯 아파왔다.

그런데 가울을 부른 직후부터 내내 차갑던 제논의 표정이 처음으로 따스하게 변했다.

“…넌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군.”

“으윽. 죄송합니다. 역시 저 같은 건….”

“네 의도가 어떻든, 넌 나를 도왔고 그 결과 내가 원하지 않는 비극을 막았다. 그거면 충분해. 마땅히 상을 줘야겠지.”

“……!?”

순간 풀이 죽어있던 가울이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런 가울을 위해 제논은 한 번 더 확인해주었다.

“네게 상을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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