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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141)

30화

용병들은 이미 몇 차례나 마물들과 싸워봤었다.

그러다보니 강한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수단도 갖추고 있는 상태였다.

“성수를 던져!”

“받아라, 이 사악한 마물!”

용병 한 명이 재빠르게 병을 던졌다.

병이 가울에게 맞아 깨지면서 성수가 쏟아졌다.

“깽! 깨갱!”

피부에만 닿아도 타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는 성수다.

그런데 벌어진 살 곳곳에 흘러들기까지 하니 가울은 미칠 듯한 고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잠깐 몸부림치다가 꼼짝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약해진 마물이었군. 운이 좋았어.”

“저 사람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나 본데.”

용병 중 하나가 제논에게 다가가 코밑에 손을 갖다 댔다.

‘제길! 왕에게 손대지 마!’

가울이 버둥거렸지만 이미 용병들에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잠깐, 이 사람 살아있어!”

“뭐? 진짜야? 그럼 어서 마을로 데려가야지! 근데 마을에 의원이 있던가?”

“조앤은 어떡하고? 그 녀석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용병들이 잠시 고민했다.

“시체라면 수습만 하면 되는데…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다시 올 수밖에. 지금은 이쪽이 숨넘어가게 생겼으니.”

의논을 마친 용병들이 제논을 들것에 옮기려 했다.

다행이 스르륵 내려온 긴 소매와 망토가 제논의 오른팔을 가렸다.

하지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안 돼! 왕의 약점을 뭣도 모르는 인간들이 봤다간…!’

제논이 성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스스로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제논의 마물병이 타락이라고 서슴없이 비난하는 인간들.

북부 공작인 제논의 자리마저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인간들.

그 중 누가 가장 위험한 적인지 가울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왕이 늘 그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왕의 약점이 노출되면 적들에게 좋은 빌미만 제공하게 된다.

‘그렇게는 안 돼!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컹! 컹컹!”

버둥거리는 가울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성수를 맞고도 이런 힘이 남았다니.”

인상을 찡그린 용병들이 제각기 코와 입을 막았다.

“저놈, 빨리 죽여버려.”

누군가의 말에 덩치 큰 칼잡이 사내가 다가와 가울의 머리 위로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 검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아래로 향하는 순간,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불쑥 끼어든 날카로운 목소리가 떨어지는 칼날에 제동을 걸었다.

“어어? 다, 당신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용병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그러든 말든, 잔뜩 인상을 쓴 키리아는 성큼성큼 다가와 칼잡이 사내의 가슴을 확 밀쳐버렸다.

이어 쓰러진 가울의 몸 상태를 빠르게 확인했다.

예상보다 심한 부상이었다.

하지만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용병들이 엉거주춤 보호하고 있는 제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용병들이 말리기도 전에 약재 상자와 제조 키트를 내려놓고 제논의 옆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 방금 가져온 약재를 조합해 뚝딱 해독약을 만들어내자 용병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그 환자는 지금 피를 엄청 흘렸는데….”

“닥치고 조용히들 해요.”

키리아의 싸늘한 일갈에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놀라 입을 헙, 다물었다.

그 사이 키리아는 제논의 입에 해독약과 물을 조금씩 흘려주었다.

푸르게 변색 됐던 제논의 왼팔 상처가 조금씩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왔다.

그걸 확인한 키리아는 재빨리 제논의 손에 깍지를 꼈다.

마나 진단이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키리아의 이마에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일그러졌던 제논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고 곧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저게… 약제사라는 건가?’

제논의 변화를 직접 목격한 가울은 놀람과 감탄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키리아를 바라봤다.

잠시 후, 키리아가 눈을 뜨고 약재를 챙기자 드디어 말할 기회를 얻은 칼잡이 사내가 물었다.

“혹시 일전에 와이번한테 납치당한 의뢰인 아가씨 아니오?”

그 말에 키리아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싸늘하게 웃었다.

“어머. 당신들이 사기 친 데다 호위까지도 실패한 의뢰인을 이제 와서 아는 척해 주시는 거예요?”

“사기라니? 우린 제대로 호위했소. 와이번은 어쩔 수 없었고…. 하늘로 날아가버린 걸 날개도 없는 우리더러 어쩌란 말요?”

뻔뻔한 용병의 태도에 키리아는 지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3서클과 1서클 마법사의 의뢰비는 몇 배나 차이 나는 거 아시죠? 그 부분도 속였으니 내가 배상금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요.”

“무, 무슨 소리요? 증거 있소?”

“방금 증거라고 하셨어요?”

키리아의 한쪽 눈썹이 휙 들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키리아는 피클 샌드위치를 용병의 가슴에 던져버리다시피 떠안겼다.

“조앤이 다 불었거든요?”

“조앤이…?”

“어? 그러고 보니 이 샌드위치는 조앤이 만든 거 같긴 한데. 크흠….”

결국 꼬리를 내리고 키리아의 눈치를 살피는 용병들이었다.

“근데 아가씨는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조앤을 알고 있는 거요?”

키리아는 상대하기 귀찮아 손만 휘휘 저었다.

“전 공작성의 약제사예요. 그리고 여긴 공작님의 사유지이니 당장 돌아가세요. 안 그러면 배상금에 책임까지 묻게 될 테니까.”

“…알겠소. 그런데 조앤은 지금 어딨소?”

“조앤은 잘 지내요. 내 조수이자 공작성의 하녀로 전직했어요.”

“어, 어엉? 조수이자 하녀?”

본래는 조앤의 소식을 차근차근 전해주려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요. 지금은 돌아가세요. 나중에 제가 조앤을 보내든 소식을 전하든 할 테니까.”

머뭇거리던 용병들은 키리아의 단호한 기세에 질려 결국 물러났다.

“휴. 쓸데없는 짐은 일단 치웠고.”

한결 후련해진 키리아는 이제 가울 옆으로 다가가 그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냐!”

키리아의 손길이 닿자 가울이 애써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약해진 틈을 타서 날 죽이려고?”

“내가 너야? 얌전히 좀 있어. 치료해야지.”

“…날 치료한다고?”

“그래. 잘 기억해 둬. 이거 다 빚이야. 넌 나한테 빚을 진 거라고. 알겠어?”

“…왜?”

“응?”

“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너한테도 좋잖아. 내가 없어지면 너도 편해질 텐데.”

가울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흥. 알긴 아네.”

키리아는 상처약의 뚜껑을 열고 연고를 손가락 가득 떴다.

“그냥… 약간의 보상이야.”

“무슨 소리냐? 보상이라니.”

키리아는 상처에 연고를 천천히 펴 바르면서 원작 속의 가울을 떠올렸다.

“공작님의 약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키려는 네 임무. 잘했잖아.”

가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걸 어떻게 알아…?”

“고, 공작님이 말해줬어.”

“왕이?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제논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걸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 가만히 있었을 뿐.

“왕이 내 임무를 알아주고 계셨다니….”

가울이 감격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심각했던 가울의 상처가 마치 상급 포션이라도 먹은 것처럼 빠르게 아물었다.

“역시 독초는 마족에게도 효과가 뛰어나네.”

키리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가울은 내심 놀랐다.

이 정도 회복 속도는 상급 마족에게 직접 마기를 전해 받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치료받는 내내 키리아를 힐끔거리며 입술을 씰룩이던 가울은, 결국 마음속에 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워.”

“응?”

가울은 다시 말하는 대신 흥, 콧김을 내뿜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표정이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º º º

옹기종기 모인 머리들이 침상에 누워 있는 제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리아와 로하넨, 앨마, 그리고 가울이었다.

가울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키리아 양. 주군은 괜찮은 건가요?”

“네. 해독약을 투여했으니 곧 효과가 나타날 거예요. 이제 가라앉을 때가 됐는데….”

“으….”

그때 제논이 고개를 뒤틀었다.

꿈이라도 꾸는지 굳게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º º º

제논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낡고 차가운 방에 홀로 누워있었다.

감옥인가?

‘…아니, 내 침실이군.’

가구 대신 짐승의 발톱 자국이 어지러이 패여 있었다.

마물병 때문에 본가에서 고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스로를 가둔 직후의 모습이었다.

시선을 내려보니 검은 비늘이 오른손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장갑이라도 낀 듯 부자연스럽고 흉측한 외양이었다.

거기다 눈앞에 있는 건 뭐든지 파괴하고 싶은지 자꾸만 요동을 치고 있었다.

“크윽!”

제논은 요동치는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 기이한 마기가 온몸을 잠식해왔다.

마치 자신의 신체를 강제로 빼앗으려는 것 같았다.

“내 몸이다. 당장 꺼져…!”

제논은 신성력을 일으켜 마기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때 어디선가 뱀들이 나타나 온몸을 칭칭 휘감았다.

“크윽!”

동시에 마물로 변한 손이 점점 길어지더니 골격이 기괴해졌다.

서서히 용의 신체처럼 변해가는 제논을 향해 몸을 휘감은 뱀들이 말했다.

“…마족을 퇴치한 그대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대의 타락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단장님과 함께 있는 게 솔직히… 두렵습니다.”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색의 뱀이 쉭쉭거렸다.

“공작이 정말로 제국을 위한다면, 제국민들의 마지막 불안도 없애주게.”

“…….”

“그 방법은 공작도 알고 있겠지.”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메데이아…?”

보이지 않는데도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물의 팔이 꿈틀거렸다.

문 너머의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마물의 팔이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안 돼, 여기서 떠나십시오! 당장!”

제논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순간, 노크가 뚝 멈췄다.

잠깐의 정적 후.

딸칵.

누군가가 멋대로 문을 열어버렸다.

제논은 흡 숨을 들이켰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팔이 통제할 틈도 없이 상대의 목을 향해 손아귀를 쫙 펼쳤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

버텨보려고 했던 내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나? 그들의 말대로 사라져줬어야 했던 것일까?

후회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내가 약속했잖아요.”

사납게 뻗은 검은 손을, 작고 부드러운 손이 상냥하게 맞잡았다.

“이 손을 결코 놓지 않을 거라고.”

그녀의 등 뒤로 빛이 환하게 들어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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