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결국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뭔가를 만들기보다 찢어발기는 데 더 익숙할 것 같은 손을 열심히 꼬물거리는 제논을 보니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이분은 왜 자꾸 내 부캐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날 못 미더워한다는 알지만, 이번엔 방향이 어째 이상한데….’
차츰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샤악!
갑자기 꽃 더미 속에서 화려한 뱀이 튀어나와 키리아의 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
뱀에게 물리기 직전, 제논이 키리아를 끌어당겨 품안에 감쌌다.
“공작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키리아는 제논의 손부터 살폈다.
“괜찮습니다.”
제논이 손을 펴자 절명한 뱀이 툭 떨어졌다.
놀랍게도 일곱 개의 보호색과 일곱 개의 독을 지녔다는 데블 세븐 스네이크였다.
제논이 강한 악력으로 뱀을 처치했지만, 손바닥에 뱀의 송곳니에 찔린 상처가 작게 나 있었다.
물린 부위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변색되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저 뱀은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에게도 치명적인 데블 세븐 스네이크라고요!”
당황한 키리아는 급한 대로 제논의 동맥을 묶기 위해 자신의 치맛단을 찢으려 했다.
그 손을 제논이 제지했다.
“소드마스터에게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죠.”
“헛수고입니다.”
“헛수… 공작님. 그 헛수고가 제 일이고요, 공작님은 제 환자시고요. 소드마스터라도 병에 걸리면 아픈 건 똑같고요. 병에 관한 판단은 전적으로 제가 합니다. 아셨어요?”
“…지금 나를 혼내는 겁니까?”
“제가 감히요? 손이나 주세요.”
부루퉁해진 키리아가 다시 제논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며 무뚝뚝하게 굴 때와 달리, 제논은 얌전히 손을 맡겼다.
누군가에게 혼이 나는 건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키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이채를 띠고 있었다.
키리아는 신중하게 마나 진단을 시작했다.
그런데 제논의 팔이 일순 꿈틀하거니 갑작스런 경련을 일으켰다.
“윽…!”
이를 악문 제논이 신음을 삼켰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팔이… 평소와 다른….”
“네? 평소와 어떻게 달라요? 느낌이라도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어서요!”
급히 마나 진단을 멈춘 키리아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제논은 대답 대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고통이 극심한 모양이었다.
“공작님? 공작님! 괜찮으세요?”
아, 어떡하지?
혹시 데블 세븐 스네이크의 독이 마물병을 자극한 것일까?
키리아의 예상이 적중했다.
소드 마스터의 강인한 육체와 달리, 불완전한 마물의 팔은 갑작스런 맹독에 자극받아 뒤틀리고 있었다.
갈고리 같은 다섯 손가락이 쫙 펴지며 지면을 거칠게 긁었다.
제논이 요동치는 팔을 붙잡은 채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공작님!”
“손….”
제논이 헐떡였다.
“키리아, 손을….”
그가 중독되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덥석 맞잡으려던 키리아는, 닿기 직전에 손을 홱 거뒀다.
“지금은 안 돼요. 해독부터 해야 해요!”
독이 퍼진 상태에서 마나 진단을 하는 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다.
“…….”
허탈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키리아를 빤히 보던 제논이 큭, 이를 악물고 바닥에 고개를 떨궜다.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어. 자칫 마물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으니까.’
키리아는 침착하려 애썼다.
챙겨온 약초와 독초 중에서 지금 필요한 배합을 떠올렸다.
‘그런데 하나가 부족해.’
사용처가 드문 데다 이미 충분히 연구했던 것이라 따로 채취하지 않았었다.
“무슨 일입니까, 왕!”
뒤늦게 달려온 가울이 심상치 않은 제논의 상태를 보고 당황했다.
“야, 풀떼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뱀독에 당했어. 네가 잠시 공작님을 돌봐줘. 금방 올게!”
“뭐? 야! 이봐!”
대꾸할 시간도 없어 키리아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쪽에 오는 도중에 얼핏 그 약재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까만 점으로 변해버린 키리아를 보고 가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반짝 빛냈다.
준비해온 계획을 실행할 좋은 기회였다.
때마침 왕도 정신이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것이다.
‘어차피 왕은 강해. 뱀독 따위에 쓰러지셨다니 조금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런 건 왕에게 아무것도 아냐.’
가울이 키리아를 뒤쫓으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제논의 신음이 들렸다.
“으… 윽.”
오른팔을 꽉 붙잡은 제논이 몸을 떨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본 가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는 무너지듯 제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 저 여깄습니다. 제가 있는 이상, 아무도 왕이 아프신 걸 못 보게 할 겁니다.”
가울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한순간 눈이 멀어 왕의 안전을 등한시한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러니 왕께 내가 필요가 없지…. 멍청한 나 새끼.”
제 뺨을 짝 때린 가울은 얼얼한 볼을 문지르며 제논을 바라봤다.
뱀독이라기에 별 거 아닌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런 모습은 신성력을 받은 직후에나 보이셨는데.
아니. 그보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저 팔 때문인가…?”
왠지 불안해졌다.
그는 왕이 아직 인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마족과 달리 사소한 병이나 상처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왕의 마물병이 싫지만은 않았다.
마물병이 더 진행되면 언젠가 왕이 진짜 마족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떠올려보면, 가울의 고통스런 기억은 전부 같은 마족이 안겨준 것이었다.
“씨, 내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한 나머지 왕이 아픈 게 전부 자기 탓인 것으로 여기는 가울이었다.
가울은 어느새 가늘게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때 제논의 신음이 멈췄다.
“…왕? 정신이 드십니까?”
반색한 가울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제논을 따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역시 금방 일어나실 줄 알았습니다! …왕?”
“…….”
아무 대답이 없는 제논을 보고 가울은 이내 흠칫했다.
제논의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이성을 잃은 핏빛 눈이 번득이고 있었다.
‘위험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가울이 흠칫하는 순간, 검은 용의 팔이 가울의 가슴과 복부를 거칠게 할퀴고 지나갔다.
“크윽!”
살이 갈라지고 피가 터졌다.
그 피는 제논에게도 튀었다.
제논은 제 입술에 튄 피를 핥으면서 가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흉포한 위압감과 살기가 가울의 온몸을 짓눌렀다.
“쿨럭!”
입에서 피를 토한 가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단번에 치명상을 입은 바람에 마기를 끌어 올리는 게 불가능해졌다. 실드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왕! 정신 차리십쇼!”
가울은 다급히 제논의 의식을 일깨우려 애썼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용의 팔이 실드를 강타했다.
콰앙!
격렬한 충격파에 가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내 실드가 이렇게 쉽게 깨진다고!?’
왕이 강력한 마기를 지녔다 해도 아직 불완전한 상태일 텐데…?
‘아, 젠장!’
소드마스터의 힘도 있었지.
그때 형편없이 뒤로 밀려나는 가울의 목을 덥석 움켜쥔 제논이, 그를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콰앙!
“컥!”
단단한 지면에 머리가 부딪치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했다.
다른 마족이었다면 두개골이 으깨졌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으드득!
제논이 가울의 목을 으스러뜨리기 위해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안 돼!’
기절할 듯 놀란 가울은 황급히 방어본능을 발휘했다.
“헉, 헉….”
한 쌍의 뿔을 가진 개로 변한 가울은 가까스로 제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제논의 손안에서 가울의 목 대신 돌멩이들이 가루가 되었다.
‘후우, 후우. 이제 어떡하지?’
가울은 필사적으로 제논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숲을 벗어나 마을로 향하려는 제논의 앞을 몇 번이고 가로막았다.
그 과정에서 점점 상처가 늘어갔다.
제길.
‘역시 쭉정이 신관 말이 맞았어… 마물병은 없어져야 해! 젠장, 다시는 왕이 마족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 절대 안 할 거야….’
저벅.
또 한 번 앞이 가로막히자, 제논이 가울을 완전히 타깃으로 정했다.
사신의 낫처럼 서늘한 검은 손이 가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왔다.
이대로면 자신은 죽는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을 때.
“큭. 으윽….”
제논이 한 차례 휘청거리더니 가울이 흘린 피바다 위로 쓰러졌다.
“…왕?”
조심스레 제논에게 다가간 가울은 코끝을 들이대며 그의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기절한 상태였다.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하, 흐아….”
길게 안도의 숨을 토한 가울은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주었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마기를 소진했는지 개의 모습에서 변하질 않았다.
“이런 젠장. 그럼 왕을 어떻게 성으로 데려가지? 성으로 모셔야 안전할 텐데….”
곤혹스런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가울은 제논의 망토를 조심스럽게 입으로 물고 잡아당겼다.
“깨갱!”
어림도 없었다.
쓸데없이 부상만 더 벌어졌다.
“제길, 제길! 더럽게 아프네. 역시 왕이 낸 상처는 대단해.”
이 와중에도 왕에게 감탄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풀떼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짜증나는 라이벌이지만, 그녀라면 지금의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가울은 믿음 따위가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어쨌든 결정을 내린 가울이 잠시 휴식을 취하게 위해 바닥에 엎드렸을 때였다.
“이쪽에서 피 냄새가 나! 앗,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세 사람이 나타났다.
단단히 무장을 한 용병들이었다.
“인간들이 여긴 어떻게!”
깜짝 놀란 가울이 벌떡 일어나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에 머리가 핑 돌았다.
전투는커녕,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편 용병들 또한 가울과 제논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런 곳에 사람이?”
“저 마물의 짓이야. 저 정도 출혈이면 이미 죽었을 거야.”
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제논과 그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사나운 마물.
그 상반된 모습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오해받기에 충분했다.
“마물을 죽이고 저 불쌍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주자고.”
용병들이 서서히 전투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가울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생각을 했다.
‘이런 제길. 풀떼기! 어디서 대체 뭘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