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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41)

28화

제논의 시선이 옮겨오자 가울은 얼른 기합을 넣으며 대답했다.

“왕은 아무 실수도 안 하셨습니다! 차라리 저 인간 대신 제가 왕의 침실로 가겠습니다!”

“…넌 됐다.”

“그, 그런….”

제논과 가울, 양쪽의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키리아는 가울을 가리켰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린 뒤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흠흠. 어쨌든, 마나 진단을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곳의 약제사이자 공작님의 주치의가 된 이상, 진단을 위해 계속 손을 잡아야 하니까요.”

“…내 팔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환자가 무서우면 약제사 안 했죠.”

공작의 몸에서 봤던 석화 반응.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의 마물병과 리안의 메두사병은 분명 연관이 있다.

줄곧 가로막혔던 메두사병 치료법의 중요한 단서, 빠져 있던 퍼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공작님의 병을 살피는 건 나한테도 필요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키리아가 씩씩하게 웃으며 제논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공작님의 손을 놓지 않을게요. 약속.”

“…….”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 제논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그대는… 강한 사람이군요. 그대의 스승만큼이나.”

뒷말은 속삭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대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산책을 가죠.”

“와! 좋아요! 앨마에게 간식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할게요.”

제논이 마음을 바꿀세라 키리아는 얼른 방을 나왔다.

“좋아 좋아, 순조로워.”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이봐.”

어느새 뒤따라 나온 가울이었다.

“…내 이름은 이봐가 아니거든?”

키리아는 건드리면 문다는 경고를 담아 눈에 힘을 줬다.

같잖아하던 가울이 삐딱한 자세로, 동시에 협박조로 말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짐은 전부 내가 들 거다.”

응?

“손수건 하나부터 빵 한 조각까지, 넌 아무것도 들지 마. 알겠냐?”

“네가… 내 짐까지 다 들겠다고?”

“그래.”

“…왜?”

이렇게 불량스럽게 머슴을 자처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가울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가울이 보기에 이 풀떼기 인간은 마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아마 왕의 통제를 받아 얌전하게 구는 마물들만 본 까닭이겠지.

더구나 이젠 다들 풀떼기보다 서열도 낮아져서 더 얌전하게 굴 테고.

그래서 마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가르쳐주기로 했다.

성 뒤편 숲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수목이 빽빽하고 어두웠다.

한 번 길을 잃으면 자력으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그러니만큼 사나운 마물들도 많았다.

가울은 그쪽으로 풀떼기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풀떼기는 위험에 처할 테고, 그때 아슬아슬하게 자신이 구해주는 거다.

물론 다시는 성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간 따위야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되면 왕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게 된다.

번거로워도 이 편이 왕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도 지키고 목적도 이루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저 풀떼기가 잔꾀를 부릴 여지를 남겨둬선 안 돼.’

온갖 도구나 음식을 대신 들겠다고 자처한 건 그래서였다.

“싫냐? 싫으면 내 짐을 네가 다 들든가.”

“아니, 그냥 각자 들면 안 돼?”

“뭐라는 거야? 너 그거, 어… 그래. 그게 바로 인력 낭비라는 거야. 왕의 건강을 책임지겠다고 했으면 항상 손을 비워놔야지. 안 그래?”

쓰읍, 키리아가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켰다.

“너 지금 나 배려해주는 거야?”

“돌았냐!? 내가 널… 배려했지! 어, 맞아.”

“……?”

키리아는 횡설수설하는 가울을 갸우뚱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굴러들어온 머슴이니 잘 써먹어 보기로 했다.

“좋아. 네 뜻을 존중할게. 그럼 지금부터 날 따라와.”

까딱까딱.

검지로 명령하는 키리아의 건방진 모습에 가울은 울컥했지만, 꾹 참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것도.”

키리아가 모포를 휙 던졌다.

“요것도.”

간이 의자 두 개도 던졌다.

두꺼운 책 한 권과 약초 상자도 가울이 들고 있는 산더미 같은 짐 위에 올려놓았다.

휘청이는 짐의 균형을 간신히 맞춘 가울이 뒤늦게 발끈했다.

“아주 이때다 싶지, 어? 난로랑 테이블은 왜 챙기는데? 산책 가지 피난 가냐?”

“싫으면 내가 들고.”

“…누가 싫대?”

“거봐. 좋으면서. 우와, 이것도 가져가자. 31가지 맛의 잼 세트.”

“제길, 제길, 제기랄….”

가울이 투덜거릴수록 키리아는 콧노래가 나왔다.

그때 조앤이 포장한 샌드위치를 들고 와 키리아에게 건넸다.

“여기요 아가씨. 피클 샌드위치예요.”

“피클을 만들었어?”

“에헤헤, 네. 대장님이 시키는 대로 숙성 마법을 썼죠.”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앤도 앨마를 대장님이라고 불렀다.

평상시에는 키리아를 따라다니는 조앤이지만, 지금처럼 키리아를 수행하지 않을 때는 주방 식구처럼 어울렸다.

정말이지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포장한 게 또 있네?”

“이건 아가씨께 부탁드리고 싶은 거예요.”

“응?”

“처음 아가씨를 호위하는 의뢰를 받았을 때, 저희 용병들끼리 서로 구해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는 거 기억하시죠?”

“응. 기억해.”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들이 진짜로 약속을 지킬 거 같지는 않지만.

더 많은 의뢰비를 받으려고 1서클 마법사를 3서클로 과장한 사람들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거든.

조앤이 따로 포장한 샌드위치를 내밀며 부탁했다.

“혹시 숲에서 절 찾는 조원들을 만나면 이걸 전해주세요. 저는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다고요.”

용병 일을 접고 하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조앤, 괜찮겠어? 용병으로 일할 때보다 봉급이 적을지도 몰라.”

“무슨 소리세요.”

조앤이 겸연쩍게 코를 슥 훔치며 웃었다.

“아가씨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마물들에게 떵떵거리는 게 얼마나 짜릿한데요. 장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조공 수입도 꽤 짭짤해요.”

“그래?”

장부를 자세히 안 봐서 몰랐네.

어쨌든 하녀 겸 조수인 직업에 만족한다니 키리아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무튼 알겠어.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이 샌드위치 꼭 전해줄게. 근데 마주칠 일이 있으려나.”

º º º

“경치 좋은 곳을 아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왕.”

후문을 나오자마자 가울이 말했다.

가울이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걸 알기에, 제논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락 바스락

마른 흙과 풀잎이 발밑에서 바스라졌다.

잠시 후, 가울이 안내한 곳은 놀랍게도 드넓은 꽃밭이었다.

“와아….”

코스모스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가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 숨겨져 있는 뜻밖의 장소였다.

“이런 곳이 있었군.”

“왕의 땅이니까 구석구석 세세하게 알아뒀습니다.”

가울이 우쭐했다.

“왕께선 여기 쉬고 계십쇼. 제가 저 풀떼기랑 같이 식사 준비를 저어기서 하고… 이봐!”

어느새 꽃밭 가운데로 총총 뛰어가버린 키리아.

그녀를 붙잡으려던 가울은 제논까지 뒤따라 들어가자 크윽, 침음하며 힘없이 손을 거뒀다.

“세상에, 이것 좀 보세요! 이렇게 예쁜 꽃들이 숨어 있었다니!”

키리아가 꽃밭 중간에서 환호하듯 소리쳤다.

“그렇군요.”

제논은 무심히 대답하며 키리아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키리아는 허리를 숙여 활짝 핀 코스모스 사이에서 꽃 한 송이를 땄다.

무당벌레의 등을 닮은 꽃이었다.

“이거 봐요! 이건 남부에서 정말 구하기 힘든 레이디버그예요! 이 꽃으로 증류수를 추출하면 피부에 닿기만 해도 종기를 일으키는 재밌는 독약이 돼요.”

“…….”

“싫어하는 사람을 골탕 먹일 때 이걸 쓰면 비명으로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제논이 침묵하자, 키리아는 겸연쩍게 레이디버그를 주머니에 넣었다.

“죄송해요. 이런 얘기 별로죠?”

연회 때도 독초 스위치가 켜지면 이런 얘기로 주변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쳐냈다.

제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귀엽습니다.”

“…네?”

어이가 없어 되묻자, 제논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귀엽습니다.”

“이, 이런 독초 얘기가요?”

키리아가 반신반의하자 제논이 허리를 숙여 레이디버그를 몇 송이 꺾었다.

“메데이아의 제자인 그대가 독초를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꺾은 꽃을 키리아의 손에 건네주고, 어색하게 펼쳐져 있는 손가락을 오므려주었다.

“내 앞에선 독초 이야기를 마음껏 해도 괜찮습니다.”

“…….”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지, 심쿵하게….

“게다가 이 정도로 좋아하는 걸 보니, 그대가 메데이아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재밌기도 하고.”

‘헉…!’

딸꾹!

“키리아?”

키리아는 대답 대신 딸꾹질을 삼키기 위해 숨을 꾹 참았다.

제자라고 둘러댄 이후 너무 안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 의도도 없는 말에 혼자 두근거리고 혼자 가슴 찔려하다니.

“아, 아닌데요. 스승님은 음, 저만큼 호들갑을 떨지 않으세요. 언제나 고상하고 우아하시죠.”

가슴 속에서 정말? 하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럼 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아뇨, 좋아하시는데… 이, 이런 코스모스 같은 평범하고 예쁜 꽃을 좋아하세요! 화관도 만드시고 막.”

“그렇습니까?”

키리아는 메데이아와 다르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흠.”

잠시 턱을 괴고 뭔가를 생각하던 제논이 말했다.

“그럼 만들어보죠.”

“네? 뭐, 뭘요?”

“방금 이야기한 화관요.”

“……!”

키리아가 놀랄 사이도 없이 검을 뽑아 횡으로 긋는 제논이었다.

날카로운 검광이 번뜩이고.

후두둑.

꽃들의 모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꽃잎은 상하지 않은 채 줄기만 모두 일정한 길이로 잘려있었다.

입을 떡 벌린 키리아와 달리 제논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했다.

“왼손은 역시 불편하군.”

“네? 그럼 원래 오른손잡이에요?”

“그렇습니다만.”

이 미친 소드마스터….

익숙한 손이 아닌데도 이렇게 균일하게 잘랐다고?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를 북부로 보낸 스승의 마음이 편할 리 없을 테니, 화관을 만들어서 위로와 안부를 전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수북한 꽃무덤을 발밑에 두고 제논이 말했다.

“아니 별로… 상심하고 계시진 않을 것 같은데….”

“그건 그대의 생각이고, 일단 시작하죠. 어서요.”

왜죠….

‘왜 내가 받을 선물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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