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41)

27화

공작성에선 그동안 무언가를 축하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키리아의 환영식은 제논의 칩거 이후 처음 열리게 되는 파티였다.

덕분에 앨마와 하인들은 종일 술을 담그고 메뉴를 구상하면서도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는 마물들에게도 전해져서 왠지 조공을 더 열심히 모아오게 됐다.

“아가씨께 이쁨 받고 싶다면 냄새나는 쥐고기가 아니라 반짝거리는 걸 바치세요.”

조앤의 귀띔에 따라 마물들은 반짝거리는 물건을 모으기 시작했다.

성 주변의 빈 병을 주워오는 녀석도 있었고, 숲에 떨어진 마물의 비늘이나 모험가가 잃어버린 금화 등을 가져오는 녀석도 있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는 녀석들이 많았지만….

“이건 뭐냐.”

황당해하는 앨마 앞에서 임프들이 자랑스럽게 배를 내밀었다.

“인간은 좋아함 케이크! 그래서 훔쳐왔음, 인간 요리사!”

“읍읍!”

포대자루 안에서 마을의 빵집 주인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 똥개 같은 놈들이! 당장 마을에 도로 데려다 놔!”

빗자루를 움켜잡은 앨마가 임프들을 두드려 팼다.

“크흉, 느, 늙은 인간 폭발!”

“아흑. 때린 곳 또 때림! 치사함!”

머리에 혹을 여러 개 단 임프들이 주방을 쌩 빠져나갔다.

마침 주방으로 들어오던 키리아가 그런 임프들을 보고 풋 웃었다.

“앨마, 마물들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말도 말아요. 누가 마물 아니랄까 봐 아주 하나를 가르치면 둘이 사고를 쳐. 그래도….”

앨마는 주방 한쪽에서 유치하게 투닥거리는 하인들과 마물들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죽기 전에 인간과 마물이 함께 일하는 광경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아직 잡음이 많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런데 로하넨에게 들었어요. 아가씨가 역조공 작전을 계획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도 예상했을 거라고요. 정말 대단하우.”

로하넨, 추리가 점점 편향되는 거 아니에요?

키리아는 왠지 부담스러워 앨마에겐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아뇨, 이 상황은 아주 예상 밖인데요.”

“이그 겸손두! 아가씨 어디까지 내 맘에 쏙 들 작정이우?”

…진실을 말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자, 아가씨. 이거 가지러 온 거지요? 말씀하셨던 대로 히비스커스 티를 우려 놨어요.”

“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피로회복에 좋은 차를 준비해달라니, 많이 힘들어요?”

“아… 제가 아니라 공작님 드릴 거예요.”

쟁반을 받아들며 키리아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 다크서클 말이에요. 전 마계초를 없애면 그것도 없어질 줄 알았거든요. 마계초가 공작님의 피로를 더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요?”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하더라고요. 역시 근본적인 원인은 팔의 통증으로 인한 피로와 불면증 때문이겠죠?”

그런 추측을 하며 주방을 나서던 키리아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앨마에게 물어봤다.

“아, 참. 공작님이 밤마다 무슨 엽서인지 문서 같은 걸 쌓아놓고 일하시던데, 바깥 활동은 전혀 안 하시는 건가요?”

그 질문에 앨마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못 나가요, 바깥은.”

“네? 왜요?”

“마물병 때문에요. 정확히는 성 주변보다 먼 곳으로는 나가지 않으시지요.”

“……!”

아마도 마물의 팔이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으니 외출을 자제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내보내려 할 때 그런 말을 했었지….’

「그대는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겁니다.」

「마물들로부터요?」

「아니. 나로부터.」

마물병은 공작을 시한폭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격리해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구르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무기한으로.

“전쟁 전에는 집보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으셨던 분인데….”

앨마가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듣고 키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엄청난 모범 성기사잖아? 나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깥 구경을 다녔을 텐데.’

스스로 집콕하는 것과 강제로 집콕하는 건 엄청 다르니까 말이다.

“그럼 우리… 바깥에서 해요, 환영식.”

키리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야외에서 하면 실내보다 공기도 좋고 기분도 좋아질 거잖아요. 게다가 술은 밤에 마시는 게 제격이죠! 푸른달이 뜨는 밤에, 어때요?”

푸른달은 이 세계에 있는 두 번째 달의 이름이다.

평범한 노란빛의 첫 번째 달과는 달리, 푸른달은 보름에 한 번, 오직 보름달의 모습으로만 뜬다.

때문에 푸른달이 뜨는 밤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유명했다.

“좋은 생각이우! …하지만 그날은 안 돼요.”

“네? 어째서요?”

앨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련님은 푸른달을 좋아하지 않으신다우. 푸른달이 뜨면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지요.”

“엥. 왜요?”

“모르지요. 방에서 뭘 하시는지… 로하넨한테 아무리 물어봐도 절대 알려주질 않으니. 내 짐작으로는….”

말을 이어가던 앨마가 어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우.”

“…….”

푸른달이 뜨는 날과 관련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공작이 푸른달을 왜 싫어하는지는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었지.’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푸른달은 피해야죠 뭐.”

키리아가 쟁반을 들고 자리를 뜨려고 하자, 앨마가 갑자기 부탁을 했다.

“잠깐만요, 아가씨.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날도 괜찮아요. 특히 야외 활동은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가 우리 도련님 산책 좀 시켜주지 않겠수?”

“산책이요…?”

“네. 매일 빙글빙글 맴도는 성 주변이 아니라 조금 멀리까지요. 아가씨라면 도련님도 안심하고… 이그, 아니에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 아가씨가 혹시라도 다치면 어떡해.”

“아뇨, 좋은 생각인데요, 앨마.”

어차피 공작님의 마물병을 연구하려면 좀 더 친해져야 한다.

“같이 산책하고 나면 더 빨리 친해지겠죠?”

º º º

“귀찮습니다.”

제논은 산책을 가자는 키리아의 권유를 딱 잘라 거절했다.

“피곤한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고 싶으면 혼자 다녀오십시오.”

“집안에 오래 있으면 오히려 더 피곤해요. 바깥 공기도 좀 쐬고 그래야 건강에 좋아요.”

“그대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웬 산책입니까?”

공작님을 위해서라느니, 앨마의 부탁이 있었다느니,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오히려 역효과일 것 같았다.

“아니 뭐, 저는 스승님하고도 산책을 자주 했거든요.”

“…메데이아가 산책을 좋아합니까?”

“아마도요?”

“그렇군요. 딱히 궁금한 건 아니지만, 취미가 산책입니까?”

“아뇨, 전 실내 활동이 좋아요.”

“그대 말고 그대의 스승 말입니다. 스승을 알아야 제자도 아는 법이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뭐야, 시험도 통과했는데 왜 자꾸 부캐인 메데이아 이야기야? 내가 그렇게도 못미더운 건가?

키리아의 눈초리가 샐쭉 가늘어졌다.

그때 옆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났다.

“뒤쪽 숲으로 가시죠, 왕.”

제논의 지시가 없어도 혼자 석상처럼 대기하고 있던 가울이었다.

“성 앞쪽은 마을과 가깝지만 뒤편은 숲이 어둡고 깊으니까요. 거기까지 오는 간 큰 인간은 없을 겁니다.”

“음….”

제논이 조금 솔깃해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확답은 하지 않았다.

만약 밖에서 자신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면 누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 속내를 짐작한 키리아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주치의가 동행하잖아요. 제가 손을 잡아드릴게요.”

“…됐습니다.”

“아니, 왜요? 전 이미 시험을 통과했잖아요. 설마 공작님이 직접 낸 시험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

“아니면 혹시.”

키리아가 장난스레 히힛 웃으며 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렇게 예쁜 레이디와 손잡기 쑥스러우셔서 그래요?”

“아니오.”

즉답이었다.

기분이 상한 키리아가 제논을 째려봤다.

평소라면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제논은 속으로 아차 했다.

메데이아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제자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해를 수습하기 위해 제논은 어쩔 수 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일전에 그대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상당히 곤란했습니다. 그때와 같은 경험은 익숙하지 않아서 거리를 두려 하는 겁니다.”

“그때와 같은 경험이 뭔데요?”

“비유하자면….”

당시를 회상하듯 제논은 미간을 지그시 찡그렸다.

“마치 무장해제를 당하는 기분이랄까요?”

“……!”

“그대가 손을 잡으면 내가 무방비해지는 기분이라 달갑지 않습니다. 무방비 중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니고.”

“어…. 그럼 제 마나진단이 아주 효과가 좋았다는 칭찬인가요?”

“칭찬이 아닙니다만.”

너무 편하고 좋아서 어색해 죽겠다는 게 칭찬이 아니면 뭐냐고요.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면 공작님한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불면증도 완화될 테고요.”

저 천상계 미모에 먹구름이 계속 끼어 있는 건 국가적 손실이기도 하고.

‘다크서클도 퇴폐미가 있긴 한데….’

저 미모라면 아주 약간의 유혹으로도 넘어가는 영애들이 많겠지. 본인도 알고 있을까?

키리아가 반쯤 넋을 놓고 제논의 미모를 감상하고 있을 때, 고민하던 제논이 말했다.

“꼭 해야 한다면, 밤에 내 침실로 오십시오.”

“…네? 절 뭘로 보시고.”

키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치떴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오히려 충격을 받은 건 제논이었다.

메데이아의 제자가 왜 날 벌레처럼 쳐다보는 거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오해를 깨달은 키리아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아, 아뇨. 안 하셨어요. 공작님 입장에선 전혀요.”

“…그대 입장에선 실수라는 거군요. 무엇 때문입니까?”

“그냥 제가 혼자! 아윽, 그냥 넘어가세요!”

얼굴이 빨개진 키리아가 급히 도리질을 쳤다.

그런데 금방 신경을 끌 줄 알았던 제논이 의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제가 실수를 했다면 고치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아흑, 미치겠네.

공작님 미모에 홀려 있다가 혼자 엄한 오해를 했다고는 죽어도 말하기 싫다고요!

키리아는 궁여지책으로 가울을 휙 가리켰다.

“쟤한테 물어보세요!”

옆에서 망둥이처럼 눈만 끔뻑이고 있던 가울이 찬물을 맞은 듯 화들짝 놀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