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앗.”
키리아가 제논과 로하넨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오신 거죠?”
“…우선은 듣고 판단하죠.”
제논이 대답과 함께 마물들의 조공 행렬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그건 말이죠….”
키리아는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제논과 로하넨에게 말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로하넨의 안경이 반짝거렸다.
제논은 무표정했지만, 전처럼 귀찮아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해서 해장국에 대한 대가를 나눠서 내라고 한 거예요. 이자를 붙여서요.”
신용카드 할부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확한 원금도 없고, 이자는 지금도 계속 붙고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제가 원할 때까지 계속 조공을 받을 수 있죠.”
1위가 갚을 게 남았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예요?
호호 웃는 키리아를 보며 제논과 로하넨은 마물식 창조경제에 감탄했다.
“정말 양아ㅊ… 아, 아니 메데이아 님의 제자다운 비범함입니다, 키리아 양.”
로하넨이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감탄했다.
“에이, 별거 아니에요.”
“아뇨, 우위를 점함과 동시에 거부감까지 불식시키는 방법이니까요.”
“네?”
로하넨이 ‘겸손하시긴, 전 다 압니다’라는 표정으로 안경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서열 1위라도 키리아 양이 인간인 이상, 서열이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공이 계속 유지되면 마물들의 거부감도 빠르게 줄어들겠죠. 결국 키리아 양이 인간이란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고요.”
“바, 바로 그거죠.”
키리아가 정답을 맞췄다는 듯 손가락을 작게 튕겼다.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하긴 인간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상위 마물을 죽인 용병이나 기사들을 하위 마물들이 따르고 있겠지.
로하넨의 안경이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조공 할부라는 것도 단순히 물질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거죠. 그렇죠?”
아뇨. 그냥 용돈 좀 벌어보려는 욕심이었는데요.
“…그럼요! 다 저의 깊은 뜻이죠.”
“뜻이 갑자기 깊어진 거 같습니다만.”
제논이 지그시 쳐다봤다.
“아닌데요? 원래 깊고 넓었는데요?”
키리아는 새침하게 제논을 외면했다.
‘왜요, 뭐요, 왜.’
난 모두가 행복한 대답을 한 것뿐이라고.
“그럼 시험은 통과예요?”
어느새 불쑥 나타난 앨마의 말이었다. 하인들도 함께였다.
혹시라도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까 봐 다들 조마조마해 하며 제논을 바라봤다.
시험 당사자인 키리아보다 더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제논의 시선이 그들을 지나 키리아에게 옮겨갔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불현듯 안도감이 깃들었다.
“…내가 괜한 고민을 했군. 이런 결과라면 메데이아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합격입니다.”
“우와아!”
하인들이 키리아에게 달려가 헹가래를 쳤다.
“드디어 첫 신입이지 말입니다!”
“와주셔서 기쁘지 말입니다!”
“이것들아, 그만두지 못해? 우리 아가씨 어지럽다고!”
앨마가 호통을 쳤지만 그녀도 웃느라 별 위엄이 없었다.
로하넨이 그 틈을 이용해 재치 있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 축하를 할 게 아니라, 아예 환영식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앨마가 냉큼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우. 맥주도 제대로 만들고!”
“그럼 맥주 맛이 기가 막히겠지 말입니다.”
다들 키리아를 둘러싸고 왁자지껄한 가운데 가울이 멀리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가울은 알 수 있었다.
키리아를 바라보는 제논의 눈빛에 신뢰가 깃들기 시작했다는 걸.
키리아보다 훨씬 먼저 왕을 모셔온 자신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º º º
가울은 쓸쓸히 성탑으로 향했다.
탑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끝없이 펼쳐진 숲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가울은 돌아보지도 않고 뚱하게 물었다.
“왜 따라왔냐, 켈베로스.”
“…….”
켈베로스가 죄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가울의 발치에 엎드렸다.
“전 여전히 가울 님의 종입니다.”
“그럼 인간 계집을 따르지 않을 거냐?”
“그건….”
켈베로스가 난처해했다.
“서열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가울 님의 명령이 우선이긴 하지만….”
으득, 가울이 이를 갈았다.
“됐어! 꺼져. 배신자 주제에.”
“가, 가울 님. 저는 가울 님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결코 배신이 아닙니다. 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
왕의 이름을 걸자 끓어오르던 가울의 기세가 잠시 멈췄다.
눈살을 잔뜩 구긴 채 가울이 물었다.
“날 위해서라니 무슨 개소리냐?”
“제 생각에는 키리아 님이….”
가울의 살벌한 도끼눈에 켈베로스가 얼른 표현을 정정했다.
“키, 키리아는 가울 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뭐?”
너무 엉뚱한 소리라 얼빠진 반응이 나오고 말았다.
“넌 뇌를 조공으로 바쳤냐? 뭔 개죽같은 소리야?”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울 님. 키리아는 저에게 가울 님이 왕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뭐어?”
“그리고 키리아는 가울 님이 오신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협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가울 님의 목표를 위해서요.”
“내 목표?”
“예. 왕의 오른팔이 되겠다는 목표 말입니다.”
“…….”
“이런 호의는…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을 때 보이는 행동 아닐까요?”
켈베로스가 보기에, 왕의 신뢰를 받는 오른팔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키리아는 적극 돕겠다고 했다.
가울 님이 보답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일까 고민하던 켈베로스는, 간신히 친구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인간과 마족이 친구라니.
말도 안 되지만, 인간이면서 마물 서열 1위를 차지한 키리아 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 여겼다.
“키리아 님은 시험을 통과하셔서 왕의 눈에 들었으니, 키리아 님과 친구가 되신다면 가울 님도 분명 이득이….”
“인간과 마족이 친구? 웃기는 소리.”
“가울 님.”
“시끄러워!”
열 받은 가울의 몸에서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사라졌다.
“그 인간은 나처럼 왕의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해. 약골 주제에 마물을 상대로 시험을 치를 정도로 독한 녀석이라고. 그런 녀석이 경쟁자를 돕겠냐? 그것도 마족인 나를?”
씩씩대던 가울이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지 입술을 짓씹었다.
“같은 일족도 경쟁자를 견제하기 바쁜데 인간이라고 다르겠냐고.”
본래 헬하운드 일족은 강한 전사들로, 마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상급 마족이다.
하지만 강력한 일족 중에서도 가끔 힘이 약한 별종이 태어나고는 했다.
가울이 그런 경우였다.
가울은 ‘헬하운드’가 아닌 ‘중급’이라고만 불렸다.
일족의 전사라면 누구나 받는 작위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마왕의 얼굴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가울은 일족이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고 믿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아무도 너를 중급이라고 무시하지 못해. 완벽히 우리 헬하운드 일족이 되는 거라고.’
그래서 자신이 마왕인 척 적진에 나서 인간들의 전력을 분산시켰다.
생존보다 개죽음 당할 확률이 높았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공을 세울 확률이 높다고 일족들이 부추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진짜 마왕이 제논에게 쓰러진 이후였다.
닫히기 시작하는 마계의 문으로 돌아가자, 일족들이 가울을 비난했다.
‘내 공을 세우는 데 끼워넣으려 했더니, 이런 쓸모없는 자식!’
마왕으로 위장하라는 건, 가울을 이용해 공을 세우려는 작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자가 마왕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가울이 작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처음부터 그에게 돌아갈 공은 없었던 것이다.
‘네가 마왕님 대신 죽었어야지!’
‘약해 빠진 헬하운드의 수치!’
‘인간계에서 빌빌대다 죽어라!’
그들은 가울을 심하게 구타했다.
쓰러진 가울은 마족과 마물들이 마계로 돌아가는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그냥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사는 지상에 홀로 남아있어 봐야 더 수치스럽기만 할 뿐.
그때 제논이 나타났다.
제논은 방치된 동료 성기사와 병사들의 시신 위로 꽃을 놓아주던 중이었다.
인간과의 오랜 전쟁 덕분에 가울도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았다.
자신의 소명을 다한 사람의 마지막을 예우해주는 꽃이었다.
제논이 가울 앞에 멈춰 섰다.
큰 부상을 당한 가울은 보호본능에 따라 개로 변신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성기사단장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피에 젖은 얼굴을 노려봤다.
그런데….
툭.
가울의 코앞으로 하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제논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가울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과 감정이 엉켰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꽃을 받는 순간, 가울의 왕은 마왕에서 제논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제논은 절뚝거리며 따라오는 가울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가울이 멋대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관계였다.
‘이번에야말로 왕의 인정을 받고야 말 테다. 방해하는 녀석은 누구라도 가만 안 둬!’
약제사 인간이 시험에 통과해버려 자신의 입지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왕은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이 아닌 로하넨부터 찾는다.
몇 주가 지나도 부름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도 왕의 오른팔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풀떼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 하찮아지고 싶진 않아!’
가울은 조용히 주먹에 힘을 주었다.
‘왕에게 잠깐 실망을 끼치는 일이 있더라도….’
가울의 시선이 미로와도 같은 검은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