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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141)

25화

잠시 가울을 노려보던 키리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게 진즉 포기하면 좋았잖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켈베로스!”

키리아가 뜻밖의 호명을 했다.

이어지는 광경에 가울은 눈을 부릅떴다.

본체로 돌아간 켈베로스가 키리아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야, 너, 이게 무슨?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황당해하는 가울에게 켈베로스는 면목 없다는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가울 님. 하지만 가울 님을 위한 일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왜 거기서 나오냐니까?”

켈베로스는 대답 대신 키리아가 내놓은 해장국을 보란 듯이 찹찹 먹기 시작했다.

모든 마물이 모인 곳.

더구나 가울의 명령이 있은 직후에 보인 이 행동은 키리아의 서열을 확실히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헉!

마물들이 또 한 번 숨을 삼켰다.

“이이익! 켈베로스, 너…!”

반면, 가울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키리아는 그들 모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마물 서열 1위야.”

사실상 시험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º º º

키메라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 이후, 2호 켈베로스는 1호와 3호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본래의 삼두견으로 돌아갔다.

키리아와 했던 약속은 끝이 났지만, 켈베로스는 자신이 빚을 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마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키리아에게 먼저 와서 귀띔을 해주었다.

예상 밖의 호의에, 키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가울이 날 싫어하는데도 도와주는 거야? 넌 가울에게 충성하잖아.”

“크릉….”

켈베로스가 불편한 신음을 냈다.

“…그렇지만, 키리아 님이 결국 저를 이겼다는 건 사실입니다.”

“갑자기 존댓말까지?”

“조공을 받은 쪽이 더 높은 서열이라는 건 오래된 법칙입니다.”

마물들의 법칙은 가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공 서열은 마물들에게 있어 본능과도 같았으니까.

“그리고… 가울 님이 왕께 영영 신뢰받지 못하게 될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응?”

“키리아 님은 왕께서 직접 시험하시는 분인데, 가울 님이 화가 난 나머지 시험을 망쳐버린다면….”

키리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켈베로스가 마물답게 단순할 줄 알았는데, 충성심에 있어서만큼은 생각이 무척 깊었다.

상급 마물은 확실히 다른 단세포 마물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게 걱정되어서 내가 피했으면 하는 거구나?”

주인을 걱정하는 도베르만의 진심에 키리아는 무심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차! 물릴 수도 있는데!

뒤늦게 흠칫했지만 예상했던 입질은 없었다.

오히려 켈베로스의 짧은 꼬리가 천천히 살랑이고 있었다.

키리아는 이제 안심하고 켈베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옆에 있던 조앤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어떡할까요, 아가씨? 역시 짐부터 꾸려야 하나요?”

키리아는 대답 대신 켈베로스에게 물었다.

“가울이 이러는 것도 전부 공작님 때문인 거지?”

“예. 가울 님은 왕의 오른팔로 인정받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원작에선 결코 이뤄지지 않는 소망이었다.

‘어차피 서열 정리가 끝나도 가울과의 문제가 남아있긴 해….’

마물 서열 1위라도, 결국엔 가울보다 아래다.

그 구릿빛 마족의 부하가 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에서의 생활이 편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구가 된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타고난 집순이 기질 탓에 친구를 사귄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키리아는 물끄러미 켈베로스를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켈베로스처럼, 가울에게도 결코 무시 못 할 빚을 지우면 어떨까?

절대 고맙다고는 안 하겠지만 시비 거는 일은 줄어들 것 같았다.

‘좋아.’

가울과의 관계 방향을 결정했다.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자.’

방법까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지금 당장은 가울의 깽판을 대비하는 게 우선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가울의 최종목표를 도와줄게.”

“…끄응?”

난데없는 말에 켈베로스가 의아한 신음을 냈다.

키리아는 씩 웃으며 켈베로스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네가 충성을 바치는 가울을 위한 일이니까, 서열 2위는 당연히 서열 1위 님을 도와야겠지?”

“그, 그런 거라면 당연히….”

그렇게, 서열에 빠르게 적응한 키리아와, ‘그럼 난 서열이 몇이지?’ 엉뚱한 고민에 휩싸인 조앤이었다.

º º º

켈베로스의 해장국 시식 뒤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지만, 가울과 마물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켈베로스의 행동으로 인해 마물 서열 1위가 키리아로 굳어졌다는 사실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가울도.

“너… 어떻게…!”

가울이 주먹을 부르르 떨자 해장국 그릇을 바닥까지 핥고 있던 켈베로스가 벌떡 일어났다.

분노한 가울이 힘을 방출하면 키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경계 자세에 가울의 표정이 무너졌다.

“너… 진짜….”

꽉 쥔 주먹에 힘이 풀렸다.

가울은 입술을 앙다문 채 켈베로스를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키리아는 그런 가울의 심정을 눈치챘다.

‘삐졌네….’

사라지기 전에 삐죽대던 입술을 똑똑히 본 키리아였다.

한편, 가울의 퇴장은 마물들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그, 그냥 가셨다, 가울 님이.”

“인정하셨다, 인간을.”

웅성대던 마물들이 잠잠해지더니 키리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키리아는 새침하게 해장국 그릇을 들어올렸다.

“내 부하 할 마물?”

“저, 저요!”

“아니, 저부터요!”

아까와 달리 모든 마물이 앞다투어 먹으려 했다.

키리아가 감독하고 켈베로스가 날뛰는 녀석들을 혼내 얌전히 만들었다.

그런 후에 조앤이 서빙을 했다.

“나부터 줘.”

“네.”

“이쪽도 줘, 해장 수프!”

“앗, 네에!”

잔치라도 열린 듯, 마물들이 웃고 떠들며 정신없이 해장국을 먹었다.

해장국을 먹자마자 차츰 호흡이 편해지고 숙취도 사라지는 걸 느낀 마물들은 키리아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봤다.

그렇게 커다란 냄비가 동이 났다.

마물들은 헤헤 웃으며 부른 배를 기분 좋게 두드렸다.

그중 약삭빠른 녀석들은 얼른 키리아 앞에 넙죽 엎드렸다.

“고맙습니다, 키리아 님!”

“역시 위대하십니다!”

뒤늦게 다른 마물들도 엎드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의 인사를 모두 받은 키리아는 잠시 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다들 고마워하는 거 맞지?”

“네!”

“그럼 내놔.”

난데없이 키라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잉?

의아하게 눈을 끔뻑이는 마물들을 향해 키리아는 집게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공짜라고 한 적 없잖아?”

“……!”

“먹고 튀면 어떤 대가를 치를지는, 겪어봐서 알지?”

타이밍 맞춰 켈베로스가 잇몸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걸 본 조앤도 질세라 각목을 들어올렸다.

무료로 줄 것처럼 해 놓고 뒤늦게 협박하는 모습이 마치 양아치 같았다.

하지만 마물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워, 원하십니까, 무슨 대가를…?”

“켈베로스가 나한테 조공 바친 거 봤지?”

순간 마물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물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고생고생하며 모은, 산더미 같았던 마계초와 서리레몬의 양을.

“드,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모아서.”

“그게 아니지.”

키리아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조공은 더치페이지. 그건 켈베로스한 명의 조공이었고. 너희도 각자 계산해.”

“커헉….”

그 많은 양의 조공을 혼자 마련하라니!

방금 배불리 먹었건만 마물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핼쓱해졌다.

그만큼을 모으려면 또 밤낮으로 얼마나 날고뛰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들 눈앞이 캄캄해 초상집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잠자코 마물들의 표정을 지켜보던 키리아가 선심 쓰듯 운을 뗐다.

“뭐…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뭐, 뭡니까. 그게?”

“이자 할부라고 들어봤어?”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사악하게 반짝였다.

º º º

다음날 아침.

“오늘이 시험 결과를 확인할 차례지.”

“네. 그렇습니다.”

대답과 함께 제논의 의복 착의를 돕던 로하넨이 그를 힐끔거렸다.

“…기분 탓인가 했는데, 오늘따라 덜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느끼던 참이다.”

마계초가 폭증한 이후 늘 몸이 무겁고 피곤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가뿐했다.

방을 나온 제논은 금방 그 이유를 눈치챘다.

“…성안이 깨끗하군.”

“마계초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성벽이나 바닥 틈새마다 돋아 있던 마계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밤새 청소의 요정이라도 다녀간 듯 놀라운 변화였다.

“앨마와 하인들이 철야라도 한 걸까요? 맙소사, 그 많은 걸 다 제거했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네?”

제논은 대답 대신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가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는지 궁금했다.

부디 자신이 이런저런 사정을 참작할 필요가 없기를 바랐지만… 욕심이겠지.

“주군, 저길 보세요.”

“또 줄인가.”

마물들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마지막 날인데 아직도 조공을 나눠주고 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달랐다.

마물들은 전처럼 빈손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물건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

제논은 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이 안고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사라진 마계초가 여기 있었군.”

그 외에도 서리레몬과 각종 나무열매, 독버섯, 예쁜 돌멩이, 동전, 심지어 죽은 쥐까지 아주 다양했다.

“주군, 이건 설마….”

이 기묘한 광경이 뜻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기에 로하넨은 쉽게 단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제논과 로하넨이 키리아의 방 앞에 도착했다.

“다음 마물 들어오세요.”

장부를 든 조앤이 입구에서 조공을 바칠 마물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뭘 가져왔죠?”

“마계초와 쥐고기를….”

“쥐고기는 안 돼요. 다른 걸로 가져오세요.”

“마, 맛있다 이거! 머리부터 먹으면!”

“장부에 안 좋게 적히고 싶어요? 다른 걸로요!”

“흑….”

“다음 마물 들어오세요. 어머, 이건 금화?”

장부 관리인이 된 조앤은 직업 만족도가 아주 높아 보였다.

그리고 키리아는….

행렬이 보이는 곳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티타임 중이었다.

그녀의 양옆에서 임프들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약하다. 강풍.”

“헥, 헤엑…, 알겠음….”

“아니다, 다시 약풍.”

“히히 알겠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로하넨이 나사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키리아 양이 조공을… 바치는 게 아니라 받고 있군요? 마물들의 시중까지도요.”

“…….”

심지어 켈베로스는 키리아의 발치에 엎드려 조는 중이었다.

말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성에 온 지 7일밖에 안 된 약제사가 서열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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