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가울이 떠나고 난 뒤, 벽 뒤에서 머리통들이 쏙쏙 나왔다.
앨마와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합류한 로하넨에게 방금 본 일을 말해 주었다.
로하넨이 앓는 소리를 냈다.
“키리아 양이 걱정이군요.”
“마물들의 무력 행사가 시작되면 매우, 무척, 대단히 불리하지 말입니다. 상급 마족인 헬하운드가 직접 나선다면….”
“아니요, 가울은 헬하운드지만 중급 마족입니다.”
로하넨이 하인의 말을 정정했다.
“아, 그랬지 말입니다.”
그들은 키리아가 서열 싸움에 나섰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빚이 많은 특이한 귀족 아가씨여서 호기심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키리아가 공작성의 새로운 식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염려 마시우. 괜찮을 테니.”
“뭔가 아는 게 있으십니까, 앨마?”
“실은 아가씨가 치맥 말고 또 다른 메뉴를 부탁했다우.”
앨마가 씩 웃으며 하인에게 물었다.
“냄비는 잘 전달하고 왔겠지?”
“물론이지 말입니다.”
병을 줬으니 이젠 약을 줄 차례였다.
º º º
“음, 냄새 좋고.”
키리아는 냄비를 국자로 휘젓고는 뚜껑을 덮었다.
앨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완성한 요리였다.
‘숙취에는 이게 최고지.’
초조하게 방 밖을 살펴보던 조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가씨! 마물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때맞춰 심상치 않은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키리아가 내다보니, 복도 저편에서 마물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조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튜닝 각목을 움켜잡았다.
“걱정마세요, 아가씨. 마물 놈들의 뚝배기를 깨서라도 제가 시간을 벌게요.”
“아니… 진짜로 그러면 징그러워서 싫어. 그나저나 조앤, 진정하고 저길 봐봐.”
“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집중해서 보던 조앤은 곧 키리아가 뭘 말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쟤네들 상태가 좀 이상하네요?”
평소대로라면 진즉에 방 앞까지 도달했을 텐데, 아직도 달려오는 중이었다.
더구나 달릴수록 급격히 지쳐가는 모습이었다.
“인… 간… 헥헥, 쫓아내라… 헤엑.”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네 부하도 무사하지 못할… 헤윽.”
마물들은 겨우겨우 키리아의 방에 도착했다.
조앤이 긴장해서 각목을 들었지만, 사지에 힘이 풀린 마물들은 여름날의 슬라임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치킨… 맥주… 먹고 싶다….”
“조공 내놓으면… 봐준다. 한 번만….”
협박이랍시고 내뱉는 말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그 해괴한 광경을 보고 조앤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아가씨?”
“다 이유가 있지. 이 증상을 봐봐.”
키리아가 축 늘어진 마물의 턱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잡힌 녀석은 무리 지어 몰려올 때의 기세등등함은 사라지고, 온몸이 경직된 상태였다.
“피부가 차갑고 축축해. 게다가 귀와 손톱이 청색증을 보이고 있지.”
키리아는 턱을 놓아주고 다른 녀석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아까부터 가슴을 움켜쥐고 있고,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거칠지. 호흡곤란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그동안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는 덤이고.”
키리아가 싱긋 웃으며 조앤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본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마계초의 중독 증상이지.”
“아!”
“그래서 내가 이런 꼴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걸 바꿔놓은 거야.”
마계초는 원래 마물들에게 활력을 주는 독초였다.
그래서 그 성질을 바꿔놓아도 치킨과 맥주를 먹을 때는 증상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공을 끊으니, 그동안 쌓인 독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마물들은 키리아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
똥싸개 와이번과 기절 그렘린, 무좀 마물들이 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 모두가 이 인간 앞에 오자마자 힘을 잃을 리가 없었다.
“대단해요, 아가씨! 그럼 지금이 바로 복수의 때인가요?”
마물들에게 진탕 얻어맞고 도망친 경험이 있는 조앤이 각목을 들고 허락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위기를 느낀 마물들이 눈을 부라렸다.
비록 마물들 각자는 매우 약해진 상태지만, 여럿이 있으니 제법 짙은 마기가 복도를 채우기 시작했다.
“……!”
키리아가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마물 하나가 입술 한쪽을 씩 끌어올렸다.
“흐, 흥.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이만한 마기에는… 케흥!”
딱쿵.
녀석은 키리아가 정수리에 내리꽂은 꿀밤을 맞고 기절해버렸다.
손을 탁탁 터는 키리아의 오만한 태도를 보고 마물들은 모두 흠칫했다.
그 바람에 짙어져 가던 마기가 푸스스 사라져버렸다.
“복수는 다른 방식으로 하자. 왜냐하면 이제부터 이 마물들은 음… 내 부하거든.”
“우리가 왜 부하냐!”
마물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예상보다 반발이 크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는 느낌도 들었다.
‘왜 저러지?’
조앤은 궁금했지만 일단 아가씨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키리아는 팔짱을 끼고 편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그 상태로 마물들을 내려다봤다.
가뜩이나 위축된 마물들에겐 꽤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왜냐고? 너희는 켈베로스의 부하고, 켈베로스는 나한테 조공을 바쳤으니까. 이래도 서열을 모르겠어?”
“그, 그건….”
마물들이 술렁이며 2호 켈베로스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2호 켈베로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한 마물이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우, 우리를 이렇게 만든 능력은 대체 무슨 힘이지? 마법인가?”
“응?”
“아니면 흑마법? 하지만 흑마법은 마계의 힘을 빌리는 거니까 우리가 모를 리는….”
“그리고 토했을 거다, 신성력이라면….”
마물들이 각자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키리아는 비로소 그들의 오해를 눈치챘다.
그래서 더 오해하게 만들어 주기로 했다.
키리아는 손끝으로 우아하게 이마를 짚었다.
“훗. 맞아. 그 강한 켈베로스도 이 몸의 힘을 알게 된 후 조공을 바치기로 했지.”
왠지 어설픈 도도함이라 조앤은 오그라든다는 얼굴로 키리아를 쳐다봤다.
키리아는 좀 창피했지만 철판을 깔기로 했다.
어쨌든 마물들에게는 먹히고 있었으니까.
“그, 그 힘이라는 건…?”
“긴말은 안 할게. 단, 지금보다 더 너희를 형편없게도, 켈베로스처럼 강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둬.”
정확히는 ‘건’강하게, 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켈베로스처럼 강하게’라는 말이 나오자 마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 나도 강해지고 싶다!”
“내가 먼저!”
“그럼 내 부하가 되어야지.”
“……!”
마물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2호 켈베로스는 혼자 키메라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그런 분이 조공을 바치는 인간이었다. 서열 1위의 조건은 충분했다.
인간을 서열에 끼워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1위가 전례를 깼으니 하위 서열인 자신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가울 님의 분노가 두려웠다.
“…….”
마물들이 머뭇거리고만 있자 키리아가 발을 건들거렸다.
“참고로 선착순이야. 일찍 일어나는 마물이 남보다 빨리 강해지는 거야.”
“바, 받아들이겠음!”
하위 서열인 임프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좋아. 조앤, 냄비에 있는 걸 한 그릇 가져와.”
“네, 아가씨.”
조앤이 커다란 냄비를 통째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널찍한 그릇에 두 국자를 퍼서 임프에게 건넸다.
레베리 열매 가루로 칼칼한 맛을 내고, 계란을 풀어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첨가하고, 마지막으로 마계초 해독수를 넣은 콩나물 해장국이었다.
술과 독으로 쩔어 있는 마물들에게 최고의 해장을 선사해줄 해독약이었다.
‘마물들은 약제사를 같잖게 보니까, 약병을 줬으면 거부했을 거야.’
왕의 이름으로 약속했던 켈베로스는 특별한 경우였다.
킁킁….
생소하지만 군침이 도는 냄새가 나자 마물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릇을 받아든 임프도 꼴깍 입맛을 다셨다.
“힉!”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임프가 허둥지둥하더니 해장국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필요 없음!”
챙그랑!
키리아의 이마에 힘줄이 곤두섰다.
“요게 어디서 밥그릇을 던져!”
주먹으로 임프의 정수리를 꿍 내려찍었다.
“크퓻!”
털썩.
“이 못된 녀석은 제가 치울게요, 아가씨.”
“그래. 멀리 치워버려.”
조앤이 쓰러진 임프를 한쪽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 사이 키리아가 해장국 한 그릇을 다시 뜬 뒤 마물들을 둘러봤다.
“다른 지원자 없어?”
그때였다.
“아무도 먹지 않을걸.”
의기양양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울이었다.
존재감을 과시하듯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가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참견이야?”
“그동안 내 부하들을 아주 요리조리 잘도 갖고 놀았던데? 근데 어쩌냐, 그것도 이제 끝이야.”
가울이 양손을 허리에 걸친 삐딱한 자세로 키리아를 불량스럽게 내려다봤다.
“넌 성에서 나갈 거거든. 지금 당장.”
키리아도 지지 않고 턱을 치켜들었다.
“누가 나가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겁을 먹기는커녕 첫날보다 더 대드는 키리아를 보고 가울은 기가 찼다.
“허. 아직 콧대는 살아있네. 그게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고. 어이, 너희들!”
가울이 마물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 여자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알겠냐?”
“예, 옙!”
“잠깐, 이보세요.”
키리아가 황급히 걸음을 옮겨 가울과 얼굴을 맞댔다.
“안 먹으면 저 마물들, 진짜로 골병이 들 텐데? 호흡곤란이 지속되면 폐와 심장에도 손상이 간다고.”
“마물이라면 그 정도는 스스로 이겨내야지.”
“뭐라고?”
“그래도 못 견디는 놈들은 내 마기를 나눠주면 되고. 네 도움은 필요 없어, 풀떼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다니.
키리아는 빠직 열이 올라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아니거든? 마기가 회복시키는 건 외상뿐이야.”
앨마와 하인들에게 들은 얘기라 확실했다. 과연 가울도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표정이 언짢아지더니 진득한 마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신경 끄고 이 성에서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네 부하가 성벽을 뚫고 날아가는 걸 보게 될 테니까.”
“……!”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울이 조앤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조앤이 버둥거리며 겁에 질린 눈으로 키리아를 바라봤다.
마물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가울 님이 나섰으니 저 인간은 이제 끝났다.
모두 그런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