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것들이 약해빠져 갖고는.”
반면 2호 켈베로스는, 부상이 남아있긴 해도 변함없이 늠름했다.
마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역시 서열 1위답다고 생각했다.
“그걸 1층 왼쪽 복도 세 번째 방문 앞에 두고 와라.”
마물들은 잔뜩 모은 재료들을 들고 그가 지정한 장소로 몰려갔다.
그런데 도착한 곳이 어째 이상했다.
“여, 여긴?!”
서열 최하위 인간의 방 앞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마물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명령대로 가져온 물건을 문 앞에 내려놓고, 쪼르르 2호 켈베로스에게 달려갔다.
“케, 켈베로스 님.”
한 마물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합니다. 말씀하신 장소는 방입니다, 인간의.”
“인간에게 그걸로 시킬 일이 있다.”
“아, 그랬던 거군요.”
마물들은 안도했다. 역시 자신들의 생각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조공 때문에 켈베로스에게 물어뜯겼던 본래 서열 2위의 마물, 키메라가 나섰다.
“그래도 인간에게 시킬 걸 저희에게 모아오게 만들다니요. 이런 일이나 시키려고 절 물러나게 하셨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처음부터 인간에게 시키지 않고 필요한 걸 모아서 갖다주다니 이상합니다. 그 인간을 예뻐하기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키메라의 눈빛이 도발하는 뱀처럼 번득였다.
“그 인간 계집에게 조공이라도 바치시는 겁니까?”
기겁한 2호가 부정하려던 그때였다.
움찔!
그의 고개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왕의 이름’을 건 계약이 발동된 것이다.
끄덕.
“…그렇다.”
“……!”
제기랄! 2호 켈베로스가 흙 씹은 표정을 짓는 사이, 마물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우두머리 켈베로스 님이… 인간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키메라가 밝혀낸 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마물들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진짭니까, 켈베로스 님?”
“정말 인간에게 조공을 바친 검까?”
“그 인간이 켈베로스 님보다 쎄요?”
확인 질문이 앞다퉈 날아왔다.
“크, 크윽.”
켈베로스는 부정하고 싶은 얼굴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래!”
“……!”
연이은 대답에 마물들은 일제히 충격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키메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태 1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너덜너덜할 정도로 부상을 입은 켈베로스라면 한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난 인간에게 조공이나 바치는 마물을 서열 1위로 인정할 수 없다. 너희들도 그렇지 않은가?”
키메라가 묻자, 마물들이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켈베로스는 으르릉! 이빨을 드러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이 건방진 2위를 제압해야 했다.
“감히 가울 님의 오른팔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너야말로 최하위 인간에게 조공을 바치다니!”
거의 동시에 2호 켈베로스와 키메라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크르릉!”
사자와 염소, 뱀의 몸이 혼합된 마물 키메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2호 켈베로스는 큰 부상까지 입은 몸.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 패배할 확률이 높았다.
‘내가 진다면….’
모든 마물들 앞에서 키메라의 발밑에 깔리는 수모를 당하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본체로 돌아가는 걸 1위가 된 키메라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 몸의 비밀까지 들키게 돼…!’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숲으로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가울 님께 부끄럽지 않은 수하가 될 테니까!’
그때였다.
키메라가 2호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캐앵!”
‘끝까지 옆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2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재차 공격해오는 키메라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커헉!”
‘안녕히 계십시오!’
가울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면서 키메라를 좌우로 흔든 2호는, 안간힘으로 홱 던져버린 키메라를 향해 검은 화염을 내뿜었다.
“캬아아악!”
숯덩이가 되어버린 키메라가 쿵 쓰러졌다.
다른 마물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제 그렇게 다쳤는데도….”
“켈베로스 님이 이 정도로 강하시다니….”
응?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2호는 마물들의 멍한 중얼거림을 듣고 키메라 쪽을 쳐다봤다.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키메라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녀석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분명히 큰 부상을 당한 몸이었는데…. 키메라가 이렇게 약했던가?’
그러다 문득, 어제 인간 여자가 줬던 정체불명의 약병이 생각났다.
「널 건강하게 만드는 물.」
「네가 본체로 돌아가기 전에 약해진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 이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러고 보니….
그걸 마시고 난 뒤부터, 이상하게 무겁고 기운이 없던 몸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왔던 것 같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챙겨준 거야? 어떻게?’
그건 원작에서 마물 서열 2위가 1위에 대한 욕망과 질투심을 드러냈기 때문이었지만, 켈베로스가 알 리는 없었다.
그저 그녀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다는 고마움만이 가득했다.
“저, 저… 켈베로스 님. 저는 안 했습니다. 아무 말도.”
“아, 안 했습니다, 저도.”
2호 켈베로스가 키메라를 쓰러뜨리고 나자 마물들이 다시 납작 엎드렸다.
“…크르르.”
“히익!”
2호 켈베로스는 납죽 엎드린 마물들에게 콧방귀를 뀌며 명령했다.
“서열을 망각한 이 배신자는 영원히 추방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버려라.”
“예, 예!”
그날로 키메라는 공작 성에서 영영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이렇게 강한 켈베로스 님이 조공을 바치다니? 그 인간, 정체가 뭐지?’
“거봐. 말한 대로다, 내가. 보통 인간이 아니다.”
예전에 키리아에게 당했던 마물들이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희가 약한 거다’라며 비웃었던 마물들도 상황이 이쯤 되자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말해봐라, 자세히.”
“내가 약해서 당한 게 아니다. 강했던 거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은 쓴다, 이상한 능력을.”
“이, 이상한 능력?”
“끼루루.”
어느새 와이번까지 ‘똥싸개’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키리아의 사악한 능력을 증언하려 애썼다.
그렇게, 키리아에 대한 마물들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º º º
로하넨은 초조하게 시계를 힐끔거렸다.
‘키리아 양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러 가야 하는데…. 앨마도 보러 간다고 했는데….’
엽서를 카드처럼 반으로 접어 봉인하는 그의 손길이 두서없이 빨라졌다.
메데이아를 위한 인기 투표 엽서를 108장째 빼곡히 쓰고 있던 제논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또다시 시계를 힐끔거리는 로하넨.
마침내 제논이 입을 열었다.
“로하넨. 그대가 접은 엽서 70장의 잉크가 전부 번졌다. 새로 써 와.”
“예, 예에? 저, 정말입니까?”
하늘이 무너진 듯 고개를 번쩍 치켜드는 로하넨.
제논은 웃음기 하나 없는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야.”
“…하, 주군.”
“이번엔 좀 농담다웠나?”
“주군.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군은… 농담에는 소질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전혀 발전이 없으십니다.”
“…유감이군.”
로하넨이 시무룩해 하는 주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주군이 처음으로 농담을 하셨던 게, 농담을 좋아한다는 메데이아 님의 편지를 받고 나서부터였죠. 그런데 곧 포기하시더니… 다시 시도해보시는 겁니까?”
“음…?”
“역시 키리아 양을 채용하시기로 한 거죠?”
키리아 양이 공작님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으면 싶으실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의외로 제논이 정색했다.
“남은 작업은 나중에 하지. 그대는 그대의 할 일을 하러 가도록 해.”
“앗. 정말이십니까? 그럼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드디어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로하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오다가 바로 앞에서 걸어오는 가울과 부딪힐 뻔했다.
“우왁, 깜짝 놀랐잖습니까.”
“야. 방금 그거 뭔 얘기야?”
“예? 뭐가요?”
“채용 어쩌고 하던 이야기 말이야. 그 나약한 인간을 성에 들이기로 한 거야? 시험도 아직 안 끝났는데?”
찔끔한 로하넨이 시선을 피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척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주군과 나눈 대화를 멋대로 엿듣다니요. 그건 잘못된 행동…. 어, 가울? 가울!”
가울은 로하넨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몸을 휙 돌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왕은 그 계집을 성에 들일 생각인 거야!’
한 번 세운 원칙은 철벽같이 지키던 왕이 왜 갑자기 파격적인 결정을 했을까?
‘시험도 그래. 난 몇 개월이나 애원하고 나서야 겨우 시험 치를 기회를 얻었는데….’
왜 그 여자만?
약제사가 인간이라서?
이가 갈렸다.
근데 그 계집은 왜 여태 나가지 않는 거야!
“조공도 버티고 마계초의 마기까지 버틴다고?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이야? 젠장.”
보통의 약제사였다면 진즉 공작성에서 줄행랑을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상대가 메데이아라는 부캐를 가진 독초 전문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가울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제 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가울니뮤!”
임프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무어라 종알대기 시작했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켈베로스의 조공 사건을 일러바치는 중이었다.
전후 사정을 모두 들은 가울은 분노했고, 곧 모든 마물을 소집했다.
“돌았냐? 어떻게 위대한 마족, 아니, 마물이 인간에게 조공을 바쳐!”
“죄, 죄송합니다.”
가울이 내뿜는 짙은 마기에, 켈베로스를 비롯한 마물들이 덜덜 떨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은 왜 분리되어 있냐?”
“…….”
1, 2, 3호 켈베로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보고 분명 그 약제사와 관련이 있다고 직감한 가울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게 감히 우릴 갖고 놀아?”
풀떼기 인간이라고 너무 봐줬나 보다.
왕은 시험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스스로 나가면 시험 결과고 뭐고 상관없을 테지!
“너희들, 당장 그 인간을 내쫓아! 협박을 하든 인질을 잡든 그 여자가 도망치도록 만들어. 살기든 마기든 다 동원하란 말이야!”
“옙!”
마물들이 신이 나서 키리아의 방으로 몰려갔다.
머뭇거리던 2호 켈베로스도 가울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가울은 멀어지는 마물들을 지켜봤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기분 탓인지, 몰려가는 놈들이 어째 만취한 것마냥 맥아리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마물들에게 역으로 작용하는 키리아의 마계초에 수하들이 전부 중독된 상태인 걸 가울은 아직 몰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녀석들이 잘하는지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어.”
가울이 몸을 날려 마물들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