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41)

22화

마물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키리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서열 1위 켈베로스였다.

‘모든 마물을 하나하나 상대해서는 끝도 없고 답도 안 나와.’

서열 문화는 무섭지만, 그런 만큼 단순하다.

우두머리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는 사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서열 1위를 굴복시키는 게 서열 정리의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마물들에 대해선 우리가 전문이우.’

다행히 앨마와 하인들이 마물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던 기사이자 군인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덕분에 좋은 정보도 많이 얻었다.

무서운 상급 마물인 삼두견 켈베로스가 스스로를 셋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것도, 힘도 셋으로 나눠진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여기 켈베로스 님들께 드리는 조공입니다. 이번에야말로 공평해요.”

고개를 뻣뻣이 든 세 마리의 켈베로스 앞에 키리아가 조공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진짜 분열은 지금부터였다.

1호와 3호 켈베로스에게는 3인분.

가운데인 2호 켈베로스에게는 4인분.

그걸 지켜보던 양쪽의 켈베로스가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렸다.

“공평하지 않다!”

“왜 우리 것이 적지?”

키리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요. 서열대로 드린다고 했잖아요? 아까 싸우는 걸 보니까 1호와 3호님보다 2호 켈베로스 님이 더 잘 싸우더라고요. 그러니까 서열이 더 높고, 더 많이 가지시는 거죠.”

“그렇지 않다! 우리는 똑같아!”

두 마리가 반발하자, 2호 켈베로스가 에헴 거들먹거렸다.

“본체일 때 항상 중심을 잡는 것도 나니까, 내가 가장 강한 게 맞다.”

“개소리!”

1호가 자신의 몫을 2호와 바꿨다.

그러자 이번엔 3호가 다시 바꿨고, 그 모습을 어이없게 지켜보던 2호가 자신의 것을 돌려받으려 했다.

음식이 세 마리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자 참다못한 셋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크와악!”

순식간에 세 마리의 투견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피까지 튀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이는 입이 열릴 때마다 검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키리아와 조앤은 주춤 물러났다.

“히익….”

기세에 압도된 마물들도 숨을 죽인 채 싸움을 지켜봤다.

격렬한 개싸움이 일어나고 몇 분 후.

마침내 쓰러진 녀석들 사이로 딱 한 마리만이 승자처럼 서 있었다.

“헥, 헥…. 이제 내가 우두머리라는 걸 인정하겠지?”

승자는 2호 켈베로스였다.

거들먹거리는 2호를 노려보며, 다른 두 마리가 비척비척 일어나 외쳤다.

“인정할 수 없다!”

“오늘부로 우리 본체는 없는 거다!”

“뭐라고? 잠깐….”

2호가 불러도 그들은 씩씩거리며 가버렸다.

구경하던 마물들도 차츰 흩어졌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키리아는 2호 켈베로스 앞에 조공 10인분을 전부 몰아주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축하했다.

“어머, 명실상부한 서열 1위에 오르셨네요! 술은 전부 2호 켈베로스님 거예요.”

“크릉….”

2호는 미소 비슷하게 입주변 근육을 씰룩거렸지만,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꼬리 또한 겁에 질린 것처럼 다리 사이로 숨었다.

위험한 마물이 아니라 집을 잃은 평범한 견공 같았다.

“응…?”

조앤이 그걸 보고 키리아에게 소근거렸다.

“아가씨, 저 악독한 마물이 왜 저러는 거죠? 이제 와서 동정표라도 얻으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키리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불안한 거야. 자신의 힘이 반토막보다 더 토막이 났으니까.”

“네에?”

「삼두견 켈베로스를 잡을 때는 일단 무조건 분리시켜야 한다우. 세 마리로.」

앨마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줬다.

「그러면 힘이 분산되어 한 마리씩 상대하기 수월해지거든. 한 녀석을 죽이면 본체로 돌아가도 힘이 줄어들고.」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하지만 본래 한 몸이니까,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지는 못해요. 억지로 분리되어 있을수록 힘들어하지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켈베로스 본인일 것이다.

2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치킨과 맥주를 먹었지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리아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왜, 누가 기습할까 봐 겁이 나?”

“무, 무슨 헛소리를!”

정곡을 찔린 2호가 버럭 소리치다가 멈칫했다.

어느새 키리아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고분고분하던 이전과 달리 거만한 자세였다.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에 2호 켈베로스가 잠깐 주춤하는 사이 키리아가 말을 이었다.

“켈베로스는 분리되면 약해진다면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드니까 더 약해질 테고.”

“이, 인간이 그걸 어떻게…?”

“이제 넌 혼자가 됐으니 서열 1위 자리도 금방 빼앗기겠다.”

“그럴 일은 없다! 가울 님의 오른팔이 바로 나야!”

“다른 마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특히 너한테 물어뜯긴 서열 2등 3등 마물들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2호가 크르릉 잇몸을 드러냈다.

“당장 물어뜯겨 죽고 싶은 거냐?”

“내가 과연 혼자 죽을까?”

그 말에 2호 켈베로스가 벌떡 일어나 키리아를 노려보자 옆에 있던 조앤이 흡 숨을 들이켰다.

진한 살기 때문이었다.

키리아도 마찬가지로 겁이 났지만, 이미 제논의 살기를 겪어본 뒤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숨을 참고, 긴장을 숨긴 채 켈베로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

무언의 대치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끄응.”

들릴 듯 말 듯 앓는 소리를 내며 2호 켈베로스가 경계 자세를 풀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 후하, 후하.”

그제야 조앤이 숨을 몰아쉬었다.

한계에 다다랐던 키리아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으아…. 아슬아슬했네.’

긴장이 풀린 다리가 호달달 떨렸지만, 긴 치마를 입은 덕에 티가 나진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신경전에서 패한 2호 켈베로스의 태도가 한풀 꺾였다.

“다른 마물들은 내 비밀을 모른다. 그러니 절대 알리지 마라.”

“아직도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부, 부탁이다.”

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해대던 마물의 입에서 ‘부탁’이 나오다니.

게다가 공손하게 납죽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얘도 절박하다는 거겠지.’

다른 마물들이 켈베로스 2호가 약해진 걸 눈치채면 서열이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었다.

가울의 오른팔에서 최하위 마물로.

그건 켈베로스에게 있어 모든 걸 잃는다는 의미였다.

뒤늦게 본체로 돌아간다 해도, 인간에게 약점을 노출시켰다는 사실이 가울에게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눈 밖에 날 건 뻔한 일.

결국 스스로 오른팔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하여간 충성심은 알아줘야 해.’

오른팔 아니랄까 봐 제논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가울과 똑 닮았다.

납작 엎드려 있는 2호를 향해 키리아가 은밀히 소곤거렸다.

“그럼 우리… 계약할까?”

“음? 계약이라니?”

“마물들이 네 비밀을 눈치채기 전에, 본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저, 정말이냐!”

간절한 물음에 키리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엄. 물론이지. 대신, 너는 나와 관련된 질문을 받으면 그냥 그렇다고만 대답해주면 돼.”

2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지?”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긍정만 하라고. 본체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할 거야 말 거야?”

“…어쩔 수 없지. 하겠다.”

“좋아. 그럼 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거야.”

“그, 그건….”

‘왕의 이름’이 나오자 2호가 멈칫했다.

마물들은 길가의 돌멩이 걷어차듯 약속을 제 맘대로 어기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왕의 이름을 걸면 달랐다.

왕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어긴다는 건 왕의 명령에 거역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이전에는 마왕의 이름이었지만, 가울을 따르는 켈베로스의 경우에는 제논의 이름을 걸어야 했다.

“끙….”

2호 켈베로스는 한참 주저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알겠다. 나의 왕 제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좋아! 그럼 바로 할 일을 알려줄게.”

키리아는 2호에게 차근차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켈베로스가 의아해했다.

“정말 그거면 되는 건가?”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건… 서비스야.”

키리아는 가방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약병을 꺼냈다.

“이거 마셔.”

“뭔가, 이게?”

“널 건강하게 만드는 물.”

“……?”

서리레몬 맥주를 만들 때 변이시킨 마계초 독의 해독제였지만 키리아는 긴 설명 대신 눈을 찡긋했다.

“네가 본체로 돌아가기 전에 약해진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 이게 도움이 될 거야.”

“…….”

켈베로스는 찡긋거리는 키리아를 불신의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해독제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네가 요구한 것들을 준비해 주겠다.”

2호 켈베로스가 사라지자 조앤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가씨. 아까 말씀하신 계약 조건 말이에요, 차라리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나를 지켜라! 아니면 나를 공격하는 마물들을 혼내줘! 뭐 이런 거요.”

“훗. 아무리 그래도 가울에게 충성하는 부하인데, 그런 걸 받아들이겠어?”

“그래두…. 아가씨와 관련된 질문에 무조건 긍정하라니, 무슨 질문이 나올 줄 알고요.”

“걱정 마. 다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

키리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위 자리는 항상 피곤한 법이거든.”

º º º

아우우우—

성의 마물들을 소집하는 2호 켈베로스의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치맥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던 마물들이 헐레벌떡 그 장소로 달려갔다.

어쩐지 몸이 무겁고 금방 숨이 찼지만 아직까지 이상을 감지한 마물은 없었다. 다들 똑같이 헥헥댔기 때문이었다.

“켈베로스 님, 입니까, 무슨 일?”

“필요한 게 있다.”

2호 켈베로스는 집합한 마물들을 두 개의 조로 나눴다.

“1조는 마계초를, 2조는 서리레몬을 가져와라. 당장!”

“옛!”

마물들은 본능에 따라 명령의 내용을 생각해 보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첫 번째 조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안의 마계초를 마구 뽑아댔다.

키리아를 비롯해 사람들의 호흡을 방해하던 마계초가 빠른 속도로 제거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조는 숲으로 달려가 서리레몬을 찾아다녔다.

제논이 남겨뒀던 숲 깊은 곳의 서리레몬까지 남김없이 가져왔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2호 켈베로스의 앞에 마계초와 서리레몬이 수북하게 쌓였다.

한바탕 움직인 마물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슬슬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이 무거워졌고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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