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편지를 받아든 키리아가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메데이아를 지키고 싶은 기사 리안’이라는 글귀가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편지를 봉한 인장이 약간 떠 있었다.
“어? 이거….”
키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제논을 올려다봤다.
“공작님, 혹시 제 편지 몰래 보셨어요?”
“리안이라는 기사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제논도 동시에 말했다.
말이 겹치는 바람에 멈칫한 키리아가 먼저 대답했다.
“리안 말이죠? 음….”
키리아는 리안의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리안 경은 메데이아 스승님을 레이디로 삼은 아주 용맹한 기사님이에요. 부상을 당한 몸이지만, 자신보다는 저와 스승님을 더 걱정하시죠.”
“…….”
편지를 펼쳐보는 키리아의 얼굴에 집을 향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키리아는 촉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고생하지 말고,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네요. 메데이아는 자신이 지킬 거라고.”
편지 안에는 홀로 고생하는 누나에 대한 리안의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렇습니까?”
“네. 근데 진짜 편지 뜯어보신 거 아니죠?”
편지를 읽느라 고개를 숙인 키리아는 몰랐지만, 제논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로하넨과 앨마는 흠칫했다.
제논의 목소리 저변에 깔린 음산함 때문이었다.
“내가 편지를 볼 필요는 없지. 그대가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
“네?”
어쩐지 오싹한 목소리여서 키리아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제논은 어느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편지를 몰래 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얘깁니다.”
“아, 네. 의심해서 죄송해요. 편지를 직접 전해주러 여기까지 오셨는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대 때문에 온 게 아니니까.”
“네? 그럼 왜….”
“난 이 성의 주인이니, 성을 관리하고 살피는 건 내 의무입니다. 주방의 일 역시 그 연장선이죠.”
제논이 앨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앨마. 주방에 부족함은 없나?”
그는 주방에 들어서기 전에 키리아와 앨마의 대화를 들은 터라 서리레몬의 재고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앨마가 얼른 답했다.
“예.”
“…정말로 없나?”
도련님께 걱정을 끼칠 수는 없어 앨마는 더욱 분명하게 대답했다.
“예.”
“그… 래도 뭔가 부족한 게 있을 텐데. 잘 생각해봐라.”
“확실하게 없습니다.”
우렁한 앨마의 대답에 제논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확신하지 마라. 완벽하다고 방심할 때야말로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왜 저래?
키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논을 빤히 쳐다봤다.
기분 탓인지 제논이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귓바퀴가 붉은 건 원래 저랬던가?
그 사이, 분주하게 눈치를 살피던 로하넨이 앨마에게 신호를 던졌다.
‘레몬! 레몬이요!’
로하넨의 입 모양을 본 앨마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깜빡 켜졌다.
“아이구! 이 늙은이가 정신이 없었군요. 마침 주방에 서리레몬이 필요하던 참이었지요!”
“그런가?”
마침내 제논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레몬이라면 검은 숲에서도 구할 수 있었지.”
“그럼요, 그럼요. 조금이면 되는데 그 조금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지요.”
“내가 다녀오겠다.”
“네? 엇, 저, 저기….”
키리아가 말릴 새도 없이 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로하넨과 함께 사라지는 제논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제 몸집만 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안에는 서리레몬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고맙습니다, 도련님.”
“그래.”
앨마와 하인들이 자루를 저장고로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리아가 제논에게 다가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그대에게 도움이 됐다니, 우연이군요.”
제논이 뿌듯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난 내 ‘업무’를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사심도 없이.”
그러고는 로하넨과 함께 주방을 떠났다.
키리아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참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지시네…. 진짜 주방 일 때문에 온 거였나?”
하긴, 이 공작성에는 사람보다 마물이 더 많으니 공작이 주방까지 관여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쨌든 공작의 우연찮은 도움으로….
“조공이 완성됐어요, 아가씨.”
“수고하셨어요, 앨마.”
다음 단계로 향할 밤이 찾아왔다.
º º º
“힉, 아가씨!”
조공을 한차례 마친 후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워 살짝 살펴본 조앤이 기겁하며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자마자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쿵쿵쿵 들려왔다.
“더 내놔라 조공!”
“문 안 열면 죽인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들썩였다.
“아, 아가씨. 마물들이 엄청 몰려와 있어요! 어제보다 훨씬 사납기도 하구요.”
다급히 말하는 조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있었다.
“남은 조공까지 다 떨어지면 어떡해요? 부족하다고 하면 바로 덤벼들 거예요!”
“내가 바라던 바야.”
“네에?”
황당하게 바라보는 조앤에게 키리아는 고양이처럼 웃어 보였다.
주방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동안 키리아는 앨마로부터 마물들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이번 작전이 통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냥 문을 열어줘, 조앤.”
“아, 아가씨. 이대로 문을 열었다간 우리 둘 다 마물들에게….”
“조앤.”
키리아가 자신보다 키가 큰 조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용병 마법사의 배포가 이거밖에 안 돼?”
“앗….”
조앤이 뒤통수를 맞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이윽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이제부터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조앤이 결연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마물들이 앞으로 쏠리면서 우르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어딨냐, 조공!”
“없으면 죽일 것!”
“죽여라!”
서슬 퍼런 기세에 키리아도 꿀꺽 침을 삼켰다.
마물들은 조공 첫날보다 확연히 조급해 보였다.
서로 할 말만 하느라 키리아의 목소리가 계속 묻혔다.
하는 수 없이 시끄러운 소리라도 내기 위해 키리아가 적당한 물건을 찾을 때였다.
구석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만들던 조앤이 일어나더니 손에 쥔 걸 들어올렸다.
못과 철사를 두른 각목이었다.
조앤은 그걸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철판을 긁었다.
끼이… 이익….
“끄악!”
마물들이 귀를 막으며 조용해졌다.
그러자 조앤이 각목을 거두고 키리아를 향해 뿌듯하게 말했다.
“용병단 보스가 하던 걸 흉내 내봤어요. 이제 말씀하세요, 아가씨.”
“으, 응.”
키리아가 말한 건 배포였는데, 조앤은 용병의 불량스러운 행동을 떠올린 것 같았다.
살벌하게 튜닝된 각목을 힐끔 쳐다본 후, 키리아는 마물들 앞에 섰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마물님들.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뭐냐, 안 좋은 것?”
“계속된 조공으로 음식이 부족해져서, 이제 10인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뭐라고!”
“안 된다, 말도!”
다들 성이 나서 펄쩍 뛰었다.
요 며칠의 이어진 조공으로 마물들은 치맥 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거기다 마계초가 들어갔기 때문인지 키리아의 음식을 먹으면 활력이 솟는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보다 더 강해질 거라는 욕심에, 결국 앞다퉈 조공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건 가장 상위 서열인 켈베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조공이 더 없다면 인간, 네 목숨을 바쳐라!”
“목숨! 목숨!”
마물들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가세했다.
다들 위협하듯 다가왔지만 키리아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조공이 부족한 건 제 탓이 아니에요.”
“무슨 헛소리냐?”
“조공이 이렇게 줄어들도록 만든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고요.”
“……?”
진짜 범인?
마물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들의 반응을 충분히 기다린 키리아는, 진상을 파헤치듯 조목조목 말했다.
“조공은 서열이 높은 마물이 낮은 마물에게 받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사이에서도 서열이 정해져 있고요. 그렇죠?”
“그렇다.”
“그럼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왜 여러분이 저의 조공을… 공평하게 받아야 하는 거죠?”
“……!”
“서열 낮은 마물들이 상위 서열 마물님들의 몫까지 받아 간 거잖아요. 감히 허락도 없이.”
“……!?”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마물들이 술렁였다.
조공으로 각인된 서열은 절대적이었다.
서열이 낮은 녀석들은 절대 높은 마물들의 먹이를 가져가서는 안 된다.
오직 허락이 있을 때만 가능했다.
그런데 조공이 워낙에 풍족하게 풀리다 보니 다들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물량이 부족해진 지금에 와서 중요해진 사실이었다.
“너희들이 주제도 모르고….”
상위 마물들의 사나워진 기세에 하위 마물들이 움츠렸다.
그들이 내뿜는 마기에 키리아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마물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키리아가 짝! 손뼉을 쳤다.
“그러니 남은 조공은 상위 마물님들께만 드릴게요. 다들 괜찮으시죠?”
“그, 그래!”
“그래라, 제발!”
그제야 사나운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키리아가 생긋 웃었다.
“그럼 가장 서열이 높은 마물 세 분께만 드릴게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삼두견 켈베로스가 가장 먼저 의기양양하게 나왔다.
그 뒤로 다른 두 마리의 마물도 나왔다.
“자, 여기 있습니다.”
키리아는 세 마리의 마물 앞에 10인분의 음식을 나눠줬다.
머리가 셋인 켈베로스에겐 4인분, 나머지에겐 3인분씩이었다.
음식을 내려다본 켈베로스의 세 머리가 불만을 토했다.
“나는 입이 세 개다. 나는 세 배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몸은 하나잖아요?”
“크르르….”
“절 위협하셔도 남은 음식은 정해져 있어요.”
이빨을 드러낸 켈베로스가 다른 두 마물을 째려봤다.
다른 두 마물은 움찔했지만, 강해지는 음식을 쉽게 넘겨주지 않았다.
켈베로스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몸을 뒤틀었다.
켈베로스가 착지했을 때, 녀석은 더 이상 삼두견이 아니었다. 세 마리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제 전부 내 것이다!”
세 마리로 분리된 켈베로스는 순식간에 두 마물을 물어뜯어 버렸다.
“드, 드리겠습니다! 봐주세요!”
부상을 당한 두 마물이 얼른 조공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결국 마물 서열 1위인 켈베로스가 모든 조공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키리아가 짝짝짝 펭귄처럼 박수를 쳤다.
“우와, 역시 서열 1위시네요!”
물론 흡족한 웃음을 감춘 칭찬이었다.
‘계획대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