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날 밤, 공작성 마물들 사이에 술판이 벌어졌다.
벌써 몇 병이나 마시고 고주망태가 된 녀석들도 보였다.
“바보다, 서열 최하위.”
“또 준다, 또 가면. 완전 바보.”
“난 벌써 세 번째.”
그들의 말 그대로였다.
켈베로스를 제외하고, 1마물 당 1치맥이 키리아가 세운 원칙이었다.
하지만 부정수급을 막진 않았다.
같은 마물이 줄을 서고 또 서도 계속 치킨과 맥주를 제공해줬다.
덕분에 마물들은 실컷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게 다 뭐냐?”
그때 가울이 나타났다.
“앗, 가울 님 오셨습니까.”
가울이 쿠션에 털썩 주저앉자 켈베로스가 눈짓했다.
그러자 임프 하나가 재빠르게 술을 대령했다. 치킨은 이미 다 먹어치워서 없었다.
“가울 님, 이걸 한번 드셔 보십시오.”
“서리레몬주잖아! 치워.”
가울이 술병을 툭 쳐내자 켈베로스가 다시 술병을 올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서리레몬 맥주라는 것입니다.”
“서리레몬 맥주?”
“네.”
“그냥 이름만 바꾼 거잖아?”
“다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켈베로스의 거듭된 권유와 거나하게 취한 마물들의 모습을 보고 가울은 조금 마음이 동했다.
“좋아. 조금만 맛봐줄게.”
그러면서 살짝 맛을 본 가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병째 꿀꺽꿀꺽 마셨다.
“…정말 다르네? 서리레몬으로 만든 술이 이렇게 맛있다니, 희한하군. 마계초와 비슷한 향이 나는 것도 같고. 너희가 넣었냐?”
“아닙니다. 인간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웃기지 마. 어떤 인간이 우릴 위해 술을 만드냐?”
“조공을 위해 만든 것 같습니다.”
“조공?”
또 한 모금 마시려던 가울이 멈칫했다.
이걸 풀떼기나 다루던 검은 머리 인간이 조공으로 줬다고?
‘이거 수상한데?’
가울이 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가울 님? 뭔가 문제라도?”
켈베로스가 의아하게 묻자 가울은 내용물을 벌컥 마셔버리고는 빈 병을 휙 내던졌다.
“별문제는 없는 거 같네.”
그 간악한 검은 머리 인간이 준비한 조공이라니 왠지 찜찜하긴 했지만, 겉보기에도 맛으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특히 술에 마계초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마계초는 인간에겐 해로운 풀이지만, 마족과 마물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오히려 기운을 북돋워 준다.
“이런 걸 만들어 바칠 정도면, 그 인간 계집이 스스로 최하위 서열이라는 걸 인정했다는 뜻이겠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고기와 술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헹, 진즉 그러면 좋았잖아?”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다.
이런 걸로 환심을 사서 좀 더 버틸 작정인 게 분명했다.
가울은 의기양양하게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도 인간 계집과 절대 손을 잡을 일은 없어. 조공을 있는 대로 싹 털어버려. 그러다 조공이 다 떨어지면 그때 내쫓는다. 알겠냐?”
“예!”
가울의 명을 받은 마물들은 더욱 마음 놓고 조공을 즐겼다.
다음날도 조공을 받으러 갔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다, 먹을수록! 치킨 최고다!”
“난 맥주가 최고다!”
“틀렸다, 너희 전부. 치킨과 맥주 최고다, 같이 먹어야.”
“인정이다.”
어느새 치맥에 빠져들어 날이면 날마다 조공을 요구하는 마물들.
키리아는 그런 마물들을 보며 보랏빛 눈을 반짝였다.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
그렇게 7일 중 나흘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º º º
“그럼 푹 쉬거라. 저녁에 다시 오마.”
마이언 클로버필드의 냄비 뚜껑 같은 손이 리안의 작은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 오늘도 힘내세요.”
“허허.”
리안의 애교 섞인 응원에 미소를 지은 백작이 방을 나갔다.
생긋 웃고 있던 리안은 백작이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얼른 침대 밑으로 상체를 숙였다.
리안이 꺼낸 건 드디어 완성한 편지였다.
“이걸 우리 누나한테 전해줘.”
마도 전서구가 편지를 삼키고 날아갔다.
흐뭇하게 전서구를 지켜보던 리안은 편지를 받을 누나의 반응을 상상하고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누나가 재밌어하면 좋겠다.”
편지 속의 리안은 다리가 돌이 된 허약한 동생이 아니라, 멋진 기사님이었으니까.
º º º
“오늘로 닷새째군요.”
로하넨이 빈 식사 그릇을 치우면서 말을 꺼냈다.
관심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제논이었지만 그의 눈길은 잠깐 달력으로 향했다.
“이제 마물들은 키리아 양을 완전히 최하위로 인식했습니다. 게다가 더 이상 조공을 못 바치게 하려고, 날이 갈수록 키리아 양에게 더 많은 조공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건 그렇지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지?”
“메데이아 님의 제자입니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만날 일이 없을 텐데요. 조금만 편의를 봐주시는 것도….”
“안 된다.”
“하필 메데이아 님의 제자가 주군께 오다니, 이건 신께서 인도하심이 아닐까요?”
“그만.”
제논이 언짢은 기색으로 로하넨을 돌아봤다.
“신의 인도라 해도 시험은 공정해야 한다. 그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해라, 로하넨.”
“예….”
시무룩해진 로하넨이 쟁반을 들고 물러갔다.
제논은 얕은 한숨을 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험, 규칙과 계약, 그리고 황명.
이러한 것들은 제논이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지켜야만 하는 의무였다.
사실 인마전쟁 이전에도 북부는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공작령이 지금보다 작았을 때, 마계의 문이 잠깐 열린 적이 있었다.
단 며칠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북부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황제의 외사촌 동생이던 란페르세 공작의 급사로 혼란이 더 했다.
황제는 북부가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물론 요구 조건이 있었다.
조건은, 앞으로 이어질 란페르세 가문의 후계자를 황제에게 충성하는 기사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마법으로 추인된 이 계약은 이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했다.
계약을 어긴 사람은 후대에까지 화가가 미치기에, 란페르세 공작가는 규율과 계약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풍을 지니게 됐다.
“그래도 제논아, 너는 좀… 인생을 즐기면서 살도록 하려무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그렇게 당부하긴 하셨지만, 제논은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작업할 시간이군.”
창가에서 몸을 돌려 책상 위에 있는 인기 투표용 엽서를 작성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창문 밖에서 헤매고 있는 마도 전서구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
자신의 전서구는 파랑새인데, 저건 깃털이 검었다.
마을로 향하던 누군가의 전서구가 길을 잃고 성까지 온 것인가.
그렇게 짐작한 제논은 긴 소매를 펄럭이며 손을 휘저었다.
“삑!”
바람이 전서구를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떠밀었다.
하지만 전서구는 힘겹게 퍼덕이며 다시 성 쪽으로 돌아왔다.
“음?”
설마 전서구의 수신인이 이 성에 있다는 건가?
오랫동안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마도 전서구는 값비싼 물건이다.
마을에도 성에도 이걸 이용할 사람은 제논이 알기로 없었다.
의아해진 그는 바람으로 마도 전서구를 자신이 있는 창가로 이끌었다.
“삑삑!”
바람에 끌려온 전서구를 붙잡고 억지로 편지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 수신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키리아 양에게.]
“음?”
설마 키리아에게 온 전서구였을 줄이야.
게다가 보낸 이는….
[메데이아를 지키고 싶은 기사, 리안]
리안이라면…?
‘메데이아가 짝사랑하는 남자!’
이 자가 메데이아의 제자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마도 전서구를 보낼 정도로 이미 돈독한 사이라고?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을까?
“…….”
물음표가 꼬리를 물수록 제논의 눈동자가 부표처럼 흔들렸다.
발신인이 쓴 ‘메데이아를 지키고 싶은 기사’라는 표현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그때 전서구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빼앗긴 편지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바람에 봉투를 봉하고 있던 밀랍이 떨어져 나갔다.
“이런!”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편지를 훔쳐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살짝 벌어진 봉투 안의 편지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볼까 말까.
악마의 유혹이 따로 없었다.
그 유혹을 물리치느라 제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안 돼.”
가까스로 입술을 깨문 제논은 곧바로 로하넨을 호출했다.
º º º
키리아는 빈 병이 가득 담긴 궤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인들을 향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도 부탁해도 될까요?”
“걱정마시지 말입니다!”
하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처음 술을 담근 날로부터 오늘이 닷새째.
질릴 법도 했지만 앨마와 하인들은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키리아의 치맥 작전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는 게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익숙하게 역할 분담을 하는 하인들을 지켜보던 앨마가 다가왔다.
“그런데 아가씨,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네? 어떤 문제요?”
“서리레몬의 재고가 예상보다 빨리 떨어졌어요. 다른 도시에서 구한다 해도 시간이 걸리니까 시험 날짜에 안 맞을 텐데….”
“앗.”
키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처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마물들의 조공 요구에 맞추려면 재료가 충분해야 했다.
앨마가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말했다.
“당장 부족한 건 아니우. 하지만 빠듯해서 조공 준비는 오늘이 한계예요. 추가 주문도 좀 무리고.”
“어차피 다음 단계로 진행할 계획이었어요. 그러려면 오늘까지는 비위를 맞춰줘야 확실한데….”
추가 주문 요구에 응해주지 못하면 마물들이 이때다 싶어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다른 곳에서 구할 수는 없어요?”
“서리레몬은 야생에서도 잘 자라는 과실이라서, 굳이 구하려면 성을 둘러싼 검은 숲에도 있긴 해요.”
다만 성과 가까운 곳의 열매들은 이미 수확을 했고, 남은 건 더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깊은 숲은 위험했다. 거기까지 다녀올 일손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끄응, 으으음.”
키리아가 팔짱을 끼고 끙끙댈 때였다.
“주방이 굉장히 활기차네요.”
“어? 로하넨 신관님?”
뜻밖의 방문에 키리아가 놀라자 로하넨이 하하 웃었다.
“서리레몬 맥주의 향이 위층까지 나서 안 올 수가 있어야죠. 주군도 오셨습니다.”
로하넨이 옆으로 한 걸음 비키자, 뒤에 서 있던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헉!”
하인들과 앨마가 일손을 멈추고 공작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도련님!”
“오셨습니까, 각하!”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입술을 달싹이던 제논이 체념의 표정을 했다.
주방을 둘러보던 그가 키라아와 눈을 마주쳤다.
“…우연히도 그대가 여기 있었군요.”
“네? 주군, 저한테는 안내하라고….”
제논이 로하넨의 발등을 꾹 밟으며 키리아 앞으로 다가갔다.
“그대에게 전해줄 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논이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