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한 입 마시는 순간, 꿀꺽꿀꺽 목 안으로 잘도 넘어갔다.
“크으!”
짜릿한 청량감에 감탄사를 내뱉은 키리아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스처럼 밍밍했던 술이, 탄산이 톡톡 튀는 맥주로 재탄생했다.
조앤의 숙성 마법으로 맛은 더 깊고 풍부해졌다. 마계초의 쓴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제대로 된 레몬 맥주였다!
앨마도 벌컥벌컥 마시고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이거야! 남부 맥주보다 훨씬 더 맛있어!”
“주, 주방장님, 저희도 좀….”
하인들이 달려들 기세로 입맛을 다시는 바람에, 앨마가 어쩔 수 없이 한 잔씩 허락했다.
다들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모두의 입에서 캔 뚜껑을 딸 때처럼 크― 하는 탄성이 터졌다.
“바로 이 맛이지 말입니다!”
“서리레몬주가 이렇게 맛있을 일입니까?”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바꿨거든요, 마계초의 성분을.”
“예?”
“전 독초를 약으로 쓰는 게 특기지만… 독초를 독초답게 쓰는 것도 잘하거든요.”
마계초는 마물에겐 무해하고 사람에겐 유해한 독초였다.
하지만 키리아는 마계초를 연구하다가 작용대상을 바꾸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제 이 맥주에 쓰인 마계초는 사람에겐 무해했다.
반대로 마물들에겐 지독한 독약이 될 것이었다.
“마물들은 저에게 한 짓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거예요. 호호.”
갑자기 음산해진 웃음소리에 하인들이 흠칫했다.
잠시 후.
키리아와 앨마의 감독 하에, 조앤과 하인들이 적당한 크기의 병에 술을 나눠 담았다.
마침내 조공 준비가 끝났다.
º º º
가울의 직속 부하, 켈베로스가 위풍당당하게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그 뒤로 마물들이 서열에 따라 행진했다.
그들 중에는 키리아가 피운 연기 때문에 순식간에 기절했던 그렘린도 있었다.
키리아의 독초에 발이 감전된 듯한 고통을 겪었던 와이번도 공중에서 그들을 따랐다.
보물이 있다는 키리아의 말에 속아, 보물 대신 온몸에 무좀이 났던 마물들도 있었다.
모두 키리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위풍당당한 상위 서열 마물들을 보고 용기를 냈다.
결국 그 인간도 우리가 두려워서 도망친 거 아니겠어?
용기를 낸 마물들은 키리아보다 자신들이 더 높은 서열이라는 걸 분명히 할 작정이었다.
서열이 낮은 마물이 위 서열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인 마계의 조공.
마물들은 이 풍습을 아주 좋아했고 또 아주 잘 따랐다.
이젠 거의 본능이 되어버린 의식이었다.
“어제 빼앗았습니다, 전부. 이제 없을 겁니다, 조공.”
한 마물이 켈베로스에게 아부하듯 말했다.
켈베로스가 흡족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목숨을 내놓을 차례다.”
제아무리 미꾸라지 같은 인간이라도 떼로 덤비는 마물들 앞에선 당해낼 재간이 없다.
죽고 싶지 않다면 꽁지 빠지게 달아날 것이다.
설령 성안 어딘가에 숨는다고 해도 마계초 때문에 버티지 못할 테고.
‘결국 가울 님과 우리 마물의 승리다!’
마침내 마물들이 키리아의 방 앞에 도착했다.
“조공을 바쳐라, 인간!”
켈베로스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분명 그 인간 계집은 어딘가로 숨었거나 덜덜 떨고 있겠지?
그런데.
“……?”
가구라고는 없는, 마룻바닥까지 뜯긴 방 안에 키리아가 얌전히 서 있었다.
게다가 마물들을 보고 공손히 인사까지 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 몰려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기다려…?”
키리아의 공손한 태도와 기다렸다는 말에 마물들이 의아해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가득한 저 병들은 뭐지?
“어제는 제가 너무 건방졌죠? 서열 최하위인 제가 마땅히 조공을 바쳤어야 했는데…. 그래서 준비했어요.”
키리아가 눈짓하자 조앤이 서리레몬 맥주가 담긴 궤짝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궤짝 안의 물건을 본 마물들은 하나같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켈베로스가 비웃었다.
“이건 인간들이나 마시는 서리레몬주잖아. 가울 님이 맛없는 물이라며 아주 싫어하시지. 이런 게 조공이냐?”
그러자 키리아가 병마개 하나를 퐁 열었다.
깊은 향기가 진하게 퍼지면서 켈베로스와 마물들의 코가 벌름거렸다.
“냄새가 무척 맛있죠?”
“…맛있을 리가 없다!”
“그러지 마시고 이것과 같이 드셔 보세요. 조앤, 가져와.”
이번에도 조앤이 커다란 상자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키리아가 상자를 열자, 안에 담겨 있던 수십 마리 양념치킨의 매콤달콤한 향이 확 퍼졌다.
“……!”
마물들의 코가 미친 듯이 벌름거렸다.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낯선 냄새 속에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서리레몬 맥주와 맛있는 치킨 모두 여러분을 위해 준비했어요.”
“이, 인간의 음식 따위….”
“이건 마물님들의 입맛에 딱! 맞춰서 만든 스페셜한 음식이에요. 냄새만 맡아도 아실 텐데요? 제 조공을 받아주세요. 어서요.”
키리아의 간신 못지않은 알랑거림에 켈베로스의 코가 기분 좋게 씰룩였다.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맛이 없다면 목숨을 내놔야 할 거다.”
“그럼요.”
키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맥주병을 내밀었다. 조앤도 키리아를 따라 치킨을 내밀었다.
“자요. 켈베로스 님은 힘세고 강하시니까 두 개씩.”
“뭘 좀 아는 인간이군.”
근엄하게 말하는 켈베로스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º º º
제논은 성에 칩거하면서부터 ‘인간 시계’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던 생활 패턴을 다 관뒀다.
하지만 산책만은 매일 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바깥에서 숨통을 트고 돌아오면 성의 단단한 벽이 감옥처럼 느껴져 오히려 숨이 막힐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눈앞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저도 잘….”
수건을 들고 뒤따라오던 로하넨이 벙찐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릴 만했다.
내성 복도에 마물들이 일렬로 줄 서 있었다.
“밀지 마라! 새치기!”
“너 서열 몇 위?”
곳곳에서 마물들끼리 다투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서로 시선을 교환한 제논과 로하넨은 마물들의 줄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긴 줄 끝에는 키리아의 방이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마물 여러분께 바치는 조공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가져가세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진짜 모를 테니까요!”
키리아가 호객하는 장사꾼처럼 마물에게 술병을 건네고 있었다.
뒤에서 바쁘게 일손을 돕는 조앤도 보였다.
“아, 저건 치킨과… 서리레몬주가 아닙니까? 주방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 같던데, 저건가 봅니다.”
“…….”
임프 하나가 술병을 두 팔로 꼭 껴안고 히히 웃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제논이 녀석의 술병을 빼앗았다.
“뭐임!”
품에 있던 술이 위로 슉 사라지자, 임프가 화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제논을 알아본 임프가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제논은 그런 임프를 본척만척하며 병을 열어 향을 맡고 연이어 맛까지 봤다.
“음? 내가 알던 서리레몬주와 다른데?”
“예? 저도 한 번….”
제논을 따라 맛을 본 로하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군. 이건 분명 서리레몬주지만, 기존의 것보다 훨씬 맛이 풍부하고 또… 아주 시원하고 개운합니다. 입 안에서 작은 물방울이 터지는 기분이에요.”
그 말에 술을 내려다보는 제논의 시선이 잠시 깊어졌다.
“키리아 양이 만든 거겠죠? 어떻게 한 걸까요? 이건 제가 알던 맥주보다도 훨씬….”
로하넨이 슬쩍 한 입 더 마시려 하자, 제논이 병을 휙 가져갔다.
“근무 중에 마시지 마라.”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한 습관은 포기했어도, 지켜야 하는 원칙만은 철저히 고집하는 제논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데 키리아 양은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조공을 저렇게 순순히 주면 서열이 더 단단해질 텐데.”
“이만 가자.”
“아, 예.”
빠르게 발길을 돌린 제논은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키리아가 와이번을 쫓아내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봤죠, 봤죠? 약제사의 무기는 검이나 마법이 아니라는 거.」
이번 일에도 독초를 사용했을 것이다.
사람을 해치는 독초를 호신용으로도, 독을 빼는 약으로도, 음식으로도 이용하고 있었다.
꼭 메데이아처럼.
‘칭찬해주고 싶군.’
이번엔 잘 칭찬할 자신이 있었다.
‘과연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
멈칫.
“주군?”
제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로하넨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 제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깜빡 잊고 있던 못마땅한 기분이 고개를 든 까닭이었다.
‘…메데이아의 제자인데도, 어째서 스승 칭찬에는 그렇게 야박하지?’
로하넨을 통해 전달받은, 키리아가 직접 작성한 ‘스승님의 장점 10가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첫째. 집콕을 좋아하심.
쓸데없이 연회 같은 거 안 챙겨도 돼서 너무 좋다!
둘째. 식사를 대충 하심.
연구 중에는 햄만 끼운 샌드위치만 먹어도 만족하신다!
셋째. 미남에 약하심.
그래서 리안에게 아주 잘 대해주신다!]
…이런 식이었다.
키리아의 작성지를 보고 제논은 오랜만에 혈압이 오를 뻔했다.
집콕을 좋아하고 식사를 대충 하고 미남에 약한 게 무슨 장점이란 말인가.
‘게다가 리안이란 자는 누구지?’
지난번 편지에서도 언급된 이름이었다.
미남이라고 지칭한 걸 보면 남자가 분명했다.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메데이아가 아주 잘 대해 주는 남자라고?’
메데이아는 기혼도 아니고, 연인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설마 메데이아가 짝사랑하는…?’
콰직.
제논의 손에서 술병이 아작났다.
“헉, 주군! 갑자기 병을 왜 깨십니까?”
로하넨의 외침을 듣고 제논은 겨우 숨을 골랐다.
“손에서 미끄러졌어.”
대충 둘러댄 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설령 메데이아가 리안이란 자를 짝사랑한다 해도, 자신은 메데이아를 변함없이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게 진정한 팬의 자세니까.
게다가 리안이 누구든지 간에, 이런 꼴인 자신보다 낫지 않겠는가.
제논의 소원은 단순했다.
언젠가 메데이아를 만나 감사와 응원을 전하며 악수를 나누는 것.
그마저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키리아의 등장으로 실현 가능성이 조금 생긴 희망이었다,
그러니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키리아에게 잘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혜를 주는 건 안 돼.’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제논의 철벽 원칙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이 철칙을 깨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