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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141)

18화

가만 보니 낯이 익었다.

짧은 머리에 크고 동그란 눈.

멸치를 닮은 남자 같지만 사실은 여자인 이 사람은….

“당신, 내 의뢰를 받았던 마법사 아니에요?”

와이번에게 납치 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그 비쩍 마른 용병 마법사였다.

결국 납치됐던 거야?

키리아의 물음에 마법사도 그녀를 알아보고는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서, 설마 그때 그 아가씨? 아가씨! 저 좀 도와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흐에엥. 우에엥.”

“저기요. 제 치마는 놓고…. 아니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눈탱이 밤탱이에요?”

마법사의 얼굴은 덕지덕지 멍이 들어있었고 행색도 지저분했다.

발톱에 할퀸 상처들도 꽤 많았다.

“마물들에게 쫓기면서 이렇게 됐어요, 흑흑.”

마법사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키리아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의외로 고생을 엄청 한 모양이었다.

“에휴.”

하는 수 없이 쪼그려 앉은 키리아는 자기보다 키가 큰 마법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훌쩍. 조앤이에요, 아가씨.”

‘조앤, 조앤…. 왠지 익숙한 이름인데? 아!’

생각났다.

그녀는 원작에서 알게 모르게 릴리를 도운 엑스트라였다.

‘릴리의 선행을 지켜보면서 그걸 사방팔방에 소문냈었지.’

그 결과, 릴리를 제국의 유명인사로 발돋움시킨, 비중은 적지만 꽤 중요한 공신이었다.

원작에선 현시점보다 더 나중에 등장하는데, 와이번 때문에 순서가 꼬인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마침 꼭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줄 마법사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키리아는 한결 상냥하게 조앤의 등을 쓸어주었다.

“이제 괜찮으니 뚝 해요, 뚝. 그런데 조앤. 밥은 먹었어요? 좀 핼쑥해 보이는데….”

“성에 온 뒤로 계속 굶었어요. 여기서 저 레몬을 따 먹었지만 더는 싫어요.”

아니, 뭐라고?

“레몬만 먹으면서 여기 숨어 있었던 거예요? 참 나. 안 되겠네.”

키리아는 박력 있게 조앤을 일으켰다.

“같이 주방으로 가요!”

나중에 뭘 시키든 일단 밥은 먹여놔야겠다!

“아, 아가씨….”

조앤이 감동하여 울먹거렸다.

º º º

“세상에, 납치되어서 지금까지 쭉 혼자 숨어 있었단 말이우? 온실에서?”

“네… 우걱우걱.”

조앤이 음식을 정신없이 흡입하며 대답했다.

양념치킨을 한 번 맛본 뒤 걸신이 들린 듯 두 마리를 혼자 해치우고 있었다.

말라빠진 몸매와 대비되는 위장 용량에 앨마와 하인들이 조용히 감탄했다.

그들은 키리아가 알려준 조앤의 사정을 듣고 흔쾌히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혼자 숲을 빠져나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동료들이 구하러 올 때까지 숨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서 한계에 다다랐을 때 아가씨가 오신 거죠.”

기어코 세 마리를 끝장낸 조앤이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말했다.

“아, 그랬군요.”

넋을 잃은 채 조앤의 먹방을 구경하던 키리아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3서클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키리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져온 돈을 거의 다 쏟아부어 의뢰를 맡긴 것도 3서클 마법사 때문이었으니까.

조앤이 찔끔하더니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저, 저는… 사실 …라서요.”

“네?”

“사실… …라구요.”

“좀 크게 말해요.”

키리아가 투덜거리자 조앤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전 사실 1서클이에요.”

“…지금 뭐라고 했냐요?”

빡치는 기분과,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갈등 때문에 말이 이상하게 꼬여 나왔다.

“아니, 나한텐 3서클이라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동료들이 그래야 비싼 의뢰가 들어온다고 해서….”

“그건 사기지! 지금 내 재산을 털어먹은 사기를 친 거라고요! 그나마 의뢰도 제대로 수행 못 했으면서.”

클로버필드 상단의 딸이 이런 사기를 당하다니, 백작님이 울고 갈 일이었다.

“당장 환불해 줘요!”

“꺄악, 아가씨 죄송해요!”

무서운 환불 요구에 조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가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동료들을 만나면 환불해 드리라고 꼭 말할게요. 그러니까 절 마물들에게 내쫓지만 말아주세요! 흐어엉.”

“아, 정말….”

인상을 구긴 키리아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조앤은 내쫓길까 봐 무서워 훌쩍거렸고, 앨마와 하인들은 키리아의 눈치만 살폈다.

키리아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려진 그녀의 입술이 씰룩씰룩 웃고 있었다.

“무슨 수로 환불하려고요? 내 돈은 이미 각자의 주머니로 들어가서 대부분 공중분해 됐을 것 같은데요.”

“죄송해요. 대신 제가 뭐라도 할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난 지금 조수를 찾고 있어요. 내 일을 도와줄 사람 말예요.”

“그럼 제가!”

조앤이 반가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키리아는 부러 코웃음을 쳤다.

“아무나 필요한 게 아닌데요? 아주 유능하고 적합한 조수를 찾고 있는 거니까.”

“유, 유능….”

마법사의 자질만 있다면 누구나 1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마법사들 사이에서 1서클은 ‘개나 소나 마법사라고 하는구만!’에서 ‘개나 소’에 해당하는 부류였다.

그리고 조앤은 재수도 삼수도 아닌 십수생 1서클 마법사. 이른바 만년 낙제생이었다.

“제가 원하는 마법은 좀 희귀해서, 남다른 탐구 정신이 있는 마법사들만 사용하는 거거든요.”

“그럼 전 안 되겠네요….”

“바로 숙성 마법이에요.”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 네?”

조앤이 귀를 의심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숙성 마법이 필요하다고요. 술을 빨리 숙성시킬 때 쓰는.”

“아!”

조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건 자신 있어요! 승급시험에 낙제할 때마다 그 마법으로 몰래 술을 만들어서 마셨거든요!”

“어머, 그래요?”

사실은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키리아는 짐짓 놀란 척을 했다.

“마법사들은 그런 마법을 무시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조앤이 숙성 마법을 익혔을 줄이야!”

“저는 그냥 제가 쓰려고….”

“그게 탐구 정신이 뛰어나다는 뜻이죠.”

사실, 마법을 하찮은 것과 아닌 것으로 나눈다면 애초에 사용하지도 않을 마법이 바로 숙성 마법이었다.

그런데도 키리아는 거듭 칭찬을 해 주었다.

“전 편견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조앤이 바로 그런 사람이네요. 제가 찾던 조수 말이에요.”

“아…!”

조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을 너무 오래 쳐다보는데…?’

더구나 여태 조잘대던 사람이 계속 입만 벌리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혹시 예상이 빗나갔나.

키리아가 머쓱해하는 찰나, 조앤이 꾸벅,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의 조수로 삼아주셔서 정말, 정말 영광이에요. 진짜 열심히 할게요.”

“아, 네.”

어색하게 눈을 돌리니 앨마와 하인들이 묘하게 히죽대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 분위기?

“에… 어흠!”

키리아는 헛기침을 하고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앨마와 여러분들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을까요?”

“호오. 마물들에 관한 일인가요? 좋은 수가 생각났나 보죠?”

“네. 서리레몬주를 만들 거예요. 앨마, 만드는 방법을 아세요?”

“그건 눈감고도 만들죠.”

그 말을 듣자마자 키리아는 가방에서 다이사 뿌리를 꺼냈다.

“이걸 이용해서 주스 같은 서리레몬주를 서리레몬 맥주로 만들 거예요.”

“네?”

“맥주요?”

그 대답에 하인들이 반사적으로 침을 삼키며 술렁였다.

다들 제대로 된 맥주를 마셔본 지가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 중 누구보다 크게 입맛을 다시는 사람은 앨마였다.

“아가씨가 맥주를 만드시겠다니. 얼마든지 협조하지요. 그런데 그걸 마물들에게 어떻게 써먹으려 그러시우?”

“치킨과 맥주를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죠. 게다가….”

키리아는 가방에서 또 다른 독초를 꺼냈다.

바로 마물용 캣닙, 마계초였다.

“그냥 치킨과 맥주가 아닌, 마약 치킨과 마약 맥주를 만들어보려고요.”

마약 치킨과 마약 맥주.

독초로 완성될 마물용 최종병기였다.

“전 건드리면 물어버리는 독초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주의라서요.”

키리아의 고양이 같은 웃음에 앨마가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요, 한 번 해봅시다! 준비가 끝나면 언제든지 불러요.”

“그럴게요. 그리고 조앤, 부탁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아가씨! 그리고 이제부터는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조앤이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그래.”

키리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조앤에게 몇 가지 물건을 안겨주었다.

바구니와 낫, 그리고 방독면이었다.

“마계초를 캐와. 가능한 한 많이. 나는 레몬맥주를 만들 배합을 연구해야 해.”

“맡겨주세요!”

조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누더기 같은 옷 대신 앨마가 건네준 옷을 입고 활기차게 밖으로 달려갔다.

“하녀복이 잘 어울리는구먼.”

앨마가 흐뭇하게 말했다.

키리아는 혹시 제논이 다른 사람을 멋대로 머물게 해서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제논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온 로하넨이 전한 말이었다.

“단, 한 가지 간단한 과제를 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조건이 있어요?”

로하넨은 주군 대신 무안한 얼굴로 키리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키리아 양의 스승님에 대한 장점을 열 가지 써오라고 하셨습니다.”

“…엥?”

“그게 유일한 조건이에요. 이유는 부디 묻지 말아 주시고요….”

“아, 네에…. 그 정도는 뭐, 지금 바로 써드리죠.”

역시 까다롭기 짝이 없는 공작님이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키리아는 대충 자신의 장점을 써준 뒤 레몬 맥주 연구에 착수했다.

발효한 다이사 뿌리와 마계초로 어떻게 서리레몬 맥주를 만들 것인지, 앨마와 수시로 의논을 하기도 했다.

그날 밤, 키리아의 임시 연구실이 된 주방의 작은 창고는 불이 꺼지질 않았다.

다음날.

“이제 시작하죠!”

창고 문을 활짝 연 키리아의 외침을 시작으로 주방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앨마의 주도하에 하인들이 서리레몬주를 담갔다.

거기에 다이사 뿌리와 마계초도 레시피로 섞었다.

마침내 수십 병의 서리레몬 맥주가 만들어졌다.

이제 숙성만 하면 됐다.

“조앤.”

키리아의 호명에 잔뜩 긴장한 조앤이 앞으로 나와 마법을 시전했다.

1서클 숙성 마법으로 술은 금방 깊은 풍미를 냈다.

“어디 한 번.”

맛을 보기 위해 앨마가 잔에 술을 따랐다.

키리아도 잔을 건네받고 맛을 음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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