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게 아니라, 저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스승님은… 음… 본인 얘기가 밖으로 도는 걸 안 좋아하시거든요.”
얼른 제논의 오해를 풀어준 키리아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메데… 아니, 우리 스승님에 대해서 왜 그렇게 궁금하신 건데요?”
순간, 제논이 허를 찔린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냥… 독초를 연구하는 특이한 사람이라기에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정말요?”
“네. 전혀, 없습니다.”
키리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하긴, 워낙 특이한 분이셔서 이름만 아는 사람도 꽤 되죠. 그런데 우리 스승님 이름이 북부에까지 알려져 있을 줄은 몰랐네요.”
“…….”
잠시 대꾸를 않던 제논이 몇 번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 메데이아의 제자라면… 으윽!”
챙그랑!
“공작님!”
“주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였다.
제논의 오른쪽 팔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키리아는 어제처럼 마나 진단을 하기 위해 제논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제논이 어깨를 틀며 거부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아니,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키리아가 안타까워하자 로하넨이 대신 제논을 부축하며 급히 말했다.
“키리아 양, 저쪽에 있는 병을 좀 가져다주세요.”
책장 한구석에 노란 색의 맑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
“그걸 컵에 한 잔 따라주세요.”
“아, 네!”
키리아는 재빨리 컵을 찾아 병마개를 열었다.
순간 병에 담겨 있던 향이 코끝으로 확 스며들었다.
‘엥?’
키리아는 병 입구에 코를 대고 다시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익숙한 향이었다.
‘이 음료는, 설마…?’
살짝 놀란 키리아는 일단 로하넨이 부탁한 대로 한 잔을 따라 그에게 건네준 후 다시 향을 맡았다.
긴가민가했지만 확실했다.
‘이거… 맥주 같은데?’
보기엔 김빠진 맥주 같았으나, 과일 특유의 향이 희미하게 났다.
그 사이 제논의 경련이 차츰 진정됐다.
겨우 한숨 돌린 로하넨이 아직 킁킁대고 있는 키리아를 보고 작게 웃었다.
“그건 서리레몬주입니다. 서리레몬은 체온을 높여주고 진통과 진정 효과도 있어요.”
이어 로하넨이 한 잔 맛보라고 권했다.
그 권유에 따라 조금 맛을 본 키리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술이라기보다는 주스에 가깝네요. 그런데 맥주랑 맛이 비슷한데요?”
“그야 맥주 대용으로 만들어진 거니까요.”
로하넨이 잔을 돌려받으며 대답했다.
“아시겠지만, 북부는 마물들 때문에 곳곳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토양도 마찬가지죠. 작물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으니 맥주를 만드는 건 엄두도 못 내죠.”
남부산 맥주는 북부로 넘어오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뛴다고 했다.
북부의 상황을 악용한 횡포였다.
“맥주를 마실 수 없으니, 독성에 강한 서리레몬으로 대용품을 만든 겁니다.”
“그렇군요….”
대용품치고는 제법 맛이 괜찮았다.
‘탄산만 시원하게 넣어주면 딱 내 취향인데.’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키리아가 갑자기 눈을 반짝 빛냈다.
탄산을 떠올리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 것이다.
침대에 기대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논이 그 변화를 눈치챘다.
“서리레몬이 필요합니까?”
“앗, 네!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서리레몬은 검은 숲 전역에서 채취할 수 있지만 성의 온실에서도 기르고 있습니다. 로하넨.”
그의 지시에 로하넨이 직접 온실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키리아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볼게요.”
제논의 발작이 일어난 직후니 아직 로하넨이 그 곁에 남아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로하넨이 온실의 위치를 설명해준 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서리레몬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마물들에게 선물을 해줄까 싶어서요.”
장난스럽게 히히 웃은 키리아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쏙 내밀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참. 공작님. 음식은 다 드셔야 해요. 환자한텐 음식이 중요하거든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쏙 사라지는 키리아였다.
키리아가 떠난 뒤, 로하넨은 자신의 추리가 적중한 것 같아 싱글벙글했다.
“키리아 양이 드디어 마물들을 상대할 방법을 알아낸 모양입니다. 역시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답네요. 안 그렇습니까, 주군?”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라….”
제논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동안 멀리서 응원하는 것 외에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생긴 셈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자가 북부까지 와서 일을 해야 할 만큼 자금난을 겪고 있는지 걱정이 됐다.
‘나에게 살짝 언질이라도 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녀 입장에선 비밀로 하는 게 당연했다.
가뜩이나 악성 독자들로 인해 고통받던 그녀가 아닌가.
정체도 모르는 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리가 없는 것이다.
‘숲지기’로서의 자신도 메데이아에게 팬이라는 사실만 밝혔을 뿐 그 외에는 전부 비밀로 하지 않았는가.
제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침묵만 지키고 있자 로하넨이 아직 손대지 않은 메인 요리를 들고 왔다.
“주군,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귀찮으니 도로 가져가.”
“후회하실 텐데요? 제가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주군께서도 맛보시면 너무 맛있어서 전에 없던 기력이 솟아나실 겁니다.”
그 순간 오른팔에서 잔류 통증이 느껴져 제논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칠어질 뻔한 숨을 삼킨 후 그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런 게 솟아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은데?”
“주군….”
로하넨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가 볼 때 주군은 마물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불가능할 것 같다는 좌절감을 번갈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치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떨 땐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착각이면 좋겠는데.’
어쨌든 주군의 고집을 꺾기는 힘들었다.
“그럼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세요. 이건 키리아 양이 독초로 소스를 만든 특제 요리니까요.”
“독초로?”
제논이 뒤늦게 관심을 보였다.
접시를 치우려던 로하넨은 그 관심이 꺼질세라 얼른 클로슈 뚜껑을 열어보였다.
진득한 붉은색 양념의 치킨이 등장했다.
이런 비주얼의 음식은 처음이라 제논은 당황한 기색으로 잠시 치킨을 내려다봤다.
“키리아 양이 만든 양념치킨이란 겁니다. 앨마도 호평이었죠.”
본인의 요리보다 다른 사람의 요리에 더 까다로운 앨마다.
그녀가 호평을 했다는 말에 제논도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조금만 맛볼까.”
치킨 한 조각을 나이프로 잘라 작게 한 입 먹었다.
조용히 우물거리던 제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재밌는 맛이군.”
“그렇죠? 그 소스를 만든 독초는 바로….”
“잠깐. 내가 알아보겠다.”
치킨 한 점을 다시 입에 넣은 제논은 신중하게 맛을 음미했다.
“어떻습니까, 주군. 맛있죠?”
“아직 모르겠는데.”
나이프질이 계속 이어졌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무섭게 몰두하는 제논이, 처음으로 인기 투표에 대한 열정을 잠시 접어두고 식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나이프를 내려놓은 제논이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먹을 만했다.”
‘맙소사, 접시를 싹 비우셨다!’
로하넨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감격했다. 그와 동시에 키리아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정말 주군의 주치의가 되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주군은 공과 사를 철저히 분리하는 사람이었다.
메데이아의 제자라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엄격하게 판단할 소지가 충분했다.
내심 걱정이 된 로하넨이 넌지시 운을 뗐다.
“주군. 키리아 양이 제 실력을 발휘하려면 지나친 제한은 오히려 불공평할 겁니다.”
“난 그녀에게 제한을 건 일이 없다.”
“그저 당부드리는 말씀입니다. 스승을 돕기 위해 홀로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귀족 영애이신 것 같은데, 가문의 지원도 얻지 못한 걸 보면요. 이런 강인한 정신력에는 가산점을 주셔야 합니다.”
“…….”
간곡한 눈빛의 로하넨을 바라보던 제논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슥슥.
“…주군, 뭐하시는 겁니까?”
“칭찬.”
“헉…….”
잠시 로하넨의 머리를 쓰다듬던 제논이 불편한 기색으로 손을 뗐다.
“널 칭찬하니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아.”
“저도 이상하게 불쾌한 느낌인데요?”
잠시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º º º
공작의 침실에서 나온 키리아는 방독면을 쓴 채 온실의 유리문을 열었다.
로하넨이 관리를 하는지 내부가 제법 깔끔했다.
꽃들이 종류별로 피어 있었고, 온실 천장에는 기온을 관리하는 마법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키리아는 온실에 마계초가 없는 걸 확인하고 방독면을 벗었다.
“와아, 꽃향기 너무 좋은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무리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그러다 중간중간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뽑아드는 키리아였다.
“어? 다이사 풀도 있네?”
채집한 다이사 풀의 뿌리만 챙긴 뒤 다시 걸음을 옮기던 키리아는 온실 중간쯤 이르러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찾았다!”
키리아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나무에 잘 익은 레몬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꼭지 쪽에 흰 서리가 앉은 걸 보니 서리레몬이 틀림없었다.
온실에서 가장 넓은 구획을 이 서리레몬 나무가 차지하고 있었다.
키리아는 서리레몬을 몇 개 따서 가방에 담았다.
“이 정도면 되려나.”
레몬을 담은 가방 한쪽에는 다이사 뿌리 묶음을 담았다.
다이사 뿌리는 발효하면 탄산을 뿜어낸다.
다만 다른 재료와 숙성해서 쓰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 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7일 안에 활용하기는 힘들었다.
“어디 하늘에서 마법사라도 뚝 안 떨어지나….”
원작에서도 없던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괜히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부스럭!
수풀 저 너머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
흠칫한 키리아가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설마 여기에도 마물이 있었나?
부스럭 부스럭
기척이 계속 움직였다.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뭐야?”
서리레몬을 흉기처럼 꽉 쥔 키리아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무성한 풀들 사이로 기척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인 까닭이었다.
‘으악! 도망치자!’
빠르게 결정하고 다급히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덥석!
무언가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꺄아악!”
“으아악!”
키리아와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치마를 잡은 상대의 손을 걷어차고 얼른 도망가려던 키리아는 발길질 직전에 끼익, 멈췄다.
“어? 잠깐,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