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기가 막혀서 가만히 있는 키리아와 머리를 쓰다듬는 공작.
‘그러고 보니….’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적은 많아도 누군가에게 쓰다듬을 받은 적이 없는 키리아였다.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제논이 쓰다듬던 손을 거뒀다.
그러자 멀어지는 그의 손바닥에 자석 이끌리듯 키리아의 머리통이 붙어서 따라갔다.
몸이 80도 정도 기울어지고 난 뒤에야 키리아는 헉! 하고 허리를 폈다.
어정쩡하게 손을 든 제논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머머머머리카락에 공작님의 손가락이 엉켜서, 네,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잘 쓰다듬으셨어야죠.”
나 지금 뭐라는 거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행히 제논이 순순히 수긍했다.
“주의하죠.”
“네, 부탁 좀 드릴게요…. 흠흠.”
키리아는 열 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제논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대는 남부에서 왔다고 했죠.”
“네.”
“남부에서는 독초의 활용을 연구하지 않는 걸로 압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독초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니까요.”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저처럼 가끔 예외도 있어요.”
“예외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기다렸다는 듯 제논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 독초를 그런 방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제국 내에 단 한 명뿐이라서 말입니다.”
“……?”
“메데이아라고.”
헉.
키리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공작이 메데이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니, 그건 일단 둘째 치고.
설마… 내가 메데이아란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 그러셨군요. 아하하. 메데이아를 모를 수는 없죠….”
일단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제논의 붉은 눈은 지극히 차분했다.
“네. 그대가 마기를 독초로 해독했다는 건, 독초의 약용이나 실용화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내가 아는 연구자는 메데이아 뿐, 키리아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여름도 아닌데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그대는 주로 어디에 연구 논문을 게재했습니까?”
헉.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았다.
“게, 게재요?”
“네. 그대가 해왔던 연구들을 읽어보고 싶군요.”
“그, 그렇군요. 게재 말이죠. 네. 게재느은…….”
키리아는 축축한 손을 치맛자락에 몰래 문질렀다.
제논이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수상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어떡하지? 뭐라고 둘러대야 하는 거야?’
머릿속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드레스를 입은 키리아 세포가 말했다.
-그냥 초보 약제사라고 잡아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연구 가운을 입은 메데이아 세포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작도 말했잖아. 마기를 독초로 해독하는 건 실력자라는 뜻이라고. 그런데 초보라고 하면 공작이 그 말을 잘도 믿겠다.
-그럼 어쩌지? 아무런 연구 발표도 안 했다고 하면 더 이상하잖아.
-차라리 메데이아라고 밝히는 건 어때?
-그건 절대 안 돼!
키리아 세포가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한 번 샌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된다고.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난 남부로 강제 귀환되어 두꺼비 신부, 리안은 비운의 돌덩이가 될 거야.
-하긴, 커밍아웃하는 순간 너의 유일한 대피소이자 인생의 낙인 메데이아는 사라질 거야.
-그럼 어쩌지?
-공작에게 부분기억상실을 일으키는 독약을 먹이자.
-…매력적인 제안이야.
키리아의 뇌내 망상 회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키리아?”
공작이 대답하다 말고 멍하니 서있는 키리아를 불렀다.
“아!”
키리아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배시시 미소부터 지었다. 시간을 끌기 위한 방편이었다.
“사실은 저어….”
그 와중에도 키리아의 머릿속은 지진을 만난 듯 난리법석이었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주군.”
로하넨이었다.
다소 긴장한 기색의 그는 굳어있는 키리아를 발견하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직 계셨군요. 잘 됐네요.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나중에 하도록. 지금은 키리아 양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있다.”
“제가 그 대답을 갖고 있습니다.”
“……?”
“키리아 양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제논보다 키리아가 더 놀랐다.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떨어뜨리신 걸 줍다가 내용을 보고 말았어요.”
키리아는 로하넨의 품에서 나온 종이들을 보고 경악했다.
“내 편지!”
키리아가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로하넨이 그보다 먼저 편지를 제논에게 건넸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종이를 접은 탓에, 필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내용의 일부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띄엄띄엄 수신인이 지워진 편지는 북부에서 빚을 꼭 갚겠다,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 걱정 말라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잉크가 잔뜩 번졌지만, ‘리안’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추신도 있었다.
[P.S. 부탁해, 리안. 메데이아와 내 관계는 꼭 비밀로 해줘.]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키리아 양의 정체는 확실합니다.”
로하넨이 비장하게 안경을 고쳐 쓰자, 키리아도 긴장했고 제논도 은근히 긴장했다.
“키리아 양, 당신은….”
마침내 로하넨이 범인을 지목하듯 키리아를 가리켰다.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가 틀림없습니다!”
“…예?”
“키리아가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 라고?”
열린 창문을 통해 찬바람이 휭 불었다.
황당해하는 키리아와 제논의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로하넨은 자신만만했다.
“확실합니다. 주신의 이름을 걸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론에 멍해 있던 키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 떡밥, 물자!
“아…! 안타깝게도 그만 들키고 말았네요. 절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메데이아… 스승님도 밝히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괜히 남들 시선 안 좋아진다고.”
“역시! 그랬군요!”
키리아와 로하넨이 서로를 보며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제논의 표정은 한층 더 싸늘해졌다.
마치 사기꾼 콤비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른 키리아는 얼른 거짓말을 보탰다.
“해독수에 관한 것도 사실은 스승님한테 배웠던 거예요. 제 지식은 전부 스승님 거죠.”
“…그럼 수신인은 왜 지웠습니까? 이 낱장에는 그대로면서.”
제논의 목소리에 진한 의심의 빛이 묻어나왔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던 거예요. 수신인을 지운 건, 아무래도 조심해야 하니까 그랬던 거고요. 제가 실수로 편지를 흘릴 수도 있잖아요. 이번처럼.”
로하넨이 키리아의 변명에 힘을 실어주었다.
“실제로 마물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급히 달아나시다가 그 편지를 떨어뜨리셨죠.”
“…그런가? 하지만 쉽게 믿기지는 않는군.”
“그러실 겁니다. 저도 그 편지를 처음 봤을 때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로하넨이 칭찬의 눈빛으로 키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키리아 양이 주방에서 펼친 활약을 보셨다면 금방 확신하셨을 겁니다. 독초로 마계의 독을 무력화시킨 솜씨는 틀림없이 메데이아 님의 연구와 관련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내 짐작도 그렇긴 하다만.”
“그렇죠? 게다가 사제관계를 숨기셨던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키리아를 힐끔 바라보는 로하넨의 시선이 짠하게 변했다.
“독초를 다루는 메데이아의 제자라고 하면, 어디에서도 약제사로 인정을 받지 못할 테니까요.”
“…….”
그제야 제논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로하넨이 너무 앞서가는 것 같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와이번을 독초로 다루던 것도 그렇고, 그 퍽퍽한 수프를 독초로 향긋하게 바꾼 것도 그렇고….
확실히 메데이아가 칼럼에서 자주 이야기하던 독초의 활용법과 비슷했다.
‘역시 그녀의 제자라서 나름의 비법을 이어받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메데이아가 우연히 공작령으로 찾아오고, 또 우연찮게 자신의 주치의가 된다는 망상보다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편 키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실수로 편지를 흘렸을 뿐인데 로하넨이 알아서 오해와 착각의 불씨를 공작에게 떠안기고 있었다.
“…그럼, 그렇다 치고.”
마침내 제논이 수긍의 빛을 보였다.
“결국 메데이아의 제자가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겁니까.”
“…네.”
결론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지만 키리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연 제논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메데이아에게 예상치 못한 자금 문제가 생겼단 뜻입니까? 그래서 칼럼을 중단했고, 그녀의 제자인 그대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 북부까지 온 거고?”
“네?”
잘 나가다가 이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그리고, 내가 칼럼을 중단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키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제논이 계속 말을 이었다.
“대체 메데이아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얼마나 큰 문제이기에 제자까지 빚을 갚기 위해 나선 겁니까?”
‘점점…?’
마치 취조라도 하듯 연이어 질문을 던지는 제논.
그 강렬한 시선에 키리아는 얼굴이 뚫릴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게다가 왜 또 저렇게 정색을 하면서 묻는 거야?
설마 메데이아가 돈 관리도 못해서 제자를 부려먹는 악독한 캐릭터라고 오해하는 거야, 뭐야.
은근히 부아가 치민 키리아는 제논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노 코멘트입니다.”
“뭐라고요?”
아, 맨틀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
저 예리한 질문에 노 코멘트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아니나 다를까.
제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짐과 동시에 주변 공기가 확 변했다.
살기로 무거워진 공기가 침실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헉…!”
“윽, 주군!”
키리아와 로하넨의 신음에 제논이 뒤늦게 놀라 살기를 거뒀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제 목을 감싼 키리아가 헉헉댔다.
급히 그녀의 상태를 돌봐준 로하넨이 넌지시 제논을 타박했다.
“주군, 키리아 양은 일반인입니다.”
“…미안합니다, 키리아. 내가 평정심을 잃었군요. 하지만 노 코멘트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주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까?”
맙소사!
노 코멘트라는 말을 왜 그렇게 해석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