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41)

15화

앨마가 호탕하게 키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힘이 어찌나 좋은지 키리아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좋아요! 이곳을 마음대로 쓰도록 해요. 여기는 로하넨 신관이 수시로 찾아오고, 나와 이 녀석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마물들이 오지 못해요.”

“정말요? 꺅, 감사합니다!”

안전지대 연구실을 획득했다!

키리아는 진심으로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그 반응에 앨마도 흐뭇하게 웃었다.

잠시 후, 앨마는 공작에게 올릴 식사 쟁반에 양념치킨을 올렸다.

키리아의 해독수를 활용한 식재료로 수프도 만들었다.

클로슈 접시에 뚜껑을 덮은 앨마가 키리아에게 권했다.

“아가씨가 도련님께 좀 가져다줄래요?”

“아, 네.”

“그건 제 일입니다, 앨마.”

로하넨이 냉큼 쟁반을 대신 받아들었다.

“주군은 지금 중요한… 추천서를 작성하시는 중이라 매우 예민하십니다. 게다가 저도 주군께 보고드릴 일이 있고요.”

“그건 다음에 하시구려.”

앨마가 쟁반을 다시 빼앗았다.

“아가씨 덕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나왔는데, 당연히 아가씨가 가져가야지. 로하넨에게는 제가 따로 부탁할 게 있어요.”

앨마의 단호한 주장에 결국 키리아가 식사를 갖다주게 됐다.

남겨진 로하넨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이 외부 손님에겐 냉담한 걸 알잖아요, 앨마. 짓궂게 굴지 마세요.”

“저 아가씨는 괜찮을 거예요.”

“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자의 감.”

확신에 찬 앨마의 대답에 로하넨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저한테 부탁하실 일이 뭐죠? 얼른 끝내고 주군께 가봐야 합니다.”

“응? 핑계가 아니고 진짜 보고할 게 있었던 거유?”

“네. 아주아주 중요한 보고죠.”

키리아가 떨어뜨린 편지지들이 로하넨의 안주머니에서 조용히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º º º

짹짹. 짹.

창 너머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제논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밖을 바라봤다.

거미처럼 눈이 여러 쌍이 달린 마계 참새가 제논을 갸웃갸웃 보다가 포르르 날아갔다.

“…….”

제논이 잠을 못 이루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도대체 왜?’

팔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이었다.

제논은 침대에 누운 채 읽다 만 잡지를 펼쳤다.

[메데이아의 독초 칼럼은 개인 사정으로 휴재합니다.]

‘도대체 개인 사정이 뭐지?’

이 의문이 밤새 제논을 괴롭혔다.

인기 투표용 엽서를 쓰면서도 머릿속에서 이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메데이아의 사정을 알아볼 수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하나뿐인 은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니….’

팔이 이상하게 변한 직후, 제논은 자신이 금방 마물로 탈바꿈하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저택을 떠나 옛 공작 성에 틀어박혔다.

다행히 마물화는 팔에서 멈췄다.

시간을 벌었다 생각한 제논은 팔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저 섬뜩한 마족의 눈 좀 봐!’

사람들은 그의 병이 옮을까봐 외면했고 불길하다며 기피했다.

그때부터 타락한 성기사단장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독초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물이 문제를 일으키면 전부 제논의 탓이 되었고, 교단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성기사단장직에서 그를 퇴출시켰다.

마물들이 그의 성으로 모이자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었다며 더더욱 수군거렸다.

‘거 봐. 제논 폰 란페르세 공작이 북부의 독이라니까.’

모두가 제논이 문제라고 했다.

허튼소리로 치부했던 그 말을 제논도 조금씩 믿게 됐다.

‘나는 정말 없어져야만 하는 독인가?’

자신을 영웅이라 칭송했던 자들이, 이젠 자신이 사라져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 날, 로하넨이 남부의 잡지를 구해왔다.

그 잡지에서 메데이아의 칼럼을 보게 됐고, 칼럼을 통해 성 주변에 생긴 몇몇 독초들의 이름을 알게 됐다.

독초를 약으로 쓸 수도, 심지어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메데이아의 연구를 욕하고 있었다.

그런 저주받은 풀 따위가 어떻게 약이 되겠냐며 그녀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심지어 마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메데이아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녀가 독초를 연구하고 칼럼을 발표할 때마다 제논은 왠지 자신이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몸도 쓸모가 있다고, 계속해서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던 제논에게는 한줄기 빛이자 구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칼럼을 중단한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투표 엽서가 고작이라니.

너무 한심하고 기가 막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더 많은 칭찬을 해줄 걸 그랬다.

출판사에 전한 후원금도 더 넉넉하게 보내줄 걸 그랬다.

제논이 이런저런 걱정과 후회를 하며 몸을 뒤척일 때였다.

똑똑.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귀찮아서 대답을 미뤘더니 문이 달칵 열렸다.

“굿모닝. 좋은 아침이에요, 공작님.”

“……!”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빼꼼 드러난 작은 머리통.

키리아였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로?”

너무 예상치 못한 등장이라 제논은 저도 모르게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잠옷 사이로 쇄골과 단단한 가슴 일부가 드러났다.

“그, 그게… 앨마라는 분이 부탁하셔서 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키리아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지만 한발 늦어버렸다.

어느새 표정을 굳힌 제논이 잠옷을 여미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아직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걸로 아는데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공작님이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안 하셨다면서요. 임시 약제사로서 그런 습관은 용납할 수… 어? 책상 위에 있는 저것들, 전부 문서인가요? 밤새 일하셨어요?”

“…….”

제논은 대답 대신 휙 돌아누웠다.

대답하기도 귀찮으니 그만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키리아는 그 반응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공작님, 일을 열심히 하시는 것도 좋지만, 당분간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혹시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 아니죠?”

“…….”

“제 말 듣고 있어요?”

“…후.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십시오.”

제논은 그 말을 끝으로 아예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그 행동을 보고 키리아는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저도 그냥 나가고 싶지만 주방장님이 꼭 드시라고 하셨어요. 계속 안 드시면….”

키리아는 장난스럽게 뒷말을 늘였다.

“직접 먹여드리라고 하시던데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제논이 바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식사를 시작했다.

키리아는 어이가 없어 제논을 째려봤다.

‘나도 먹여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거든요!’

의도한 대로 공작으로 하여금 식사를 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쩐지 철벽수비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 키리아의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수프만 뜨던 제논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당근이 맛없을 줄 알았는데.”

“편식하세요? 애들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마기를 정화하면 맛도 없어지니까요.”

“아,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에헴! 그게 말이죠.”

키리아는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무표정했던 제논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독초로 마기를 제거했단 말입니까? 로하넨이 여러 방법을 써도 안 됐던 일인데.”

“저는 약제사니까요. 그 정도는 뭐.”

“아니, 일반 약제사들은 독초로 독을 해독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네, 그대는 독초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군요.”

“그… 렇죠?”

‘날 왜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방금까지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던 제논이 자신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뜻밖의 동지를 만나서 엄청 반가운데, 가까스로 자제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발상의 전환이 그 기본이겠죠? 일반적인 약제사들은 약초만 쓰려고 하지, 독초를 활용할 생각은 못하지 않습니까.”

“네? 네에….”

“그대가 이런 방법을 썼다는 건 약학계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방증이겠네요.”

“거기까지는 아닌데….”

뭐야? 당황스럽게 왜 이래요?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대의 행보는 더욱 선구자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

“그대가 쓴 방법은 단순하지만 그래서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만 좀….”

제논의 칭찬이 계속 이어지자 키리아의 손가락이 불판의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겸손해 할 필요 없습니다. 본래 훌륭함은 평범함에서 출발하지 않습니까.”

“으아악, 그만!”

한계에 달한 키리아가 검지로 공작의 입술을 꾹 눌러버렸다.

“…….”

‘아차! 지나친 칭찬을 말린다는 게 그만….’

키리아는 얼른 손가락을 떼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억지로 칭찬 안 해주셔도 돼요. 여기 머물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까요.”

“난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크윽.”

졌다.

체념한 키리아의 표정을 보고 제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는 칭찬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겉보기와는 좀 다르군요.”

“제 겉보기가 어때서요?”

“…….”

‘치사하게 이럴 땐 묵비권이냐?’

키리아는 샐쭉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이 익숙할 리는 없잖아요. 남부에선 독초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괴상한 짓인데요.”

“…….”

“공작님도 조심하세요. 다른 귀족들의 평판도 신경 쓰셔야죠.”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지금은 입지가 불안정하니까 말이지.

“그런 이유 때문에 칭찬을 듣기 싫은 겁니까?”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제논의 반응이 너무 진지했다.

쑥스러워진 키리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아뇨, 뭐 그냥… 싫은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럽달까요. 욕을 하면 차라리 반격이라도 하겠는데….”

그때였다.

툭.

머리 위로 따뜻하고 묵직한 손이 올라왔다.

어?

눈이 동그래진 키리아는 제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제논을 쳐다보았다.

제논도 자신의 행동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뻣뻣해진 키리아가 물었다.

“…머리는 왜요?”

“칭찬을 해주고 싶어서….”

이게 칭찬이라고?

“보통, 칭찬을 하면 쓰다듬지 않나요? 이렇게 손만 얹는 게 아니라.”

물론, 쓰다듬는 걸로 칭찬하는 건 어린아이나 동물에게 더 잘 어울리고요.

그렇게 뒷말을 이으려 했는데, 키리아의 피드백을 제논이 충실하게 반영했다.

슥슥, 서툴게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