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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41)

14화

잠시 후, 식탁 위에 채소와 과일 등 식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키리아는 보라색 반점들이 번진 채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멍든 것 같은 반점이 마기에 오염된 흔적인가요?”

“맞아요. 이것도 모처럼 도련님을 위해서 남부 것으로 가져온 건데….”

“키리아 양. 이걸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로하넨이 의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키리아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북부에 와서 안 건데, 이곳에선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시판되지 않았다.

그러니 메데이아라는 이름도 모를 것이다.

‘그럼 사양할 필요가 없지.’

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독초를 마음껏 다룰 수 있다니!

키리아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끓는 물을 준비해주세요.”

“넵!”

하인이 곧장 화구 위에 커다란 냄비를 올렸다.

그동안 키리아는 가방에서 말린 파가일 열매와 말꼬리풀 다발을 꺼내 잘게 썰었다.

말꼬리풀은 부식 효과가 있고 파가일 열매는 다른 독을 밀어내는 독초다.

‘이독치독이라고나 할까.’

그것들을 끓는 물에 넣고 노랗게 우린 후, 그 용액을 식재료를 담근 찬물에 부었다.

그러자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다.

찬물에 담겨 있던 식재료에서 보랏빛 멍이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오…!”

하인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마기가 빠지고 있어!”

지켜보던 로하넨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성질 급한 앨마는 식재료를 건져내 깨끗한 물에 헹궜다.

그리고 보라색 반점이 완전히 사라진 양파 한 알을 반으로 잘라봤다.

안쪽까지 하얗고 싱싱했다.

“방금 막 수확한 거 같네!”

시험 삼아 양파를 씹으니 아삭아삭 신선한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을 보고 너도 나도 달려와 깨끗해진 채소와 과일을 한 입씩 맛봤다.

맛을 본 사람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단한 방법 같았는데 이런 효과라니, 정말 대단하지 말입니다!”

“주방장님, 이런 재료라면 주군께 더 맛있는 음식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앨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더 좋은 음식을 만들어야지. 저 치킨은 전부 버린다.”

“네?”

음식 남기는 걸 무척 싫어하는 앨마였기에 하인들은 그녀의 말에 몹시 놀랐다.

키리아 또한 당황했다.

“자, 잠깐만요! 저걸 다 버린다고요?”

식탁에는 손도 대지 않은 치킨이 여섯 마리나 있었다. 아깝지도 않나?

“나도 버리고 싶진 않지만, 다시 쓸 수도 없으니 어쩌겠수.”

밑간이나 양념이 제대로 안 되어 있을 뿐이지, 튀김 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들이었다.

‘잠깐, 양념?’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괜찮다면, 제가 잠깐 주방을 써도 될까요?”

“뭔가 더 할 게 남았어요? 그렇다면 써도 괜찮긴 하지만….”

“제가 동생에게 만들어주던 간식이 생각나서요. 별 건 아니고요.”

“간식이라고요?”

“네.”

키리아는 곧바로 가방에서 레베리 열매를 전부 꺼냈다.

매운맛을 지닌 약한 독성의 열매였다.

예전에 연구하다가 알게 된 건데, 이걸 홍고추 대용으로 쓸 수 있었다.

‘여기다 당근을 갈아 넣고 버무리면 고추장 대용으로 쓸 수 있지.’

참기름과 물엿 등은 남부에서 들여온 것들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토마토와 마늘을 갈아 넣고 보글보글 끓여주면….’

만드는 과정은 키리아 마음대로 간편화했지만, 핵심적인 맛은 그대로 살려낸 양념소스였다.

“이건 대체….”

사람들은 빨갛고 찐득한 소스를 입힌 치킨을 생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셔보세요. 나쁘진 않을 거예요.”

리안이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매번 남기지 않고 다 먹었으니 아주 빈말은 아니었을 거다.

‘평타는 치겠지.’

그런 생각으로 키리아는 로하넨과 앨마, 그리고 하인들을 재촉했다.

다들 눈치를 보다가 양념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잠시 말없이 씹더니….

“……!”

“으음!”

모두 눈을 크게 뜨거나 감탄 섞인 콧소리를 내는 등 놀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앨마는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다시 한 점을 맛봤다. 그러더니 재차 탄성을 질렀다.

“맛있어! 달콤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게 색다르면서도 맛있어. 이 소스 아가씨가 개발했어요?”

“아뇨. 출처는… 비밀이에요.”

“과연…!”

전생의 지식을 설명하기 난감해서 얼버무렸더니, 앨마는 다른 생각을 했는지 존경의 눈빛을 보였다.

꼭 은둔 고수의 제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외면하자 이번엔 로하넨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맛이라면 분명 주군께서도 드실 겁니다. 그 맛없던 요리가 이렇게 변신하다니 놀랍군요! …앗. 죄송합니다, 앨마.”

“흥.”

앨마가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가씨의 실력을 눈앞에서 봤는데 내가 내 음식 솜씨 자랑을 할 수는 없지요. 이왕이면 소스 만드는 것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키리아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그럼 제가 제안한 거래는 성사된 거겠죠?”

“음, 그래요. 이건 거래였지.”

키리아는 앨마에게 원하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기브 앤 테이크를 빠뜨려선 안 됐다.

“아가씨가 선보인 마기 정화 방법과 새로운 소스 레시피 모두 탐이 나요. 거절하는 사람이 바보지. 그런데….”

흥분에 들떴던 앨마의 눈초리가 차츰 날카로워졌다.

“아가씨가 마기 정화와 요리에 썼던 풀들, 모두 독초 아니우?”

“그… 알아보셨네요?”

모를 줄 알았는데….

“지금 독초 우린 물로 식재료를 씻고, 독초로 양념을 만든 거예요?”

“…맞아요.”

남부에서는 독초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그런데 그걸 눈앞에서 사용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당장 머리카락이 뽑히거나 마녀로 몰려서 쫓겨나는 건 아닐까?’

키리아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말도 안 돼!”

“정말 멋지군요!”

“진심 대단하지 말입니다!”

로하넨과 앨마, 하인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 네. 저도 알아요. 제가 마녀 같은 거…. 네?”

잔뜩 긴장한 채 욕먹을 준비를 하고 있던 키리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봤다.

그들은 해독수를 구경하느라 서로 머리를 맞댄 채 흥분한 얼굴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파가일 열매와 말꼬리풀은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는 독초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마기를 해결할 방법이었다니요!”

“놀라운 발상이우!”

“레베리 열매도 그렇게 맛있게 변할 줄 몰랐지 말입니다!”

시끌시끌.

벙 찐 키리아만 빼놓고 다들 난리였다.

그 바람에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몇 번 반복하던 키리아가 뒤늦게 물었다.

“저기… 다들 괜찮아요? 독초를 써서 걱정되지는 않아요?”

앨마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멀쩡하면 된 거 아니우?”

“그래도 독초인데….”

“바로 그 때문에 더 놀라운 겁니다, 키리아 양.”

로하넨이 안경을 고쳐 썼다.

기분 탓인지 그의 안경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남부와 달리 북부에는 독초가 너무 많아요. 제거하는 것도 골치죠. 그런데 오히려 같은 독초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래도 일반화하려면 적용되는 독성의 농도도 그렇고, 좀 더 연구가 필요한데요.”

“그런 건 문제조차 되지 않아요. 키리아 양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네? 당연히 그건 그렇지만요….”

내 실력이야 내가 잘 알지만, 이 신관은 어째서 이렇게 확신하지?

의아해하는 키리아에게 로하넨이 태연한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누구에게서 배우셨습니까?”

“배운 게 아니라 제가 알아낸 거예요. 에헴.”

“…그래요?”

로하넨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뭔가 문제라도…?”

“그럴 리가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독초에 대한 얘기도 끝났고, 이제 거래를 마무리 지을 차례네요. 동의하죠, 앨마?”

앨마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좋습니다. 그럼 키리아 양. 키리아 양이 원하는 대가를 말씀해 주세요. 주신의 이름으로 제가 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마기 정화수를 선보인 것도, 양념 소스를 서비스로 선보인 것도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그거지.’

키리아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 표정을 보고 공작성 사람들은 긴장했다.

이 아가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준 방법이 바로 이곳 북부에 꼭 필요한 지식이라는 걸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로하넨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남부에서 살던 아가씨가 빚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들었다. 그러니 엄청난 돈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놓칠 순 없죠.’

앨마도 생각했다.

‘재능이 남다른 아가씨야. 분명 거래 조건도 남다르게 배포가 크겠지.’

로하넨은 공작성의 내년 예산을 계산했다.

하인들은 숨겨놨던 쌈짓돈을 세어봤고, 앨마는 부하들의 쌈짓돈을 어떻게 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제가 원하는 건….”

긴장된 침묵 속에 키리아의 입술이 움직였다.

로하넨과 앨마 등은 침을 꿀꺽 삼키며 키리아의 움직이는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 박자 쉰 키리아가 선언하듯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이곳이에요.”

“뭐라구요?!”

앨마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하는 게 이 성이라니! 아가씨,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군! 어떻게 그런 대담하기 짝이 없는…!”

“아뇨 아뇨!”

키리아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이 주방을 빌려달라고요!”

“…으잉?”

키리아는 오해하는 앨마에게 아침부터 마물들이 방안의 가구를 죄다 뜯어가 버렸다는 것, 그 이후에도 녀석들이 계속 찾아올 거라는 것, 그래서 연구할 공간조차 없는 처지란 걸 속사포처럼 말해주었다.

“그러니 일주일 동안 이곳을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진심…이우?”

“네.”

“정말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

“물론 제가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벌 생각은 없어요.”

지금의 공작성 형편에 금전을 기대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내 목표를 위해선 키잡을 해야지. 키워서 잡아먹기. 히힛.’

하지만 키리아의 속셈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상냥한 마음씨라니! 마물들을 골탕 먹이는 모습을 보고 절대 손해는 안 볼 사람 같다고 판단한 저를 반성합니다….’

로하넨이 신께 반성을 올렸다.

‘얼굴도 예쁜데 실력과 인성까지 어쩜 이리 깜찍할까.’

앨마가 키리아를 먹잇감 보듯 탐냈다.

‘대의를 위해 돈을 마다하다니, 천사 같지 말입니다.’

하인들은 험상궂은 얼굴로 울먹였다.

감동과 감탄의 물결이 조용히 좌중을 휩쓸었다.

동시에 모두 결심했다.

‘이 아가씨,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키리아가 ‘어차피 떠날 손님’에서 ‘탐나는 인재’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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