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1)

13화

그때부터 제논은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로하넨은 서둘러 추가 주문을 넣었다.

최신호 잡지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추가 물량까지 모두 도착하고 나자 로하넨은 내심 후회했다.

‘…조금만 늦게 보여드릴 걸.’

잡지를 받자마자 제논이 ‘인기 투표 엽서’를 쓰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투표 이유를 쓰라는군. 그것도 중복 투표 방지를 위해 똑같은 대답은 걸러낸다고 해. 50장까지는 쉬웠는데… 조금씩 막히는군.’

사실 편집부는 투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다. 독자들도 그걸 알고 꼼수를 썼다.

하지만 제논은 꼼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주 성실하게 50장을 다른 내용으로 꽉 채웠다.

‘로하넨, 메데이아의 칭찬할 점을 다섯 가지만 대봐라.’

이런 식으로.

‘신이시여….’

로하넨은 제논이 숙제를 내줄 때마다 성호를 그었다. 동시에 메데이아가 괜히 얄미워졌다.

안 그래도 피폐한 주군이 인기 투표 때문에 더 피폐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부터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예상이 맞다면.’

키리아라는 아가씨의 정체는 바로….

“흠흠. 안녕하세요?”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로하넨을 비롯한 주방 사람들이 일제히 문가를 쳐다봤다.

‘뭐지, 저 방독면은?’

예쁜 원피스에 어울리지 않는 방독면을 쓴 여자의 등장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워낙 수상쩍은 복장이라 다들 경계심을 보이며 누구 하나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 어서 들어오세요.”

로하넨이 냉큼 나섰다.

으잉?

앨마와 하인들은 깜짝 놀랐다.

로하넨이 부드러운 성품이긴 하지만, 낯선 사람을 성에 들이는 문제에 있어선 공작님만큼이나 엄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 쉽게 허락을 하다니?

아니, 허락을 넘어 거의 들어오라고 부탁하는 듯한 태도였다.

“자자, 이쪽으로요. 사양치 마세요.”

“어어…? 네에.”

그렇게 로하넨은 어리둥절해 하는 방독면 여자를 주방 안으로 안내했다.

º º º

‘이 신관,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절하지? 사기꾼 아냐?’

키리아는 생긋생긋 웃으며 자신을 안내하는 로하넨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그 시선을 오해한 로하넨이 더욱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이분들은 마물들과 달라서 해를 끼치지 않아요. 그 가면도 여기서는 벗으셔도 되고요.”

“네? 아.”

키리아는 그제야 방독면을 벗었다.

방독면 속에 감춰져있던 키리아의 얼굴이 드러나자 주방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웬 귀여운 아가씨?

모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로하넨이 부드러운 미소로 키리아에게 악수를 건넸다.

“소개가 늦었군요. 로하넨 디어스입니다. 공작님을 보필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신관이죠. 편하게 로하넨이라 불러주세요.”

“……!”

키리아는 그 소개를 듣자마자 공작에게 신성력을 불어넣던 신관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의 바르게 악수에 응했다.

“저는 키리아라고 해요. 공작님의 주치의가 될 약제사예요.”

“예. 사정은 들었습니다. 사실 약제사 공고는 제가 낸 것인데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주방장이 불쑥 다가왔다.

“아가씨가 새로 들어온 약제사라고요?”

“네.”

키리아가 대답하자 주방장 뒤에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오오오!”하는 탄성을 질렀다.

이 성에서 매일같이 보는 거라곤 지겨운 사내놈들 얼굴과 마물들 뿐.

이렇게 귀티까지 나는 아가씨는 처음이었다.

사내놈들 틈에서 외롭던 주방장 앨마에게도, 전쟁터에서 칼을 쥐다가 지금은 주방 칼을 휘두르게 된 하인들에게도 키리아는 봄바람 같은 손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상쩍어하던 경계심도 확연히 누그러졌다.

“키리아 양. 아침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제가…. 억.”

“에그, 좀 비켜요 로하넨. 자, 아가씨. 배고프죠? 미안해라. 마계초를 없앤다고 내가 그만 손님이 있다는 걸 깜박했지 뭐예요.”

로하넨이 은근슬쩍 키리아 옆에 앉으려고 하자 주방장이 그를 퉁 밀어버리면서 냅킨을 건넸다.

그러자 하인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덩치가 건장한 하인들이 접시와 나이프, 포크, 와인잔 등을 척척 대령했다.

서로 자기가 갖다 주겠다고 밀치기도 했다.

뭐지, 이 군부대 같은 분위기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키리아는 귀족 영애답게 그들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환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방금 마계초를 없앤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뭔지 혹시 여쭤 봐도 될까요?”

“이 성에 난 잡초들을 가리키는 말이라우.”

“아, 저도 봤었는데, 이름이 마계초였군요.”

키리아가 눈을 반짝 빛내자 주방장 앨마가 마계초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여기저기 많이 자라는 잡초인데, 최근 들어 확 늘어났지 뭐유. 아무래도 마물 놈들이 아가씨를 쫓아내려고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아요.”

“아… 그랬군요.”

“아마 내 짐작이 틀림없을 거유. 마계초는 마물 놈들이 아주 좋아하거든. 하지만 사람에게는 안 좋아요.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위험하고.”

서열 조공과 마계초.

이 두 가지가 가울이 준비한 히든카드인 모양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마계초는 마물용 캣닢 같은 거겠구나. 마물들이 좋아하는.’

와이번이 마법사가 아닌 날 납치했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되네.

‘그럼 이걸 이용해서 마물들에게 반격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앨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 배고프실 텐데 얼른 들어요.”

쿵.

거의 세숫대야만한 크기의 접시 위에 통째로 튀긴 닭고기가 나왔다.

“우린 무조건 1인 1닭이지 말임다.”

입을 떡 벌린 키리아를 보고 하인들이 씩 웃었다.

앨마 또한 으하핫 웃었다.

“아끼지 말고 들어요. 우리 공작성이 이래봬도 밥은 안 굶긴다니까. 고기는 얼마든지 있어요!”

“정말요?”

“그럼요. 이 성에 있는 마물들이 전부 살아있는 고긴데.”

“……!”

새파랗게 질린 키리아의 등을 앨마가 팡팡 두드렸다.

“껄껄! 농담이우, 농담! 마물 고기 아니니까 안심해요. 그냥 평범한 닭이야.”

키리아를 안심시킨 앨마가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사정이 급하면 마물 고기라고 못 먹을 것도 없지만….”

“…….”

차라리 못 들은 걸로 하자.

키리아는 닭다리를 양손에 잡고 확 뜯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우아하게 칼질을 시작했다.

‘설마 여기서 치킨을 먹게 될 줄이야.’

현생이 전생이 되어버린 후 처음이었다.

종종 한국의 치킨이 생각 날 때마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이게 뭐라고 가슴까지 떨리냐.’

비록 통째로 튀겨서 옛날 통닭 비주얼이긴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키리아의 떨리는 나이프가 닭다리를 한 점 썰었다.

입에 넣는 순간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키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이런 천지개벽할 맛이 있다니!

‘기가 막히게 맛이 없잖아!’

키리아는 요리에 별 재능도 없고 혀도 예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혹시 튀기기 전에… 양념 같은 건 안 하셨어요?”

“무슨 소리. 들어갈 건 다 들어갔어요. 건강을 생각해서 허브로 숙성까지 했는걸요. 공작님께도 같은 음식을 드리니까 행여 소홀히 대접한다는 오해는 하지 마시우.”

그러면서 앨마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맛이 없어요?”

“으, 음.”

단단한 인상의 할머니가 은근슬쩍 눈치를 보자 왠지 마음이 약해졌다.

“…네. 맛이 없어요.”

하지만 키리아는 소신 있게 대답했다.

곧 공작을 케어할 약제사로서, 환자의 건강에 직결되는 음식을 대충 넘길 수는 없었다.

환자가 잘 먹어야 치료도 빨리 되는 법이다.

리안도 그랬다.

한때 환자식에 질린 리안은 식사를 거부하거나 수저를 일찍 놓았고, 그에 따라 건강도 나빠졌다.

그래서 키리아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이 한국에서 먹던 치킨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완전히 같진 않고 비슷하게 흉내만 냈다. 그런데도 리안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주었다.

‘누나, 이거 진짜 엄청나! 최고야!’

‘아부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단다.’

악플에 익숙한 키리아는 리안의 칭찬을 호들갑으로 여겼다.

어쨌든 그 후로 리안은 다시 입맛을 찾았다. 약도 잘 먹게 됐다.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은 매우 중요해.’

그런 소신으로 솔직히 대답하자 하인들이 헉 숨을 삼켰다.

다들 자존심 강한 앨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앨마의 표정이 조금씩 구겨지고 있었다.

“…아가씨는 남부에서 왔으니 그렇겠지. 유감스럽게도 우리 북부에서는 다들 이런 음식을 먹는다우.”

북부에서는 요리에 쓸 채소와 과일에 보급용 성수를 뿌렸다.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심한 경우 육류에까지 성수를 썼다.

그러다보니 로하넨이 정화를 했을 때처럼, 재료 본연의 맛과 영양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그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었다.

“그건 저도 들었어요.”

“그럼 잘 알겠네요. 이 늙은이의 요리 솜씨는 그만 탓하고 얼른 드시구려. 우리 성에서 음식 낭비는 금물이니까.”

앨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시 삐치셨나…?’

너무 돌직구를 던졌나 싶어 미안해진 키리아는 살살 구슬리듯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전 그저 주방장님의 솜씨가 다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제 솜씨가 다 발휘되지 못하다니요? 아가씨, 지금 이 늙은이를 놀리는 거예요?”

“아뇨. 제 말 뜻은, 식재료 말이에요.”

“음…?”

“식재료가 멀쩡하다면 주방장님의 솜씨가 백 프로 발휘될 거잖아요. 그렇죠?”

앨마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험한 소리 하지 말아요. 좀 맛있게 먹자고 성수를 안 쓰면 그냥 독을 먹는 것과 같아요. 남부 직송의 식재료는 무척 비싸기도 하고….”

“그러니까 성수를 쓰지 않고 식재료를 깨끗하게 만들면 되죠.”

“그런 방법이 있으면 진즉 썼지!”

“제가 알거든요. 그런 방법.”

“……?!”

키리아는 의아해하는 앨마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주방장님, 괜찮으시면 저와 거래 하나 하실래요?”

“…거래요?”

“네. 제가 성수를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그게 마음에 드시면,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세요. 손해는 아닐 거예요. 주방장님도 공작님께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잖아요?”

헉.

키리아의 당돌한 말에 로하넨과 하인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앨마는 전쟁터에서 백전노장으로 활약했다.

공작이 성기사단장직에서 퇴출되자, 본인도 성기사직을 때려 치고 공작을 따라왔다.

그 정도로 충직한 사람이었다.

주방장이 된 후에도 공작을 위해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지금 키리아가 한 말은 그런 앨마의 노력과 자존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저 아가씨, 이제 밥은 다 먹었네….’

하인들은 앨마가 벌컥 화를 내며 키리아를 내쫓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앨마의 눈이 묘한 기대감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만 말투만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흥. 깨끗한 채소를 자라게 하는 마법이라도 부리려고요?”

“전 마법사가 아니라 약제사예요.”

“거 봐요. 괜한 소리로….”

앨마의 핀잔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러니까 중독된 식재료를 해독해주려고요.”

“네?”

전문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

거기다 확신이 가득한 말투.

키리아를 빤히 쳐다보던 앨마는 마침내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식재료를 모두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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