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키리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사람들이 마물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지능 때문이 아니라 힘 때문이다.
당연히 무력 측면에서는 키리아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 이상 가까이 오면… 나,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다 수가 있어. 진짜라구!”
기죽지 않기 위해 큰소리를 쳤지만, 와이번을 겁먹게 한 방법도, 그렘린을 기절시킨 방법도 사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니, 독초를 꺼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이빨에 갈기갈기 물어뜯길 터였다.
“크르르르!”
켈베로스의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뒤이어 세 개의 입어 벌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순간.
“서, 선생님들! 잠깐만요!”
눈을 질끈 감은 키리아가 소리쳤다.
“안 그래도 저 침대 버리려고 했거든요? 아니, 했거든? 개 발자국이 찍힌 침대 따위, 당장 가져가 버려!”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 눈을 꽉 감고 있자니, 가까이에서 느껴지던 입김이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공격태세를 해제한 켈베로스가 흥 콧바람을 내쉬며 침대를 가져가버렸다.
마계 댕댕이 따위에게 침대를 삥뜯기다니!
키리아는 뒤늦게 자존심 상해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조공! 조공!”
“최하위.”
“캬르릉!”
켈베로스가 다녀간 후 그 아래 서열의 마물들이 차례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책상이며 서랍, 옷장, 심지어 세숫대야 등의 세간들이 쏙쏙 사라졌다.
어떤 녀석들은 가구를 가져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부수며 낄낄댔다.
그러니까 이건 마계 방식의 다구리였다. 키리아를 쫓아내려는 괴롭힘이었다.
“조공 어디?”
뒤늦게 도착한 마물들이 텅 빈 방을 보더니 살벌한 눈빛으로 키리아를 쳐다봤다.
뭐라도 내놓지 않으면 팔다리를 뜯어갈 기세였다.
‘나, 진짜 마물 소굴에 들어온 거구나…!’
실감이 제대로 났다.
동시에 키리아의 보랏빛 눈이 독 오른 고양이처럼 이글거렸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괜히 독초를 좋아한 게 아니라고.’
약초와 달리 독초는 죽어도 혼자 죽지 않는다.
“조공 내놔라!”
“없으면 죽인다!”
키리아는 으르릉 대는 마물들에게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 바닥 들어보면 내가 숨겨 놓은 보물이 있어!”
“보물?!”
“내가 먼저야, 비켜!”
마물들은 보물이란 말에 혹해 서로를 밀치며 마룻바닥을 뜯기 시작했다.
거기엔 정말로 나무 상자가 있었다.
“보물이다!”
신이 난 마물들은 서로 상자를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그 와중에 상자의 뚜껑이 벌컥 열리고 내용물이 쏟아졌다.
밀가루 같은 하얀 가루들이 마물들의 머리 위로 뿌옇게 쏟아졌다.
“켁켁! 케흑!”
“이게 뭐지?”
뭐긴 뭐야.
‘메데이아 특제 <온몸에 무좀>약이지.’
마물들이 오갈 때 혹시라도 빼앗길까봐 몰래 숨겨놨던 것이었다.
“가, 가렵다!”
“머리 가려워! 눈 가려워!”
“갸아아악!”
온몸을 미친 듯이 긁으며 벽이며 바닥에 등을 문질러대는 마물들.
키리아는 그 틈을 이용해 약초가방을 끌어안고 방을 후다닥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잠시만요, 이거… 벌써 가버리셨군요.”
로하넨이었다.
그는 키리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겸, 무사한지 확인도 할 겸 방문했다가 조금 전의 광경을 모두 목격했다.
“이건 쓸 필요도 없었군요.”
그는 펼쳤던 성서를 덮었다.
마물들이 키리아에게 해를 가하려 하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꼼짝없이 마물들에게 당하는 것 같던 키리아가, 오히려 숨겨뒀던 약으로 역공을 펼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저렇게 지독한 약을.’
온몸에 무좀이 난 마물들이 가려운 곳을 긁으며 미친 듯이 괴로워하자 로하넨은 연민을 넘어 동정심마저 일어나는 걸 느꼈다.
로하넨은 말없이 성호를 그었다.
저 정도면 독약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온몸에 무좀을 유발하는 약을 상비하고 다니는 약제사라니.
어지간한 괴짜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습관이었다.
‘아니야.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라….’
주군을 위해 사방으로 약제사를 알아봤던 로하넨이었다.
이런 독특한 무좀약을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숙련된 약제사라면 남다른 조제술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이름 정도는 들어봤어야 하는데, 점점 정체가 궁금해지는데요….”
잠시 키리아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던 로하넨은 그녀가 급히 도망치느라 떨어뜨린 종이를 주워들었다.
별 생각 없이 종이에 쓰인 문장들을 읽던 로하넨의 눈이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답을 찾은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그렇구나! 설마 이런 분이셨을 줄이야!”
º º º
어느새 내성 외곽까지 도망친 키리아는 한숨을 돌리기 위해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하, 서열? 조공? 이런 식으로 날 쫓아내겠다 이거지? 내가 어딜 봐서 최하위야? 어?”
키리아는 기가 막혀 성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봤다.
“확 우물에 독을 풀어버려?”
뭉게뭉게 상상을 펼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애꿎은 공작까지 피해를 입으면 큰일 나니까 안 되지.
“좀 더 화끈하고 확실한 방법이 없을까? 콜록콜록.”
갑자기 터친 기침에 키리아는 소매로 입을 가렸다.
뭐지?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든데.
무심코 성벽을 짚는데 뭔가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응? 웬 풀?”
그러고 보니 주변의 풍경이 이상했다.
“이건 좀 심한데?”
곳곳에 잡초 같은 풀이 돋아나 있었다.
성벽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벽틈새마다 전부 잡초들이 돋아나 있었다.
탁한 공기는 이 잡초들 때문인 듯했다.
“으, 어지러….”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쓴 키리아는 잡초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라?”
이제 보니 이거….
“내가 어제 검은 숲에서 채취한 독초랑 같은 거잖아.”
가방에서 어제 캔 걸 확인해보니 과연 똑같은 종류였다.
그렇다면.
이 독초가 자란 곳은 검은 숲과 공작성.
두 장소의 공통점은?
“마물들이 모인 곳….”
그럼 이 독초가 마물들의 먹이인 건 아닐까.
막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 성의 정원 한쪽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몇 개의 점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던 키리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사람이다!
웅크려 있던 그들은 허리를 펴고는 무언가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자리를 옮겼다.
키리아는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몰래 뒤따라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성의 후미진 측문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주방?”
º º º
주방에서 하인들을 지휘하던 주방장이 로하넨의 골똘한 표정을 보다 물었다.
“로하넨, 왜 얼이 빠져 있수?”
“아, 아닙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그거 이리 주세요.”
얼버무린 로하넨은 막 주방으로 돌아온 하인에게서 무거운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잡초들이 한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였다.
주방장 앨마가 투덜거렸다.
“새벽부터 이 독기 뿜어내는 잡초들 때문에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원. 덕분에 아침 식사도 이제야 준비하네요.”
“어쩔 수 없죠. 보통 독기가 아니라 마계의 독을 뿜는 마계초니까. 준비했던 식료품은 괜찮습니까?”
“어휴, 말도 말아요. 그것들 때문에 겨우 구해놓은 남부 채소들이 독기로 퍼렇게 됐어요. 일주일 만에 깨끗한 채소 좀 드리나 했더니 우리 도련님 건강 다 망칠 뻔했어.”
로하넨보다 오래 제논을 모셔 온 주방장 앨마는 공작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일이 잦았다.
그녀의 투덜거림에 로하넨은 쓰게 웃었다.
휘하 영지에서 들어오는 수입 덕분에 고기는 충분했다.
문제는 채소와 과일이었다.
북부에는 아직도 인마전쟁의 영향으로 마기가 가득했다.
마기는 초목은 물론 작물에도 독성을 끼쳤다.
특히 공작이 있는 북부의 중심부는 마계초 때문에 더 심했다.
마계초는 본래 마계에서 자라는 풀이지만, 공작성 주변에 몰려있는 마물들 탓에 성 인근까지 자라고 있었다.
이곳의 작물이 북부의 다른 지역보다 독성이 심한 이유였다.
“안 그래도 마물병 때문에 힘드신데, 조금이라도 독성이 있는 음식을 드릴 수는 없지요.”
앨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충직한 주방장으로서 그녀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이번에도 부탁하우.”
“알겠습니다.”
로하넨이 성서를 펼치자 하인들이 은그릇에 물을 담아왔다.
그 위로 로하넨이 손짓을 하며 기도문을 읊자 성스러운 금빛이 수면에 일렁였다.
물은 곧 희미한 금빛을 머금은 성수로 변했고, 오염된 식재료에 뿌려졌다.
그러자 식재료를 오염시키고 있던 보랏빛 반점이 사라졌다.
동시에, 식재료가 며칠은 지난 것처럼 초라하게 시들었다.
마기와 성력이 충돌한 결과였다.
이렇게 정화된 재료는 독성이 사라지는 대신 식재료 고유의 풍미도 처참하게 망가져버린다.
여러 면에서 걸레짝이 된 식재료를 받아든 앨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고맙수.”
“그… 매번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앨마.”
“싱거운 말은….”
앨마와 하인들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하넨은 씁쓸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식물성 식재료는 모든 음식의 기본인데, 저래서야 무슨 음식을 만들건 아무런 풍미도 살리지 못한다.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군의 건강을 위해서는.
‘안 그래도 요즘 식사량이 확 줄어드셨는데 큰일이군요….’
로하넨의 걱정처럼, 최근들어 공작의 식사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인기 투표 때문이었다.
어제, 제논은 로하넨이 가져다 준 <무덤에서 요람까지>를 읽은 후 굳은 표정으로 보던 페이지를 덮었다.
그러더니 전투 준비를 지시할 때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최신호를 되도록 빨리, 가능한 많이 구해와라.’
‘왜 그러십니까?’
‘메데이아가 연재를 중단했고, 인기 투표가 시작됐다.’
‘연재 중단을요? 확실히 그건 놀랍습니다만….’
인기 투표와 최신호 구매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로하넨의 의문을 짐작한 제논이 말했다.
‘연재 중단의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작년의 치욕을 또 겪게 할 수는 없다. 내가 나서야만 해.’
작년의 인기 작가 후보는 11명.
메데이아는 그 중 11위를 했다.
평소 인기 투표 따위엔 관심이 없던 제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고 뒤늦게 충격을 받았다.
설마하니 메데이아가 꼴찌를 할 줄이야.
대문짝만하게 실린 1위 작가 인터뷰를 보고 난 뒤에는 더더욱 기분이 언짢아졌다.
‘거긴 그녀의 자리야!’
당시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제논은 올해도 같은 충격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연재를 중단한 메데이아에게 조금이라도 응원하는 마음이 닿기를 바랐다. 그래서 반드시 메데이아를 1위로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일단 출판사에 편지를 써야겠군. 순간 운송 스크롤이 남아 있지?’
‘예. 위급상황을 대비해서 구비한 것들이 있습니다만… 지금 쓰시게요?’
‘그래. 지금이 바로 그 위급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