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좋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말했다.
“그대가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십시오.”
“증명을… 어떻게요?”
“7일을 주겠습니다. 버텨보십시오.”
긴 뜻을 함축한 문장이었다.
분명 가울을 비롯한 마물들이 너를 내쫓으려고 수작을 부릴 것이다.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너 스스로 버텨서 능력을 증명해봐라.
그런 뜻이었다.
그의 뜻을 알아챈 키리아는 긴장된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후퇴란 없다.
“좋아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공작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지금부터 7일간, 그대는 나 제논 폰 란페르세가 다스리는 이 성의 임시 약제사입니다.”
“네. 키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키리아. 이제 방으로 가십시오. 청소를 할 임시 시종을 보내주겠습니다.”
제논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키리아가 서 있는 공간이 바뀌었다.
“엄마얏.”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키리아는 잠깐 휘청대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고풍스런 침대와 책상이 있는 아담한 크기의 손님용 방이었다.
“신기한 마법이네. 그런데 손님방이 뭐 이래?”
한숨이 나올 정도로 먼지 쌓인 방이었다.
“윽, 거미줄까지.”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시종을 보내준다고 했었지.
바로 청소부터 시켜야겠다.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키리아는 반가워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와요! 빨리 청소를… 헉.”
“실례한다. 왕의 명령을 받고… 헉.”
두 사람 다 눈을 크게 떴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검은 뿔과 개의 꼬리를 가진, 가무잡잡한 피부의 마족 가울이었다.
키리아와 가울은 서로를 가리키며 동시에 외쳤다.
“네가 왜 여깄어!”
“그쪽이 왜 여깄어요!”
º º º
방으로 돌아온 제논은 자신의 오른팔을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마법을 쓰면 평소보다 피곤하고 오른팔이 욱신거린다.
웬만하면 마법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법을 쓰는 게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건….’
키리아에게 기대어 졸았던 일을 떠올렸다.
“하….”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그것도 흉측한 팔을 드러낸 채로 졸다니.
마나 진단이라는 게 이렇게 효과가 좋고 무서운 거였나.
키리아를 생각하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이상하게 낯익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초면인데 말이다.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노크와 함께 로하넨이 들어왔다.
“주군, 송구한 소식입니다. 납치된 사람이 둘 다 보이질 않아요.”
“상관없다. 한 명은 객실에 있으니.”
“예? 어떻게 된 일이죠?”
“네 공고를 보고 왔다더군.”
제논은 키리아가 성에 잠시 머물게 된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로하넨은 놀라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걸 허락하셨다고요? 주군께서요?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우리가 그렇게 허물없는 사이던가?”
“…아니, 놀라워서요. 외부인을 직접 들이시다니요.”
“시험일 뿐이다. 각오는 있어 보였으니까.”
그런 반응마저 로하넨은 놀라웠다.
이 성에 칩거한 후 주군은 외부인을 만나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래서 외부인과 관련된 일은 전부 로하넨 선에서 처리됐다.
‘그런데 직접 기회를 주시다니?’
정체불명의 약제사에게 기대와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요. 일반인이 마족을 상대하는 건 무립니다.”
“그녀가 상대할 건 마물이다.”
제논은 마물이 들끓는 이 성에서 키리아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물들은 지능이 단순해서 제논이 통제한다 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뭐, 가울도 마족이라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지만.
“부디 큰 소란이 없길 바라야겠군요. 그런데 없어진 다른 한 명은 어떻게 된 걸까요? 마물들에게 숲을 수색해보라고 할까요?”
“그냥 두도록.”
마물들이 자길 찾고 있는 걸 보면, 구조보다는 잡아먹으러 왔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니까.
차라리 찾지 않는 게 돕는 거였다.
“혼자 도망칠 재주는 있는 모양이니 알아서 돌아가겠지. 만약 실패한다면… 예를 다해 장례를 치러줘라.”
“…주군께선 가끔 무서운 소리를 자각 없이 하시는 거 아시죠?”
“뭐가 말이지?”
제논에게 죽음은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죽어서 시체가 되는 것보다, 시체가 됐는데 고깃덩이처럼 썩어가는 것.
전쟁터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무튼 그보다 알아봐야 할 게 있다.”
“네. 말씀하세요.”
“성에 들어온 키리아라는 자의 신원을 알아봐. 용병이라면 의뢰서가 있을 테고 모험가라면 모험가 길드의 자격증이 있을 테지.”
“과거는 신경 안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과거와 신원은 다르다.”
제논은 아까 키리아가 휘두른 풀이 독초인 넘피스 풀이라는 걸 알아봤다.
보통 약제사라면 여행 가방에 약초를 넣지 독초를 갖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더불어, 어설프게 신원을 숨기는 키리아의 태도에 의구심을 느꼈다.
“구체적인 행적은 파헤칠 필요 없다. 하지만 뭘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로하넨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저번 호 잡지였다.
본래는 북부까지 유통이 안 되지만 구하는 방법이 다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해도.
“이번엔 더 오래 걸렸군.”
“죄송합니다. 그쪽에서 실수한 모양이에요. 대신 이번 호는 빠르게 구해서 내일 바로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권태로 나른하던 제논의 표정이 생기로 반짝였다.
그는 익숙하게 잡지 뒤쪽을 펼쳤다. 거기에 원하는 글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
페이지를 확인한 제논이 충격으로 굳어버렸다.
º º º
가울이 못마땅하게 인상을 썼다.
“왕께서 받아준 손님이 누군가 했더니 그게 마나 거지, 바로 너였어?”
마나 거지라니? 제 옷차림은 더 거지같으면서.
가울은 겉으로, 키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다 키리아는 뜻밖의 변화를 깨달았다.
‘…처음보다 안 무섭네?’
가울의 붉은 눈과 분위기는 공작에 비하면 순한 맛이었다.
보스와 중간 보스처럼 레벨 차이가 확 난다고나 할까.
게다가 메데이아를 욕하는 악플러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말본새가 건방지고 약제사 어쩌구 하면서 얕잡아보긴 하지만, 적어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대뜸 부모님 안부를 파헤치지는 않지 않는가.
어쩌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도.
‘이 마족이 성에 있는 마물들의 대장 격이라고 했었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마물들은 문제가 안 된다는 소리였다.
키리아는 가울의 근육으로 탄탄한 팔을 힐끗 훔쳐봤다.
힘으로는 안 되겠고….
독초로 괴롭힐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더 안 좋은 결과를 일으킬 게 뻔했다.
‘결국 꼬드기는 수밖에 없나?’
그건 좀 자신 없는데.
키리아는 원작의 정보를 떠올렸다.
가울은 공작에게 매우 충직한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들에겐 건방지지만 가울의 충성은 진심이었다. 비록 공작이 그걸 알아주는 날은 끝까지 오지 않았지만.
공작이 마룡이 되어 토벌당하자 원작 속 가울은 홀연히 사라졌다.
자신의 모든 소지품과 부하들까지 남겨두고 말이다.
마족이 인간과 다른 점은,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는 단순 무식할 정도로 외골수라는 것이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인간과 달리 그들은 자신이 마음을 준 대상을 절대 저버리지 않는다.
그 대상이 뭐가 됐든.
이를 위해서라면 적과도 얼마든지 손을 잡을 정도였다.
‘좋아. 이 부분을 활용해 보자.’
나와 손을 잡는 게 이득인 걸 알면 거부할 리 없겠지.
“왕께서 무슨 생각이신지는 몰라도 여긴 너 같은 인간이 있을 곳이 아냐. 알아들었어? 날이 밝기 전에 이곳에서 꺼져. 안 그러면….”
말과 함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경고하고 가울이 돌아섰다.
키리아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제 손톱 끝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과연, 공작님이 말씀하신 대로네. 가울이라는 부하에겐 아쉬운 점이 두 가지가 있다더니.”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던 가울의 뒤통수가 딱 멈췄다.
키리아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쫑긋
시큰둥하게 늘어져 있던 가울의 꼬리 끝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
“다른 하나는 바로오오….”
점점 꼿꼿하게 세워지는 가울의 꼬리를 본 키리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이런 개…!”
가울이 홱 몸을 돌리고 제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야, 다른 하나가 대체 뭔데?”
“다른 하나는…. 콜록콜록!”
키리아는 과장스럽게 기침을 했다.
“아, 먼지 때문에 목이 너무 아파.”
“웬 개소리야? 빨리 말하라고!”
“코올록콜록! 켁, 켁.”
격한 기침을 하면서 아예 어깨까지 격하게 들썩였다.
그녀의 발연기에 뭐 씹은 얼굴을 하던 가울이 으르렁거렸다.
“왕이 시험을 내려주셨다고 까부는 모양인데, 그러다 한 대 맞는다 너.”
‘왕이 직접 시험해보는 사람’이라서 가울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놀려먹기 좋은 기회가!
키리아는 다람쥐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때릴 거야? 왕이 시킨 청소도 안 하고 왕의 손님까지 때려버릴 거야?”
“너 인마…!”
가울이 주먹을 휙 들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도발하는 키리아 앞에서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 모습에 ‘꿀잼이네.’ 생각하던 키리아는 진짜로 기침이 터졌다.
“콜록콜록!”
방의 먼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각했다.
키리아의 기침이 이어지자 가울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갈등의 빛을 띠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그러고는 키리아를 옆으로 밀어냈다.
“비켜.”
“엥?”
“왕의 명령이니까 청소한다.”
방으로 한 걸음 성큼 들어선 가울이 돌연 키리아에게 홱 고개를 돌리고는 도끼눈을 치떴다.
“그런데 알아 둬! 네가 하다 만 뒷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야. 절대 궁금한 게 아니라고. 알아들었어?”
신신당부한 가울이 아공간에서 청소 도구들을 꺼냈다.
청소용 마스크까지 꺼내서 착용하는 폼이 제법 능숙했다.
‘뭐야, 진짜 공작성 청소 담당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