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려움과 당황으로 그의 명령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키리아는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동생 리안에게 메두사 병이 나타났을 때.
그때의 리안 역시 가시 돋친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었다.
비록 분위기는 많이 달랐지만 지금의 공작은 리안과 꼭 닮아 있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공작의 숨겨진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날 그렇게 보지 마.
입만 나불거릴 거라면 꺼져.
나한테 상관하지 마.
제발 날 좀…
도와줘.
도와줘, 누나.
“…….”
가늘게 떨리던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츰 차분해졌다.
“그 팔 때문에… 신성력을 받고 계셨던 거군요. 하지만 큰 효과는 없어 보이고요.”
“바깥에서 이 일을 발설하면 죽이겠습니다.”
“그럼 안 나갈게요.”
“…뭐?”
“여기 약제사로 취직하려고 왔거든요, 저.”
키리아는 채용 공고문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 앞에 내밀었다.
공작은 붉은 눈으로 공고문 대신 키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키리아는 금방이라도 저 오른팔이 자신을 찢어발길 것 같은 긴장감이 들었다.
결국 공고문을 자신과 공작 사이에 천천히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남부에서 빚을 지고 북부로 온 거라서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제가 가진 재주가 약학밖에 없어서 난감하던 차에 이걸 본 거죠.”
“약제사를 구하는 다른 곳도 있었을 텐데요.”
“네. 그렇지만 공작님 옆에 있으면 제 행방을 가문에 들킬 위험도 줄겠죠.”
“…….”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지인 백작에게 빚을 져서 북부로 왔고, 이곳에 온 건 숨겨야 했으니까.
“…사정은 묻지 않겠습니다. 그대의 과거가 얼마나 복잡하든 나와 상관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대가 날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걸 보여드리려고요. 그러니까….”
키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남아 있던 두려움을 억눌렀다.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게요.”
양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이면서 공작과 눈을 맞춘 채 천천히 다가갔다.
“…….”
키리아가 한 걸음 다가가자 공작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걸 허락의 의미로 알고 키리아는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을 뗐다.
마침내 공작 옆에 앉자 여태까지 그녀를 주시하던 공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시선을 피했다.
역시 리안을 닮았다.
동생에게 그러듯 무심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손을 저한테 주세요, 공작님.”
“…….”
공작이 멀쩡한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이요.”
“…거절합니다.”
“오른손을 주셔야 제가 통증을 덜어드릴 수 있어요.”
“그대는 약제사잖습니까. 약을 쓰지는 않는 겁니까?”
“약은 필요할 때 쓰고요. 지금은 아니에요. 우선 공작님의 상태를 진단해봐야 되니까.”
“…….”
“어서요.”
거듭 재촉하자 공작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못해 오른손의 검지를 키리아의 손바닥 끝에 톡 걸치는 공작.
길고 날카로운 모양새가 꼭 검은 갈고리 같았다.
“소매 걷을게요.”
키리아는 천천히 공작의 소매를 걷었다.
사람의 피부와는 확연히 다른, 차갑고 단단한 비늘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위협적으로 움직이던 마물의 팔이었다. 언제 돌변해 자신을 해칠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려운 게 당연했지만….
오히려 제 손길을 피해 슬금슬금 뒤로 빼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두려움이 쏙 들어가 버린다.
키리아는 달팽이마냥 소매로 숨으려는 검은 손에 깍지를 꼈다.
“……!”
흠칫한 공작이 키리아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지금부터 마나 진단을 할 거예요.”
“다치고 싶습니까…?!”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마물의 손은 키리아의 손보다 두 배는 컸기에 깍지를 낀 모양새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그에 개의치 않고 키리아는 눈을 감았다.
공작의 몸 곳곳을 돌고 있는 마나가 느껴졌다.
동시에 이질적인 기운도.
인간의 마나와 신성력, 그리고 마족의 마기.
무려 세 개의 기운이 섞이면서 계속 충돌하고 있었다.
‘이런 걸 참고 있었다고? 안에서부터 생살이 터져나가는 느낌이었을 텐데.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진즉 죽었을 거야.’
우선 날뛰고 있는 마기부터 가라앉혀보자.
눈을 감고 집중한 키리아의 이마에서 조금씩 땀이 배어 나왔다.
마기는 처음 다뤄보기에 그녀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작의 마물병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채혈도 해봐야해.’
병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연구과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키리아는 도전의식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진단을 마친 키리아가 눈을 뜨며 깍지 꼈던 손을 뺐다.
“끝났어요. 공작… 님?”
그런데 손이 빠지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공작이 키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었다.
‘어쩐지 중간부터 몸이 좀 무겁다 싶더라니.’
그렇게 아파하면서 으르렁대던 사람 맞나?
리안은 마나 진단을 할 때면 항상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공작도 그런 걸까.
그의 눈 밑에 지층처럼 쌓인 다크서클이 심한 불면증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못 잤으면 경계하던 사람한테 기대서 조는 거야….’
그의 고개가 앞뒤로 꾸벅였다.
그럴 때마다 공작의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였다.
‘…냄새 좋다.’
청량한 향.
바다와 소나무를 연상시켰다.
킁킁….
향기에 홀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자괴감이 들었다.
난 개가 아니다. 개가 되지 말자.
“공작님.”
어깨를 살짝 뒤로 빼면서 공작을 깨웠다.
“일어나세요.”
“…음.”
몽롱하게 눈을 뜬 공작이 몇 번 눈꺼풀을 깜박거리더니 화들짝 놀라 키리아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혹시….”
“조셨어요.”
“혹시 수면제를….”
“안 썼어요.”
급히 오른팔을 소매 안으로 감춘 공작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통증은 좀 어때요?”
키리아가 묻자 제 팔을 내려다보던 공작이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훨씬 낫군요.”
“히힛. 그럼 채용해주실 거죠?”
“아니오.”
“잉?”
뭐라고요?
“그대가 내게 도움이 될 거란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대를 채용하기에는 너무….”
“너무…?”
“귀찮습니다.”
할 말을 잃은 키리아와 달리 그는 하고픈 말을 다 했다는 듯 무표정했다.
…말만 정중하게 하면 다야!
이마에 힘줄이 돋을 것 같은 기분으로 키리아는 웃으며 물었다.
“절 채용하기 귀찮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공작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첫째, 그대는 외부인이니까. 둘째, 그대는 복잡한 사연의 채무자니까, 셋째, 이 이유가 가장 큽니다만.”
“……?”
“내가 받아들인다 해도 어차피 그대 스스로 도망치게 될 테니까.”
“전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제가 왜요?”
그가 담담히 설명했다.
“이곳에는 사람보다 마물이 더 많습니다. 그들은 외부인을 반기지 않으니 그대를 쫓아내려고 할 겁니다. 특히 가울이.”
“가울이라면….”
“머리에 뿔이 난 마족입니다.”
“아.”
그 건방진 녀석.
약제사라고 하니까 대접은커녕 손발을 묶어버렸었지.
“가울은 중급 마족입니다. 이 성의 마물들은 모두 가울을 따르니 그를 제압하면 마물들도 제압한 셈이죠.”
공작이 툭 치면 픽 쓰러질 것 같은 키리아를 훑어봤다.
“검이나 마법을 쓸 수 있습니까?”
“…아뇨. 공작님이 절 해치지 말라고 명령하시면 간단하잖아요? 말 안 들으면 본보기도 좀 보여주고.”
“내가 왜 그대를 위해 그런 귀찮음을 감수해야 합니까?”
“저, 전 손님이잖아요.”
“불청객이죠.”
“납치된 거라고요!”
“그래서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겠다지 않습니까.”
크윽. 너무 정론으로 받아쳐서 할 말이 없다.
공작은 우쭐한 기색이라고는 없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머물기 위해 내 도움이 필수라면, 그대는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겁니다.”
“마물들로부터요?”
“아니. 나로부터.”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공작 자신도 통제하기 힘겨워하던 마물의 팔을 목격했기에, 반박은커녕 허세조차 부릴 수 없었다.
“이제 상황을 이해했을 테니 바깥으로 나가죠.”
아까와 달리 통로에 불을 밝힌 공작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곧은 자세였다.
통증을 가라앉혀 줄 땐 그렇게 편안해했으면서, 이렇게 황당하게 쫓아낸다고?
‘이거 먹튀라고 먹튀!’
종종걸음으로 공작을 따라가던 키리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못 간다고 확 드러누워 버려?
아니면 호신술을 할 줄 안다고 거짓말을 할까?
어떡하지…?
고민하는 사이에 바깥으로 나왔다.
출구 앞에는 공작의 부름을 받은 와이번이 대기하고 있었다.
와이번 옆에 선 공작이 키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그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인상을 쓰고 있던 키리아와 와이번의 눈이 딱 마주쳤다.
흠칫한 와이번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멀쩡히 서 있던 한쪽 발도 뒤로 숨기고 뭐 마려운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왜 저러지?’
의아해하던 키리아는 와이번의 발가락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진흙 같은 풀이 말라붙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베인 상처.
키리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설마 낮의 그 와이번?
‘그렇다면 이 방법이 통할지도.’
키리아는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낮에 썼던 독초를 꺼내며 눈을 치떴다.
“이… 똥싸개!”
끼욱!
황소보다 큰 덩치의 와이번이 깜짝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오오, 통한다!
“더 당해볼래? 어?”
손에 쥔 독초가 칼이라도 되는 듯 앞으로 쑥쑥 내밀며 위협하자, 와이번이 그때마다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공작이 놀란 눈으로 키리아를 쳐다봤다.
단지 풀 한 포기로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와이번을 겁먹게 만들다니? 저 이상한 위협은 또 뭐고?
끼우우!
결국 버티지 못한 와이번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너, 어디 가?”
뒤늦게 공작이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뺑소니치는 와이번이었다.
내가 마물을 이겼어!
승리감에 도취된 키리아는 공작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봤죠, 봤죠? 약제사의 무기는 검이나 마법이 아니라는 거.”
“…약제사가 언제부터 풀을 검처럼 휘둘렀습니까?”
“그 시초를 목격하셨으니 운이 좋으시네요.”
“…….”
티파티 대신 집구석에서 똥머리를 한 채 돌아다니던 키리아를 백작이 희한한 생명체를 보듯 쳐다보곤 했는데, 지금 공작의 눈빛이 그랬다.
다만 조금은 호의적이었다.
“그대는 정말 이상해.”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눈웃음이라기엔 부족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우와.’
신성한데 퇴폐적이다. 아니, 퇴폐적인데 신성하다고 해야 하나?
뜻밖의 눈 호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