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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41)

8화

공작은 낮에 봤던 건방진 마족처럼 붉은 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농도가 짙었다.

‘마족의 눈과 격이 달라! 하지만 공작은… 인간이잖아. 마족보다 더 마족 같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핏빛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그 색은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때 공작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층에 뒷문이 있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그 말에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히꾹.”

깜짝 놀라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자신의 딸꾹질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키리아는 최대한 벽 안쪽으로 붙었다.

그러고는 두 주먹을 방어적으로 움켜쥐었다. 소심한 권투 자세 비슷했다.

‘건드리기만 해봐, 무조건 선빵이야!’

바짝 경계하는 키리아의 모습은 털을 바짝 곤두세운 고양이 같았다.

“…….”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톡.

키리아의 검은 머리 위에 크고 딱딱한 손이 닿았다.

“……?”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무심히 얹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는 공작이었다.

뭐지?

의미는 모르겠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두려움이 좀 가셨다.

그때 공작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어깨에 힘을 빼십시오. 그래야 상대에게 빠르고 강한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어, 존댓말…?”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당황한 키리아는 얼른 사과를 덧붙였다.

“죄, 죄송해요.”

“내가 존대를 하는 게 의외입니까?”

“…네.”

키리아는 공작의 말투가 무뚝뚝하지만 귀에 착착 감기는 부드러운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여유가 조금 생기면서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쪽빛 머리칼.

깊고 진중한 눈매는 권태로움을 띠고 있었다. 짙은 다크서클 때문인지 퇴폐미까지 보였다.

정결하면서도 단단한 이목구비와는 정반대인데도 아름다웠다.

가슴에는 이상한 문신이 새겨져 있는데, 가운을 여며 가리고 있었다.

“…….”

키리아가 가슴께를 응시하자 공작이 말없이 옷깃을 바짝 여몄다.

‘오, 오해신데요! 물론 보기는 좋지만.’

특이한 건 그의 소매였다.

가운의 오른쪽 소매가 손끝을 가리고 남을 정도로 길었다.

‘마물로 타락했다는 신체는 아마 저 손이겠지?’

인마전쟁을 끝냈으나 마물로 타락한 비운의 영웅. 제논 폰 란페르세.

마물로 변한 신체와 함께, 마족과 마물들이 그를 따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마물 공작이라고 불리게 된다.

원작에서 제논은 마물병으로 인한 고통과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을 참으며 자신의 영지를 묵묵히 지켰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전쟁은 분명 끝났는데, 어째서 내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거지.’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북부를 떠나고자 했다.

그걸 막은 사람이 바로 여주인공 릴리였다.

백마법사였던 릴리는 공작의 통증을 상당히 완화해주었고, 덕분에 공작은 충동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원작 후반부에서 마룡으로 변해 황태자에게 토벌 당하고 만다.

‘그 후 마물 공작이 남긴 유언으로 북부의 자원은 릴리에게 전해지게 됐지.’

릴리와 황태자를 띄워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역할.

그 결말을 기억해내니 왠지 찜찜했다.

비록 초반과 후반에만 등장하는 서브남이지만, 나름 애정을 갖고 있던 캐릭터였으니까.

그동안 원작은 신경 쓰지 않고 지냈는데….

‘이번만큼은 안 되겠어.’

와이번도 그렇고, 조금 전의 그렘린도 그렇고, 마물에게 독초가 효과적이라는 걸 확인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독초를 약으로 썼을 때도 마찬가지일 터.

사람을 살릴 방법을 알고 있는데 죽도록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은가?

그리고 어쩌면….

‘릴리한테 줬던 북부의 자원을 나한테 넘겨줄지도 모르고!’

결코 떡고물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응. 아니고말고.

공작은 목숨을 구하고 난 약간의 보상을 얻고.

이게 바로 윈윈이지!

한결 침착해진 마음으로 키리아는 가방에서 공고문을 꺼내려 했다.

일단은 약제사로 채용부터 되어야 하니까.

“공작님, 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네? 아, 네. 움직일 수는 있죠. 그런데 그건 왜…”

“그럼 됐습니다.”

뒷말까지 듣기는 귀찮다는 듯, 공작은 키리아의 옆구리를 잠깐 일별하고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어, 공작님?”

대답도 없이 먼저 방 안으로 향하는 공작이었다.

‘내 말이 맛있냐? 왜 자꾸 씹고 뜯고 맛보는 거야? 공작이면 다냐?’

하지만 어쩌겠어. 지금 아쉬운 사람은 난데.

키리아는 쪼르르 공작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응?’

아주 잠깐, 공작이 비틀거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멀쩡하게 걷고 있었다. 곧게 편 등에서 절도까지 느껴졌다.

‘내가 잘못 봤나…?’

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을 한 번 둘러봤다.

크기에 비해 가구가 적은 썰렁한 공간.

하나같이 낡았지만, 그만큼 고풍스럽기도 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건 책장이었다.

‘책이 굉장히 많네. …어, 저건?’

고풍스러운 책들 사이로 이질적인 뭔가가 보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잡지 같은데? 하지만 북부까지 유통되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이 진지한 공작과는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다.

정말 잡지가 맞는지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책장이 반 바퀴 회전했다.

공작이 책 한 권을 뽑자 책장의 장치가 작동하며 가려져 있던 비밀통로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쪽으로.”

그 안으로 공작이 먼저 들어갔다.

뒤따라 통로로 들어간 키리아는 잠깐 멈칫했다. 통로가 좁은 동굴처럼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키리아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어렴풋이 보이는 공작의 등을 부지런히 쫓아갔다.

그가 성큼 한 걸음을 가면 총총 두 걸음.

‘…이 공작 데이트 해본 적 없을 거야. 백 프로.’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걷고 있는데, 공작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바깥입니다. 축복을 걸어주지 못하는 대신 와이번에 태워드리죠. 다만….”

공작이 걸음을 멈추고 키리아를 뒤돌아봤다.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합니다.”

“……?”

“공작성과 숲이 아주 위험하고 끔찍했다고 소문을 내십시오.”

“네? 어째서요?”

“그래야 숲에 발길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마물들이 납치한 건 모두 숲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었다.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서 숲으로 오는 사람이 없어지면, 납치당하는 사람도 없겠지.

“축복을 약하게 걸라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나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공작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쩐지 그의 숨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진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보호가 맞잖아요.”

“보호가 아니라 경고였습니다.”

그 말을 하고나서 공작은 잠깐 숨이 막히는지 안색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귀찮으니까… 얼른 꺼지라고.”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공작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었다.

단순히 조금 걸었기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저기, 공작님. 괜찮으세요?”

키리아는 그가 신관에게 신성력을 주입받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설마 그 후유증인가?

쿵!

갑작스레 뭔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니 공작이 벽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헉, 괜찮으세요?”

당황한 키리아는 가방 속에서 여행용 램프를 꺼냈다.

공작이 통로에 불을 밝히지 않기에, 자신도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필요하겠지.

램프에 빛이 들어오자 공작이 어깨를 급히 틀었다.

“안 돼, 보지 마십시오… 젠장.”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은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제멋대로 날뛰는 말의 재갈을 잡으려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소매로 가린 제 오른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크윽….”

하지만 이내 고통스런 신음이 터지고, 파르르 경련하는 공작의 오른팔이 괴로운 듯 벽을 벅벅 긁었다.

그 바람에 감춰져 있던 오른팔이 드러났다.

“……!”

드래곤.

보자마자 이 단어가 생각났다.

그의 오른팔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검은 비늘로 뒤덮인 팔은 짐승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전체적인 길이는 왼팔보다 더 길었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갈고리처럼 날카로웠다.

지금 그의 팔은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듯, 혹은 자신이 통제권을 가져가려는 듯 경련하며 단단한 석벽에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공작이 필사적으로 억누른 덕분에 팔의 경련은 이제 잦아들었지만, 통증은 여전해 보였다.

키리아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공작님. 제가 한 번 봐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짧고 강한 돌풍이 불었다.

돌풍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램프를 든 키리아의 손을 쳐냈고, 허공으로 날아간 램프는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훅, 불이 꺼지고 다시 찾아온 암흑.

불을 밝힌 걸 원망하듯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키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확 변했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에 키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바람… 그때 추락하던 나를 구한 사람이 공작님이었구나!’

하지만 방금 전의 바람은 친절하지 않았다.

손등이 바람에 베여 따끔거릴 정도였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어둠 속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내 방을 엿본 일도, 허락 없이 불을 밝힌 일도 넘어가죠. 하지만 이 이상 날 귀찮게 하면 세 번째는 없어.”

정중함마저 사라진 냉랭한 경고.

명령을 듣는 자가 아닌, 명령을 내리는 자로 태어난 지배자의 위압감이 날것처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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