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키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왕의 새 보양식!”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외모는 십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개의 귀처럼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뿔과 꼬리, 그리고 선명한 붉은 눈이 그가 마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키리아의 손목을 휙 잡아챈 가울이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 쥐꼬리만 한 마나는… 어? 피가 나잖아. 다쳤냐?”
가울의 말에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으으….”
키리아가 옆구리에 손을 대고 신음을 흘리자 가울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와이번을 휙 째려봤다.
“왕께 바칠 거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흠집을 내서 데려와? 이깟 일도 제대로 못 해?”
키리아도 짜증과 원망을 담아 와이번을 노려봤다.
키리아와 눈이 마주친 와이번이 다친 다리를 숨기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쩐지 진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가울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설마 급했냐?”
끼, 끼우!
와이번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날개로 열심히 키리아를 가리켰다.
하지만 가울은 이미 시선을 돌린 뒤였다.
“쓸모없는 똥싸개 같으니…. 이봐, 인간, 넌 나랑 가자.”
“악!”
키리아가 뭐라고 항의 할 사이도 없이 냉큼 어깨에 들쳐 메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가울이었다.
그런 가울의 뒷모습을 보며 연신 억울해하는 와이번이었지만, 아무도 와이번의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º º º
쿵!
눈앞에서 시커먼 문이 닫혔다.
“이게 뭐야….”
키리아는 황당한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봤다.
‘일단 넌 보류야.’라며 가무잡잡한 마족이 식량저장고에 집어넣고 간 것이었다.
약제사 모집 공고문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었다.
「풀떼기를 약으로 쓴다는 허풍쟁이들 말이지?」
그러더니 얌전히 나가던 발길을 돌려 키리아의 손발을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니, 약제사라니까 왜 묶어요?」
「난 인간이 싫고 약제사는 인간 중에서도 더 싫으니까.」
「왜요?!」
「약하잖아.」
마족은 시큰둥하게 그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풀떼기가 가득 든 키리아의 가방은 신경도 안 쓰는지 내버려 둔 채였다.
처음 보는 마족에게 바짝 얼어 있던 키리아는 그가 나간 문에 대고 묶인 손으로 감자를 먹였다.
“내가 죽으면 너도 데려갈 거야, 이 나쁜 놈아! 아야야….”
혀의 마비는 풀렸지만 옆구리 상처가 계속 아팠다. 다행히 피는 조금씩 멎고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내뱉은 키리아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가방 쪽으로 기어갔다.
“풀떼기, 무시, 했겠다, 두고 보자….”
약제사의 가방에는 약초만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약을 제조할 때 쓰는 도구와 함께, 약초를 다듬을 때 쓰는 날붙이도 들어있었다.
키리아는 칼을 꺼내 손목의 밧줄을 살근살근 자르고, 발목의 포박도 풀었다.
그 후 옆구리의 상처를 붕대로 감은 뒤 벽에 기대어 간신히 숨을 돌렸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응급처치를 하고 나니 비로소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키리아는 바닥에 버려진 약제사 채용 공고문을 집어들며 볼멘 목소리로 투덜댔다.
“이걸로 다 잘 될 거라곤 기대도 안했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무시를 당할 줄이야….”
분명 공작의 직인도 찍혀 있었다.
게다가 마나가 풍부한 인간을 실제로 납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공작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약제사로 왔다고 하면 어느 정도 통할 줄 알았는데.
“혹시 부하이긴 해도 마족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가?”
그렇다면 공고문을 무시한 것도 이해가 된다.
원작을 읽었다고 해도, 그건 릴리 중심의 이야기일 뿐, 서브남인 마물 공작에 대한 정보는 드러나지 않은 게 많았다.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뭐, 어쩌겠어, 읽은 지 몇 년이나 지난 건데.’
어쨌든!
메두사 병을 치료할 독초 연구와 공작령의 노다지를 발견하려면 이 성에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사원이 아니라 사장한테 직접 채용해달라고 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 여길 탈출해야 한다.
“어디 보자….”
키리아는 가방을 뒤져 휴대용 램프와 독초 한 다발, 그리고 독초를 연구할 때 쓰는 방독 마스크를 꺼냈다.
“연구를 못 한 게 며칠째야, 정말.”
작게 투덜거리던 키리아는 이내 방독 마스크를 쓰고 식량저장고에서 탈출할 준비를 했다.
º º º
철컥.
밤이 되자 잠긴 문이 열리더니 초록 피부의 마물이 들어왔다.
“끌고 와, 인간, 끌고 와, 인간.”
땅딸막한 그렘린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잘린 밧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인간, 어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렘린이 킁킁 이상한 향을 맡았다.
“냄새, 무슨?”
의문을 표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쿵 쓰러지는 그렘린이었다.
그제야 문 뒤에 숨어 있던 키리아가 나왔다.
방독마스크를 쓴 채, 기절 효과가 있는 독초를 램프로 태우면서.
“와이번도 그렇고, 아무래도 독초가 마물들에게 아주 잘 듣는 것 같은데?”
본래는 즉효성의 독초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효과가 빠르다니.
이걸 좀 더 연구한 뒤 잡지에 칼럼을 실으면….
‘아니야, 지금은 잡지 같은 데 한눈 팔 때가 아니지.’
키리아는 서둘러 식량저장고를 빠져나왔다.
º º º
성 안은 어두웠고 사방이 조용했다.
넓은 간격으로 촛불만 밝혀져 있었다.
‘공작의 방은 2층에 있으려나?’
키리아는 유독 깜깜한 층에 도착했다.
어두운 고성의 복도는 뭔가가 튀어나올 것처럼 스산했다.
‘안 무섭다. 난 안 무섭다. 이건 그냥 어두운 거야….’
자기암시를 하며 차가운 벽에 바싹 붙어 조심조심 전진하던 키리아의 눈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하나 보였다.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력을… 할게요. …습니까?”
혹시 공작의 목소리일까?
키리아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과연 가난한 귀족답게, 오래된 목재 문에는 가느다랗게 갈라진 틈이 있었다.
그곳을 통해 아주 일부나마 안쪽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허리끈을 풀고 한쪽 옷깃을 당기자 넓은 어깨와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드러났다.
그리고 가슴과 등으로 이어진 복잡한 마법진과 수식들.
‘저게 뭐야?’
남자의 탈의 장면에 움찔 놀란 키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상체를 반쯤 드러내자 하얀 케이프를 걸친 신관이 그의 등에 손을 갖다 댔다.
곧이어 신관의 손에서 하얀 빛이 맺히더니 남자의 몸에 스며들었다.
“으윽!”
남자는 고문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괴롭게 신음하며 이를 악물었다.
깜짝 놀란 키리아가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더 엿보는 건 그만둬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뒤로 물러나던 키리아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저게?’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신성력을 주입받는 남자의 몸에서 키리아가 늘 봐왔던, 그러나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빛 얼룩이 번져가는 피부.
만지면 분명 돌처럼 딱딱할 것이다.
저건 석화 반응이니까.
메두사 병에 걸린 리안을 돌볼 때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던 현상인데 저게 왜 남자의 몸에…?
키리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신관의 신성력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석화 반응도 사라졌다.
등에서 손을 뗀 신관이 남자의 상의를 입혀주고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니 신성력을 받은 남자는 공작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숨을 고른 공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로하넨. 오늘 또 누군가가 납치되어 온 걸로 아는데.”
“예. 두 명입니다. 주군의 치료부터 마친 뒤에 조치할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가서 풀어줄까요?”
두 명?
“그래. 뒷문으로 도망치도록 틈을 만들어줘.”
“네. 늘 그랬듯이요. 마물이 붙지 않도록 축복도 걸겠습니다.”
역시, 공작은 납치된 사람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내고 있었다.
‘전직 성기사단장답네.’
그때 신관이 우려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주군. 탈출한 사람들은 제가 몰래 축복을 해줘도 숲을 통과할 때 고생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마을에 소문이 안 좋게 돌더군요.”
“그런가?”
“예. 더 강한 축복을 걸어야겠죠?”
“약하게 해.”
…응?
“목숨만 붙어 나가면 되니까.”
“저기, 주군? 영지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더 안 좋게 돌 텐데요.”
“상관없다.”
“전 있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나른하게 말했다.
“난 없는데. 내가 그대를 따라야 하는 건가?”
“…됐습니다. 항상 저만 진심이죠.”
신관은 꼭 삐진 것처럼 답하고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신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키리아는 얼른 벽 쪽으로 붙었다.
곧 문이 끼익 열리고, 신관이 어두운 복도를 지나 사라졌다.
‘휴. 조금만 늦었으면 들킬 뻔했네.’
그나저나….
복도가 이렇게 어두웠던가?
벽에 램프가 있나 확인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뒤늦게 흠칫했다.
복도가 어두운 게 아니었다.
큰 그림자가 자신을 뒤덮고 있었다.
“……!”
기척도 없이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