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무슨 수로?”
백작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북부에서 벌려고요.”
“뭐? 파하하하핫!”
잠시 긴장했던 백작은 북부라는 말을 듣자마자 폭소했다.
“네가 집구석에만 박혀 있다고 해도 기본 정세 정도는 듣고 사는 줄 알았는데, 영 아니었나 보구나?”
“…….”
“제국에서 유일하게 세금을 걷지 않는 땅이 있다. 어딘지 아느냐?”
“북부죠.”
“그래. 북부다. 그 이유는 알고?”
“마족, 마물들과의 전쟁터였으니까요. 몇 년이나 북부에서 전쟁을 벌인 탓에 황폐해졌다고 들었어요.”
“그걸 알면서 그러느냐? 북부는 황제 폐하께서도 포기하셨을 정도로 척박하고 가난한 곳이다. 앞으로도 점점 심해질 거고. 그런 곳에서 무슨 돈을 벌겠다는 거냐?”
물론 백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키리아는 북부의 숨은 가치를 알고 있었다.
‘마물 공작이 다스리는 공작령은 전무후무한 노다지라는 거.’
원작과 동떨어져서 살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던 설정이었다. 꿈을 꾼 충격으로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북부로 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동생의 병을 치료할 연구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도 백작에겐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클로버필드 가문은 상대와의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죠?”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백작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의를 기반으로 상단이 성장했고 마침내 귀족이 된 가문이니까. 무엇보다 신의가 중요하지.”
“그러면 제게 신의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
“…….”
백작은 더없이 진지한 키리아의 얼굴이 낯설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이 딸은, 엉뚱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이렇게 날카롭고 이지적인 분위기로 변할 때가 있었다.
특히 연구에 집중할 때면 더 그랬다.
그에 비해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노릇이긴 했지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평소 앞머리를 까고 다니는 행태를 보면 찜찜하긴 해도, 지금 모습을 보니 그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무엇보다 ‘마지막 신의’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음….”
백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몇 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백작이 입을 열었다.
“1년이라고 했지?”
“네.”
“좋아. 1년 안에 돌아와서 네 말을 증명하거라. 만약 실패한다면 가문의 가주이자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로, 네 결혼을 결정지으마.”
“만세!”
기쁨의 함성을 지른 키리아는 백작의 두꺼운 목을 답싹 끌어안았다.
놀란 백작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손까지 허공에 멈춘 채였다.
하지만 기뻐하는 키리아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팔을 풀고 평소의 거리로 되돌아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북부로 출발하는 건 다음날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북부에 웅크리고 있던 한 사람의 운명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º º º
깊고 어두운 밤.
북부의 공작성은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가 잠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작성의 사람들, 그리고 인외의 존재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두꺼운 문 안쪽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때문이었다.
“크으윽… 흑…….”
고집스럽게 이를 악물었음에도 참을 수 없이 몰려오는 통증.
공작성의 주인은 치료를 받고 나면 항상 이렇게 앓았다.
그럴 때마다 침실 앞을 지키는 두 수하는 애가 탔다.
특이하게도 한 명은 인간, 다른 한 명은 마족이었다.
“…후우. 주군의 고통을 내가 덜어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로하넨이 안경을 올리며 한탄했다.
그는 하얀 케이프를 걸친 신관으로, 한쪽 팔에는 늘 교단의 교리와 신성 마법을 기록한 성서를 끼고 다녔다.
일정 주기마다 자신의 주군인 공작을 치료해주는 자이기도 했다.
사실 그저 신성력만 불어넣어 주는 것이기에 ‘치료’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 공작의 상태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네놈의 치료는 왕을 더 약하게 만들 뿐이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십대 후반의 소년이 신관을 조롱하듯 픽 웃었다.
그의 외형은 평범한 인간과는 많이 달랐다.
어두운 색의 피부.
개의 귀처럼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은 한 쌍의 뿔과 긴 꼬리,
마족 중에서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다는 헬하운드 일족의 전사, 가울이었다.
그가 마족 특유의 붉은 눈으로 신관을 노려봤다.
“왕을 위한다면 그 더러운 신성력 주입부터 당장 멈춰. 네가 그 짓을 할 때마다 왕께서 고통스러워하시잖아!”
“신성력이 더럽다니요? 신성력은 고통이 아닌 가호를 주는 힘입니다만.”
성서를 든 로하넨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가울의 꼬리털이 바짝 곤두섰다.
저 안경 샌님 신관은 겉보기와 달리 신성력이 강해서 갖고 다니는 성서에까지 신성력이 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신성력이 발현되는 순간 가울 역시 강력한 마기를 발산할 것이다.
그걸 아는 로하넨이 손에 힘을 뺐다.
“하아. 그쪽이 주군의 고통을 직접 덜어드릴 게 아니라면 가만히나 계시길. 안 그래도 약제사 모집 공고를 냈으니까 행여라도 해코지 마시고요.”
“약제사라니, 풀을 약으로 쓴다는 자들? 다 사기꾼들 아니야? 너희 인간들처럼.”
“…마족에게 들을 말은 아닌데요. 그럼 주군도 사기꾼이란 말입니까?”
“아니, 왕은 예외야. 아주 강하고 멋진 마족이시라고. 왕의 눈을 봤으면 너도 알 텐데?”
“네, 저도 봤죠. 불결한 힘이 주군을 괴롭히고 있는걸.”
“뭐라고?”
주변 공기가 가울의 손바닥 위로 빨려들더니 검은 마기가 형성됐다.
로하넨도 성서를 펼쳐 신성력을 드러냈다.
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로하넨은 전쟁터에서도 활약한 상급 신관이지만, 가울 역시 중급 마족이었다.
가울이 열 받아서 날뛰기라도 하면 이 오래된 성은 반파되어버릴 것이다.
‘게다가 마물들까지 보복에 나서겠지….’
공작성에는 인간보다 마물이 훨씬 많았다. 아무리 상급 신관이라도 수적 열세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가울 또한 안 그래도 왕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제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로하넨과 가울로 대표되는 공작성의 가신들과 마족들은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입씨름이라도 하는 수밖에.
“빌어먹을 안경! 쭉정이! 잔소리만 많은 약골!”
“하아, 주군을 모시는 자로서 품위를 지키세요. 정말 상대도 하기 싫을 정도네요.”
그때였다.
쾅!
둘 사이에 있는 두꺼운 침실 문짝이 벼락같은 굉음을 냈다.
그 말없는 호통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닥치고 둘 다 꺼져라.
“…….”
합죽이가 된 로하넨과 가울은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가울과 거리를 유지한 채 걸어가던 로하넨이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전 주군을 모시는 신관이자 부관으로서 할 일을 하겠습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나야말로 왕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안 해.”
“좋아요.”
갈림길 앞에서 로하넨이 당부하듯 말했다.
“그럼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겁니다?”
“너나 잔소리하지 말라고.”
로하넨은 불안한 눈빛으로, 가울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그러다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군의 고통을 줄여 줄 약제사가 필요해!’
로하넨이 성서를 꾹 쥐며 생각했다.
‘왕의 보양식이 될 인간이 필요해!’
꼬리를 빳빳이 세운 가울이 생각했다.
주군을 위한 로하넨과 가울의 동상이몽.
키리아가 북부에 도착하기 약 한 달 전의 일이었다.
º º º
“이거 정말 화염구슬이에요?”
“그럼요.”
“우와, 이런 마도구는 도시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요.”
키리아는 가판에 있는 붉은빛의 구슬들을 보며 감탄했다.
상인은 우쭐함과 한탄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여기가 그 유명한 마물 공작의 영지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니까 그렇죠. 저기 저 평원 너머의 시커먼 숲 보이시죠?”
그가 가리킨 곳에는 한낮에도 어두워 보이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공작성 주변을 둘러싼 검은 숲이죠. 여긴 그나마 조용하지만, 저기 근처에만 가도 마물이 나와요. 그러니까 다들 호신용으로 화염구슬 하나씩은 갖고 다녀야 해요.”
“아아….”
키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며칠 전, 키리아는 클로버필드 백작이 붙여준 호위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하지만 북부에 도착한 뒤에는 호위를 모두 돌려보냈다.
계속 데리고 있다간 일거수일투족이 백작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북부도 못마땅해하셨는데 마물 공작에게 간다는 걸 알면 당장 집으로 끌고 오라고 하셨을 거야.’
백작은 북부의 지배자인 마물 공작을 회생 불가능한 가난뱅이로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호위를 좀 더 데리고 있는 건데….’
잠깐 후회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드디어 저 검은 숲 중심에 있는 공작성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여행자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키리아는 피곤에 절은 제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집구석을 선호하는 인간이 반강제로 여행길에 올라 기력을 쭉쭉 빨리면 이런 몰골일 것이다.
“마물들에게 많이 시달렸나 보죠?”
“네. 합승 마차를 타면서 몇 번이나요.”
“운이 좋았구만.”
“이게요?”
“다친 곳이 없잖소.”
“…….”
그것도 그러네.
호위에 둘러싸여 북부 경계에 들어설 때까지는 마물 구경도 못 했다.
사정이 달라진 건 호위를 보내고 북부 경계를 넘어가면서부터였다.
마물들이 갑자기 나타나 마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작성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마물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보였다.
바로 이전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마물을 참새 보듯 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한데?’
마물이 많이 나타나는 곳일수록 더 혼란스럽고 피폐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북부 외곽보다 이곳이 더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마물들에게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저 검은 숲에 마물들이 그렇게 많아요? 공작님이 토벌은 안 하시나요?”
“몸이 마물로 변했는데 토벌은 무슨.”
북부의 마물 공작.
위험한 마물들이 들끓는 북부를 다스리는, 반인반마의 남자.
그가 처음부터 마물 공작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전직 성기사단장이었던 데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소드마스터라고 하던데요. 게다가 인마전쟁을 끝낸 영웅이고요.”
“큼. 그건 그렇지만….”
상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인마전쟁.
오직 절망뿐이던 인마전쟁을 끝낸 사람은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성기사단장이었다.
그가 성검으로 마족과 마물이 쏟아져 나오던 마계 입구를 봉인한 것이다.
그게 벌써 2년 전.
하지만 아무리 강한 그라도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마계 봉인 직후, 그의 신체 일부가 마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