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가족 할인은 없나요?”
키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족 할인은 없고 가족 배송은 있다.”
백작이 집무실 한쪽에 있는 괘종시계를 눈짓했다.
“저녁 7시까지 결정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은 자작가에서 먹게 될 테니까.”
“무슨 그딴 서비스가 있어요? 완전 악덕 상인이네!”
경악한 키리아가 마음의 소리를 내질렀음에도 백작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2시간 남았다.”
“꺄악!”
마치 살인 예고라도 들은 사람처럼 비명을 지른 키리아는 청구서도 초상화도 다 내팽개치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아이쿠!”
문이 벌컥 열리자 밖에서 흥미진진하게 엿듣고 있던 하녀들이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그 광경에 열이 뻗친 키리아는 발을 쾅쾅 굴렀다.
“지금 이게 재밌어요? 셋 셀 동안 안 사라지면 모두 해고예요. 셋셋셋!”
“죄, 죄송합니닷!”
하녀들이 겁에 질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키리아는 씩씩거리며 제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스트레스가 치솟는 바람에 생각마저 엉켜버렸다.
이럴 때면 늘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다양한 독약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발저림 약, 가려움 약부터, 맡으면 기절시켜버리는 향의 배합까지.
이승과 작별시켜버리는 약을 만드는 건 의외로 쉽다. 진짜 어려운 건 다양한 효과를 일으키는 특수 독약이었다.
키리아의 손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휴우.”
독약을 수북하게 만든 후에야 기분이 조금 풀렸다.
잠시 후, 독약을 안전하게 처리한 키리아는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두 개의 선택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늙은 두꺼비 남편과 전생에서도 만져본 적 없는 4억 골드.
“빙의했다고 좋아한 과거의 나에게 독약을 먹이고 싶다….”
이럴 줄 알았다면 원작에 끼어들어 서브남이라도 꼬실 걸 그랬나?
“씨… 내가 잘도 꼬셨겠다.”
빙의 전에도 꼬셔본 상대라고는 길고양이가 전부였다.
그 외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건 키리아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
하물며 사람을 뜻대로 꼬신다는 건 어불성설, 말도 안 됐다.
“차라리 약초를 꼬셨으면 꼬셨지.”
사람 꼬시기에 재능이 있었다면 키리아의 주된 활동 공간은 연회장이었을 것이다. 혼자가 편한 연구실이 아니라.
그런데 빙의 후 키리아가 방구석 집순이가 되었어도, 주변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결국 저렇게 됐군.’
…이런 덤덤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빙의 전의 자신과 원작의 키리아는 둘 다 방구석 성향이었던 모양이다.
키리아는 새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솜사탕마냥 복슬복슬한 흑발과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
살짝 새침한 눈매는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키리아 클로버필드.
<릴리의 세계>라는 소설 속 한 줄짜리 엑스트라.
<릴리의 세계>는 가난한 남작 영애 ‘릴리’가 황태자의 불치병을 치료하면서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이었다.
원작의 키리아는 프롤로그인 성년식 기념 연회에 등장한다.
대사는 딱 한 줄이었다.
의기소침한 릴리에게 던지는 조롱.
“어머. 저 조랑말 같은 꼴 좀 보라지?”
이게 끝이었다.
키리아는 여느 영애들이 그렇듯 잘생긴 황태자를 흠모했다.
그래서 황태자의 시선이 릴리에게 머무르자 그에 질투했던 것이다.
하지만 빙의 후의 키리아는 뭐가 뭔지 몰랐다. 정신 차려보니 주변이 호화찬란한 연회장이라서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했다.
그래서 릴리를 보고 속마음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우와, 완전 예뻐….”
하필 릴리가 등장하면서 주변이 조용했던 탓에 중얼거림은 사람들에게 잘 들렸다.
릴리에게도 아주 잘 들렸던 모양이었다. 키리아를 향해 고마운 듯 아름답게 미소 지었으니까.
그 미소는 모두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계기로 릴리는 연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연회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고 키리아의 원작 개입도 끝났다.
원작과 달리 황태자가 키리아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별달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후 키리아는 자기 삶을 살았다.
릴리의 사랑놀음은 프롤로그 후 몇 년이 지나야 시작될 테니 딱히 볼 것도 없었고….
게다가 약초학이란 게 너무 재미있었다.
성년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지만 남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 서적의 오류까지 잡아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거기엔 키리아 본인의 재능과 백작의 자금 지원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원동력은 따로 있었다.
“아우… 못생긴 걸 봤더니 눈이 아프네.”
문득 두꺼비 자작의 초상화를 떠올린 키리아는 두 눈을 비볐다.
“안 되겠다. 안구 정화하러 가야지.”
키리아가 가출한 넋을 주섬주섬 모으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키리아 아가씨!”
하녀가 빠르게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리안 도련님께서 다치셨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다 넘어지셔서….”
“뭐?”
안 그래도 동생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상처 소독은 해놨어?”
“아뇨, 해드리려 했지만 아가씨께서 오시길 고집하셔서요.”
“그래, 알았어.”
저택의 사용인들은 리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키리아에게 달려왔다.
리안이 가장 먼저 찾고, 또 리안이 다치면 가장 빨리 해결해주는 사람이 키리아이기 때문이다.
그 ‘빠른 해결’이 키리아의 약제사로서의 능력 덕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키리아는 ‘약학을 좋아하는데 성과는 시원찮은 아가씨’일 뿐이었으니까.
º º º
“리안, 괜찮아?”
리안은 늘 그렇듯 커다란 침대와 대비되는 작은 몸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키리아가 나타나자 리안이 활짝 웃었다.
“누나!”
반가워하는 얼굴에서 꼬리를 붕붕 흔드는 리트리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머리와 눈동자 색이 같은 친남매.
12살이나 차이 나지 않았다면 쌍둥이라는 소리도 들었을 거다.
리안은 키리아를 답싹 끌어안고 볼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다친 곳은 괜찮아?”
“응. 많이 안 다쳤어.”
“설마 또 기사 놀이 하다가 혼자 넘어진 거야?”
“아, 아닌데?”
“정말?”
키리아가 뒤에 있는 하녀를 돌아보며 리안의 말이 사실인지 물었다.
입을 열려던 하녀는 리안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고는 얼른 방을 나갔다.
‘이르면 재미없을 줄 알아.’
누나에겐 못난 모습을 죽어도 보이기 싫어하는 도련님의 협박을 알아들은 것이다.
리안은 키리아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방싯 웃었다.
‘아, 역시 눈이 정화된다.’
키리아는 흐뭇하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안. 이제 누나 놔 줘. 그래야 상처를 봐주지.”
“…치.”
리안이 끌어안은 팔을 풀고 다친 팔을 내밀었다.
하얗고 마른 팔에 제법 길게 긁힌 상처가 있었다.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중이었다.
“누나, 마나 진단 해줘.”
“그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해주라. 응?”
“으이그.”
동생의 어리광에 하는 수 없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리안의 손을 깍지 끼고 마나를 감지했다.
혈관처럼 흐르는 리안의 마나를 탐색한 뒤,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내 막힌 곳은 뚫고, 느린 곳은 원활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리안의 상처에서 몽글몽글 나오던 피가 천천히 멎었다.
“자, 끝.”
“진짜 편안하고 기분 좋아… 누나는 마법사 같아.”
“마법하고는 다르지. 난 마법을 못 쓰니까.”
“그래도 마법사보다 더 대단하다니까? 훨씬!”
“그렇게 말해주는 건 너뿐이다.”
리안의 호들갑에 작게 웃으면서 키리아는 리안의 상처를 소독했다.
그러고는 방에 있는 벽장에서 상처약을 꺼냈다.
진통과 지혈, 소염 효과가 있는 끈끈이풀과 하라핀 열매로 만든 연고였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약을 쓰지 않고 직접 만들어서 쓰는 이유는 단 하나.
훨씬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면봉으로 약을 발라주는 키리아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난 크면 기사가 될 거야.”
“좋은데?”
“그래서 누나랑 결혼할래.”
“남매끼리는 결혼 못 해.”
“왜?”
“그게 법이야.”
“왜 법인데?”
“어, 안 좋은 일이니까.”
“왜 안 좋은데?”
무섭다. 꼬마들의 ‘왜?’ 콤보 공격….
천재 약제사지만 그 외엔 겸손한 누나의 지식을 벌써 들킬 수는 없었다.
키리아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리안 경은 왜 이런 상처가 났을까? 혹시 또 누나 말을 안 듣고 침대에서 혼자 일어났던 걸까?”
“그, 그치만 자주 움직여주면 나을 거 같아서….”
움찔한 리안이 이불을 걷어 보였다.
리안의 두 다리는 딱딱한 돌로 변해 있었다.
“집사가 그랬는데 다리를 못 쓰는 사람들은 계속 움직여 줘야 된대.”
“…….”
차마 소용없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이미 리안의 다리는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는 돌이었으니까.
키리아는 이 병을 메두사 병이라고 불렀다.
메두사 병은 세상에 전혀 알려진 바가 없던 병이었다.
처음 보는 병증이라 그런지 이름난 의사와 신관들이 한동안 저택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치료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저주라고 주장하자 저택에 발길이 끊기더니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키리아였다.
메두사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힘들다거나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고 어리광만 늘어나는 동생을 보면 항상 가슴이 아팠다.
전생에 두고 온, 몸이 약한 동생과 닮은꼴이라 더욱 그랬다.
시간이 필요한 키리아의 연구.
그 연구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리안의 메두사 병 때문이었다.
‘석화가 점점 상체로 올라오고 있어. 저게 심장까지 가기 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해!’
기존의 약재로는 효과가 없어 밑져야 본전인 심정으로 독초에 손을 댔다.
그런데 반응이 왔다.
어떤 약초를 써도 무감각했던 리안의 다리가, 독초로 만든 약에는 따끔함을 느낀 것이다.
메두사 병을 치료할 희망이 독초에 있었다.
그때부터 집중해서 파고들다 보니 어느새 독초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제국에서 독초에 대한 인식은 최악이었기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메데이아라는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냈다.
전생의 용어로는 부캐였다.
키리아는 메데이아로서 연구를 발표했고 아주 가끔은 쓸 만한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진짜 독초를 연구하려면 여기 남부가 아닌 북부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