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또 파혼이야?!”
벼락같은 노호성이 저택을 쩌렁쩌렁 울렸다.
쨍그랑.
복도의 꽃병까지 때마침 떨어졌다.
꽃병을 닦던 하녀가 깨진 조각들을 주우며 소리가 난 문가를 힐끔거렸다.
노호성은 그 문,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상대 가문에서 보내온 파혼 요구서를 테이블로 던지며 백작이 소리쳤다.
그 시선을 회피한 키리아가 손가락 세 개를 슬그머니 들어 보였다.
베일 듯 각이 잡힌 백작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키리아는 딴청을 피우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지금 입 열어봐야 좋을 게 없지.’
과연, 백작은 한참 씩씩거리다가 애써 분을 누그러뜨렸다.
“그래, 이번엔 이유가 뭐냐. 뭐 때문에 그쪽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나오는 게야?”
“전 그냥 평소대로 했어요.”
“평소대로 뭘!”
“약초 연구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연구를 할 때 머리카락을 둥글게 틀어 올리고 앞머리를 깐 완벽한 집순이의 모습이었고, 연구 중인 약초는 고약한 거름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거기다 연구 중에 몇 번의 폭발이 있었다는 사실만 생략했을 뿐.
그리고 ‘그 해괴망측한 일을 당장 그만두시오!’ 라는 말을 무시했더니 그쪽에서 바로 파혼을 요청한 것이다.
키리아는 무고한 사람처럼 억울해했지만, 백작은 이런 경험이 벌써 세 번째였다.
키리아가 뭘 생략했는지 안 보고도 훤했다.
“약혼했으면 신부가 될 준비를 해야지, 약혼 전처럼 연구만 하면 어떡하느냐?”
“낮에는 그쪽 가문에서 요구하는 예법 수업을 받았거든요. 그 외의 시간을 제 맘대로 사용도 못 하나요?”
“연구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건 절대 안 돼요!”
백작의 질책이 시작된 후 키리아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그 기세에 백작이 뺨을 씰룩였지만 키리아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전 연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백작님도 그 이유를 아시잖아요?”
“크흠….”
아버지를 백작님이라고 칭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백작은 키리아의 말에 다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조금 전과는 역전된 상황이었다.
키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웃었다.
‘좋았어.’
이걸로 또 연구할 시간을 벌 수 있겠지?
키리아는 성년식을 치른 이듬해에 혼처를 소개받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싫은 건,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연구에 너무 큰 제약이 생겨버린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나는 독초를 집중 연구하고 있으니까, 들키면 사악하다느니 뭐니 온갖 소문들로 시끄럽겠지.’
그래서 최대한 결혼 시기를 늦추려 했지만….
‘너도 이제 다 컸으니 투자금을 회수해야겠다.’
‘투자금이요?’
‘네 양육비 말이다.’
백작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을 땐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언 클로버필드가 키리아의 계부라고는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제국법상, 아버지는 자식을 강제로 결혼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귀족 영애라면 가문을 위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 숨통을 위해선 결혼은 최대한 나한테 무관심한 사람과 해야 해.’
다만 지금 하는 연구만은 어떻게든 끝을 보고 싶었다.
아니, 끝을 봐야만 했다.
거기에 필요한 건 딱 하나, 시간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결혼을 늦추고 싶었다.
상대가 먼저 파혼하도록 유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세 번이나 파혼한 키리아는 이제 귀족들의 결혼 시장에서 기피 대상 1호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키리아는 조금 여유롭게 생각했다.
‘결혼도 장사인데, 뼛속까지 상인인 백작님이 손해 보는 결혼을 시킬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 내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적어도 1, 2년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백작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큰 그림.
이게 바로 카운터지.
아, 너무 완벽해. 정말 천재적이야!
하지만 웃음이 새어 나가면 일을 망칠 테니 키리아는 단호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백작님? 지금 뭐 하세요?”
갑자기 백작이 입을 꾹 다물더니 책상에 앉아 뭔가를 부지런히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백작님?”
대답 대신 백작은 두꺼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입 다물고 대기하라는 뜻이었다.
“…….”
키리아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맞은편 벽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럴 시간에 연구를 하는 게 백 번 나은데….’
하릴없이 손가락만 꼼지락대던 키리아는 급기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쿵.
무언가를 내려놓는 묵직한 소리에 키리아는 퍼뜩 잠에서 깼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백작.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정체 모를 물건들.
“……?”
키리아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백작을 쳐다봤다.
엄격하고 근엄한 얼굴. 거기다 근육질의 거구인 백작은, 상단을 운영하는 귀족이라기보다는 용병왕에 가까워 보였다.
상대로 하여금 없던 예의도 차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압감 넘치는 외모라는 뜻이다.
키리아도 살짝 조심스러워져서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파혼으로 내게 불만을 표하는 것도 알고 있고.”
“엇….”
그게 아닌데.
원작의 키리아라면 그랬겠지만 자신은 백작에게 별 유감이 없었다.
빙의한 마당에 계부니 친부니 따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이걸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백작도 대답을 바라지 않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네 혼인 문제로 생긴 편두통을 내년까지 앓고 싶은 생각은 벼룩의 눈곱만큼도 없다. 따라서, 네가 더 이상 가문에 손해를 입히도록 놔두지 않을 작정이다. 난 바쁜 몸이야.”
“그 말씀은….”
“최후통첩이다.”
탕.
백작이 두 물건 위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둘 중 하나를 골라라.”
“……?”
하나는 두꺼운 두루마리.
다른 하나는 포장된 직사각형의 얇은 물건이었다.
‘아까 쓰시던 게 저 두루마리였나? 그럼 저 포장된 물건은 뭐지?’
키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포장지에 먼저 손을 댔다.
이윽고 포장지 속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으악!”
키리아는 본능적으로 그 물건을 내던져버렸다.
“이게 선택지라고요? 제정신이세요?”
포장된 물건은 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약간 살집은 있지만 온화한 중년 남성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혼약용 초상화를 먼저 봤다가 실제 상대방을 대면해본 사람은, 인생이 실전이라는 사실을 절절히 통감하게 된다.
키리아 또한 몇 번이나 통감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 통통한 중년의 남자는 사실, 사교계에서 ‘두꺼비랑 가장 닮은 남자’ 1위로 꼽히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왜 검버섯은 묘사 안 했냐? 내가 분명히 봤는데!
“이건 두꺼비 자작이잖아요. 결혼도 옛날에 한 번 했고, 아들이 나보다 나이도 많다고요!”
“파혼 경력은 너도 화려하면서 무슨 소리냐? 게다가 그는 부자다.”
“부자면 다예요?”
“다지.”
백작의 자본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다.
“네가 우리 가문에 입힌 손해를 메꾸고도 남을 만큼 부자다. 그럴 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 중에, 이제 널 데려갈 사람은 이 자작밖에 없어.”
“제, 제 파혼으로 손해를 보신 건 인정해요. 하지만 손해 좀 봤다고 딸을 늙은이한테 팔아넘기려고 그래요? 정말 너무하시네요!”
키리아는 열변을 토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딸은 딸입니다, 아버지!”
“…….”
백작님이라며 거리를 두다가 갑자기 부녀 사이를 부르짖는 키리아를 백작이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안 통한다.”
“쳇.”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키리아는 두꺼비 자작의 초상화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잘 보면 그래도 정 붙일 만한 구석이 어딘가는….
‘응. 없네.’
키리아는 아까 백작이 하던 것처럼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이런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제가 손해배상을 하는 게 낫겠어요!”
“그러려무나.”
“…네?”
백작이 턱짓으로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설마….’
키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두루마리를 집었다.
손안을 가득 채우는 두툼한 두께.
두루마리의 정체가 짐작되는 가운데, 애써 아니기를 바라며 묶여 있는 끈을 풀었다.
그러자….
촤르르륵!
긴 종이가 순식간에 쏟아져 키리아의 발등 위로 겹겹이 쌓였다.
그 엄청난 길이에 한 번 놀라고, 빽빽한 글자에 두 번 놀라고, 마지막으로 그게 전부 청구서라는 사실에 세 번 놀랐다.
“이, 이게 대체….”
동공지진.
키리아가 정신없이 청구서를 훑는 동안 백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세 번의 결혼을 위해 준비했던 혼수, 예물, 예단 비용과 우리측 과실로 인한 배상금액이다.”
“……!”
“그리고 네 약혼 상대가 모두 귀족 사회에서 유력한 가문들인 건 알고 있겠지? 우리 클로버필드는 그들을 고객으로 둔 상단이란 사실도 말이야. VIP 고객을 잃은 상단의 신뢰 하락에 대한 사회적 비용도 포함이다.”
“그, 그런 것까지….”
“또, 약혼을 계기로 그들과 함께 시작한 사업의 투자와 하청 계약들, 네 파혼으로 전부 물거품이 되는 바람에 실패한 투자금 회수, 손해배상액 등등. …더 읊어주랴?”
아니요.
키리아는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온 청구서였다.
‘세상에,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돈에 있어서는 한 푼의 손해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손해가 크면 난리가 나도 진즉 났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파혼하고 오면 혼을 내긴 해도 생각보다 조용히 넘어갔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백작이었나 보다.
“그래서… 모두 얼마죠?”
키리아는 다 건너뛰고 가장 아래쪽, 최종 금액을 확인했다.
합계: 425,784,532 G
…음?
벌써 노안이 왔나.
눈을 비비고, 다시 금액을 보고, 손가락으로 일십백천만… 세어보기까지 했다.
잘못 읽은 게 아니었다.
“4… 4억 골드으으?!”
힘이 풀린 키리아의 손에서 청구서가 툭 떨어졌다.
무려 2천 5백만이라는 골드를 생략하고도 4억 골드였다.
“말도 안 돼요! 파혼을 몇 번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금액은!”
“정 의심스러우면 청구 항목을 다시 계산해 봐도 된다만.”
“그, 그….”
“자.”
통나무 같은 다리를 꼬고 있던 백작이,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슥 들이밀었다.
저런 포즈를 하니 무서운 사채업자 같았다.
“어느 쪽을 선택할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