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메데이아 님께.
빠른 답장을 받고 뜻밖의 행운을 만난 듯 무척 기뻤습니다. 사실, 한동안 답신이 오지 않았을 땐 이제 저에게 질리신 것인지 걱정했습니다. ……(중략)……
…혹시 메데이아 님께서도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계속해서 싫은 일을 강요하는 일 말입니다.
최근 한 여성분이 제 거절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시는데 정말 곤란합니다.
그분이 확실히 단념하도록 할 방법이 없을까요? (후략)
언제나 존경하는 메데이아 님께
숲지기 드림]
최근에 받은 편지였다.
키리아는 거기에 이렇게 답장했다.
[숲지기 님께.
누군지 몰라도 정말 거머리 같은가 보네요? 그런 상대에겐 맞불 작전이죠.
상대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강수를 둬서 이걸 안 들어주면 나도 안 해, 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효과는 보장해드리죠.
메데이아 드림.]
간단명료한 내용.
5장을 빽빽하게 채운 숲지기의 편지와 달리, 편지지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키리아가 아닌 ‘메데이아’는 이런 컨셉이었다.
‘흔히들 부캐라고 하지.’
키리아가 부캐인 ‘메데이아’ 이름으로 ‘숲지기’라는 사람과 편지를 교류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키리아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지만,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열두 달 넘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아는 건 성별뿐이었으니까.
‘아! 눈동자 색은 말했네.’
가끔 힘이 들 때면 그에게 시시콜콜한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곳’에 오게 된 사정이라든가. 부캐를 만들게 된 사연이라든가.
‘안 그러길 잘 했어, 키리아.’
만약 털어놨다면 자신이 먼저 편지를 그만뒀을 것이다.
‘메데이아’는 키리아가 자유로운 연구를 위해 지켜야 하는 비밀이었으니까.
“근데 이 편지가 왜 아직도 남아있지? 저번에 책상 정리했었는데.”
그녀는 편지를 비롯한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을 서랍에 몰아넣는 것으로 정리를 마쳤다.
시간은 금이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자, 그럼.”
키리아는 신고 있던 신발을 휙휙 벗고, 투박한 모양의 깃털 슬리퍼를 신었다.
하피라는 마물의 깃털을 뜯어 만든 것이었다.
강제 털갈이를 하게 된 하피는 춥다며 잉잉 울었지만, 사과 한 쪽을 주자 금방 헤실헤실 웃었다.
‘남는 장사였지.’
덕분에 암살자처럼 발소리를 없앤 키리아는 낡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호오―
입김을 불자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숲 한가운데 있는 고성의 밤은 겨울처럼 추웠다.
키리아는 작은 램프를 들고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멈춘 곳은 크고 화려한 침실 문 앞이었다.
‘후우.’
이 안에 최종보스가 잠들어 있다.
‘실례합니다.’
속으로만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간 키리아는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에는 한 점의 조각상, 아니 한 남자가 무방비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잠자는 숲 속의 미남이었다.
‘약이 효과가 있었나봐!’
늘 다크서클을 달고 사는 그는 불면증까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마시는 차에 몰래 수면유도제를 섞었다.
그냥 주면 안 먹으니까 몰래 먹여야 했다.
그는 푹 잠들어서 좋고, 자신은 목적을 달성하기 쉬워지니까 일석이조였다.
키리아는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면서 남자가 깨지 않는지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벌어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단단한 흉부.
이불로도 가려지지 않는 체격이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없이 많은 훈련과 실전이 빚어낸 기사 특유의 각 잡힌 몸이었다.
‘만져보고 싶다….’
꼴깍….
‘헉. 소리가 너무 변태같이 크잖아!’
다행히 남자는 깨지 않았다.
고개를 빠르게 저어 홧홧해진 얼굴을 식힌 키리아는 조심조심,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송곳보다 가늘고 뾰족하게 날 선 물체.
다름 아닌 주사기였다.
‘한 번만….’
제발 딱 한 번만 성공하자!
결연한 얼굴로 주사기를 들어 올린 키리아는 남자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걷어냈다.
그의 옷은 소매가 매우 특이했다.
품이 무척 넓고 길어 손끝을 전부 가릴 정도였다. 마치 한복과 비슷하달까.
처음 봤을 때는 동양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이제는 저런 옷을 입는 이유를 안다.
‘…변형되지 않은 게, 왼쪽 팔이었지?’
바늘이 부러질 게 분명한 오른팔 대신 왼쪽 팔로 결정했다.
키리아는 그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곧 혈관이 도드라진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팔뚝이 왜 성스러워 보이지? 전직 성기사단장이라서 그런가.’
전직 성기사의 몸에 몰래 손을 대려니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엉뚱한 생각 말고 빨리 끝내자.
키리아는 남자의 팔 안쪽 정맥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리고 주사기를 꽂으려는 찰나,
“엄마야!”
손목이 덥석 잡히더니 몸이 앞으로 확 끌려갔다.
다음 순간, 키리아는 자신을 쳐다보는 권태로운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키리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히꾹.”
딸꾹질을 시작했다.
“…….”
남자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는 가운데, 키리아는 쪽팔려서 제 입을 두 손으로 꽉 틀어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딸꾹질 소리에 맞춰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히끅, 히끅.
“그대란 여자는 정말…….”
남자가 긴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일으켜 등을 두드려주었다.
“히꾹.”
“물 드십시오.”
“감사… 히꾹.”
“코 막고.”
시키는 대로 코를 막고 고개를 젖힌 키리아는 단숨에 물을 삼켰다.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턱 끝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남자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하지만 키리아는 남자가 건네는 손수건을 못 보고 손등으로 슥 닦아버렸다.
갈 곳 잃은 손수건을 묵묵히 회수한 남자가 키리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딸꾹질은 괜찮습니까?”
“네. 깜짝 놀랐잖아요!”
오히려 질책하는 말에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나도 놀랐습니다. 누가 내 몸을 더듬어서.”
“마, 말을 왜 그렇게 하세요? 더듬은 게 아니라 팔만 조금 만진 건데.”
당황한 키리아의 말을 끊고 남자가 물었다.
“내 방엔 왜 숨어든 겁니까.”
“길…을 잃어서요.”
“이 밤중에?”
“그, 그러게요….”
“그럼 방에선 왜 나왔습니까?”
“그건….”
수세에 몰린 키리아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아무 말이나 던졌다.
“공작님이 보고 싶어서?”
찡긋.
“…….”
윙크까지 곁들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좀 더 서늘한 것도 같기도 하고….
할 수 없이 키리아는 살짝 억지를 부렸다.
“제 환자가 걱정된 나머지 이 밤중에도 회진을 돈 거예요.”
“…….”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공작님이 채혈하는 걸 허락하시지 않잖아요. 공작님의 병을 치료하려면 혈액이 필요한데….”
“그렇겠죠.”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서늘했다.
“이미 말했지만, 그대는 내 병이 아닌, 컨디션만 관리해 주면 됩니다. 그 외에 치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러지 말고 한번 해 봐요.”
“안 됩니다.”
“눈 딱 감고, 네?”
“싫습니다.”
“제발 한 번만요.”
“그대가 아무리 원해도 안 돼요.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 한 번만 하면 서로 좋잖아요.”
“…….”
“오늘 밤만 일탈을 해보자구요!”
응?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한밤중에 침대 위에서 남자에게 일탈을 해보자고 조르다니.
키리아가 속으로 민망해하는 찰나, 공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일탈이라고요?”
“그, 그으렇죠, 일탈….”
키리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공작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도대체 저 포커페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던 키리아는 문득 공작이 한 말 속에서 무언가 모순되는 점을 발견했다.
“근데 공작님, 방금 할 수 없다고 하셨죠? 하기 싫다가 아니라.”
“…….”
처음으로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치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
잠깐 침묵을 지키던 공작이 돌연 화제를 바꿨다.
“마물들이 그대를 좋아해서 그냥 두고 있었지만,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쫓아낼 겁니다. 이건 경고입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하지만 키리아는 아무 타격도 받지 않았다.
“저도 싫다는 분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지만 제 인생이 걸린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
“그대의 인생? 무슨 뜻입니까?”
‘아차!’
키리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현재로선 제 처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키리아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마주 봐 주었다.
부캐인 메데이아처럼, 냉정하고 이지적인 눈빛이었다.
그러자 줄곧 그녀를 돌 같이 보던 공작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어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한참을 망설이던 공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조건을 하나 걸어도 되겠습니까?”
앗! 드디어 승낙하는 건가?
“네! 좋아요.”
키리아는 얼른 대답했다.
“그럼….”
공작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와 결혼할 수도 있겠습니까?”
“네에?”
“그래서… 나와 함께 여기서 평생 사는 겁니다. 그 약속을 한다면 그대에게 치료받고. 어떻습니까.”
키리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장 결혼할 마음도 없거니와, 무슨 결혼 이야기를 저렇게 비장하게 해?
‘누가 봐도 되게 싫은 표정이잖아?’
평소엔 얄미울 정도로 포커페이스였던 사람이 왜 지금은 안색이 새파래져 있는데?
꼭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억지로 제안하는 것처럼 말이야.
‘흥. 이쪽도 사양이거든요?’
키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 공작님은 제 타입이 아니세요.”
“후―.”
“지금 안도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숨도 안 쉬고 바로 대답하네? 더 기분 나쁘게.
공작은 키리아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럼 얘기는 끝난 거 같은데.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나가 보십시오.”
“꺅!”
키리아는 어느새 그의 품에 짐짝처럼 안겨 있었다.
“그럼 이만.”
공작이 그녀를 문밖 복도에 사뿐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잠깐만요!”
키리아는 닫히려는 문틈 사이로 잽싸게 발을 끼워 넣었다.
“무엇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시는지는 몰라도 절 좀 믿어보세요. 공작님의 그 병, 제가 치료할 수 있다고요.”
“난 그대의 타입이 아니라면서요?”
“그건 솔직히 서로 마찬가지잖아요. 그쵸?”
“…….”
공작이 한숨을 삼켰다.
“내 병은 치료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네…?”
“치료되어선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대가 내게 해줄 일도 없고. …그녀라면 몰라도.”
“그녀요?”
“메데이아 말입니다. 뛰어난 약제사이자 독초 연구의 전문가.”
“어, 정말요?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오히려 병을 더 키우게 만든다고 욕을 하던데….”
“무지몽매한 자들의 헛소리입니다.”
공작의 목소리가 일순 곤두섰다.
“그녀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는 귀담아들을 필요 없습니다. 그대도 명심하십시오.”
“아…. 네.”
변함없이 딱딱한 말투였으나, 메데이아가 화제로 나오자 귀찮아하던 태도가 싹 사라졌다.
메데이아가 얼마나 훌륭한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고 싶지만 애써 자중한다는 태도였다.
‘저건 마치….’
자신의 최애를 지키려는 열성 팬 같잖아?
“메데이아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녀 외엔 누구도 내 병에 손대지 못합니다. 그러니 단념하십시오.”
차가운 말을 끝으로 침실 문이 닫혔다.
홀로 남겨진 키리아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공작이 가장 신뢰하는 최애.
메데이아.
“…그 메데이아가 바로 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