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완결)
‘잠시 나갔다 올게.’
‘응.’
은재는 민서와 눈짓을 교환하고서 일어났다. 현서도 그녀를 따라서 신부대기실에서 나오며 은재의 산등성이 같은 배에 감탄했다.
“몇 주인데 배가 이렇게 많이 나왔어?”
“33주요. 양수가 많다네요. 그래서 이 녀석이 안에서 잘 놀아요. 수영선수가 될 건가 봐요.”
“진짜 신기하다. 도강윤 아기가 태어난다니…….”
“질투 나요?”
“약간?”
은재와 현서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야외 결혼식이 치러질 정원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는 강윤과 재민이 보였다.
“같이 왔네요?”
“우리도 너희처럼 항상 붙어 다녀.”
“그래요?”
“응. 이젠 내가 박재민 없으면 못 살 것 같거든.”
예전 같으면 강윤만 바라보던 현서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오롯이 재민을 직시하며, 사랑이 충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날 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철이 없었지.”
“이제라도 철들어서 다행이네요.”
“그래.”
“결혼도 해요?”
“아직은 계획 없어. 우린 한동안 연애를 즐기려고.”
은재의 질의에 고개를 가로젓던 현서가 넌지시 귓속말했다.
“하지만 피임은 안 해.”
“응?”
언행 불일치라 갸웃하는데, 그녀가 누가 들을세라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사실은 우리 아빠가 나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서 속도위반을 계획 중이야.”
“아하.”
강윤과의 혼사가 오가며 겪었던 치욕감을 건우건설 임 회장은 여태껏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현서의 결혼을 반대하는 모양이다.
“성공하길 바랄게요.”
“고마워.”
은재도 소곤소곤 응원하자, 현서가 빙그레 웃으며 끄덕였다.
몇 년 동안의 회포를 푸느라 대화에 여념 없던 두 남자가 그녀들을 발견했다. 강윤이 가벼이 손을 들고서 인사하고서 먼저 움직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여자들에게로 걸어왔다.
이윽고 네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각자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주고서, 눈부신 미소를 그리며 서로의 곁에 든든하게 섰다.
그리고 또 다른 커플이 야외 정원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하객들이 부부로 탄생할 신랑과 신부를 향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찬란한 날이었다.
***
부앙―
우렁찬 뱃고동 소리에 신이 난 여섯 살 재윤이 선상을 동동 뛰어다녔다. 날다람쥐 같은 녀석의 겨드랑이를 강윤이 대번에 낚아챘다.
“이 녀석, 위험해.”
“까르르.”
공중에 붕 떠오른 재윤이 목청이 보이도록 웃어젖혔다. 갓 잡은 물고기처럼 공중에서 파닥거리는 아이를 강윤이 안전하게 안아 들었다.
“대체 누굴 닮은 거야? 어째서 쟤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아.”
은재는 투덜거렸다.
아침 6시부터 정오에 다다르는 현시점까지 한시도 쉬지 않는 딸한테 두 손 두 발 든 상태였다.
은재의 ‘재’ 자를 따오고, 강윤의 ‘윤’ 자를 따와서 ‘재윤’이라고 이름을 지은 딸은 태몽부터 심상치 않더니, 엄청난 태동을 자랑했었다.
그리고 갓난아기 시절부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잘 놀더니, 크면 클수록 에너자이저가 되어가고 있었다.
천사 같은 깜찍함을 장착했지만, 엄마는 쉬고 싶다고!
“우리 재윤이 누구 닮았나?”
“아빠!”
“아니지, 엄마랑 똑같지. 그래서 너무너무 예쁘지.”
강윤은 딸바보답게 은재의 볼멘소리는 모른 체하며 아이와 눈 마주치며 한결같은 애정을 담았다.
“쳇.”
은재는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는 부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지치지 않고 제게 덤비던 남편의 모습을 상기했다.
‘저 남자의 체력이 문제였어. 누굴 탓해. 내가 선택한 남자인데.’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며 혀 차며, 은재는 유모차에서 곤히 자는 두 살 강재를 들여다봤다.
친구들의 바람대로 강윤을 빼닮은 도강윤 2세 강재는 제 누나와 달리 순하고 얌전했다.
이제 총 인생 2년이라, 그 미래는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 섬에 도착했네.”
어느덧 페리호가 선착장에 정박했다.
“얼른 가자.”
“와!”
유모차를 밀려는 은재의 손을 물린 강윤이 재윤을 어깨에 들쳐메고, 너끈히 유모차를 번쩍 들어서 부둣가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아이고, 우리 작가님 왔소. 우리 공주님도 오셨네.”
“네, 그간 안녕하셨어요.”
“재윤 아빠는 오늘도 역시 잘생겼구먼.”
“힘도 억수 좋고.”
“그럼요.”
주민들은 강윤을 먼저 반겼다. 시시때때로 휴가차 방문하는 섬이기에 어느덧 강윤도 주민들과 친숙했고, 여지없이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형님! 아이고, 재윤아!”
“어, 왔어.”
“삼촌, 안녕.”
“이리 주세요, 형수님.”
마중 나온 지혁이 다가오자마자 은재의 캐리어부터 챙겼고, 강윤의 유모차를 가져갔다.
“제수씨는?”
강윤과 지혁이 형님, 아우 하며 형제간처럼 우애를 다지면서, 자동으로 은재는 형수님, 정경은 제수씨가 되었다.
“등대섬에서 기다려요.”
“갑자기 거긴 왜요?”
은재의 물음에 지혁이 강윤의 팔뚝을 의자 삼고 안겨 있는 재윤과 눈을 맞췄다.
“재윤아, 먼젓번에 희성 오빠한테 등대섬으로 소풍 가고 싶다고 했어?”
“어! 소풍! 나 오빠랑 소풍 가고 싶어!”
“아하.”
앙증맞은 엉덩이를 들썩이는 재윤의 반응에 강윤과 은재는 서로를 보며 알만하다는 듯 고갯짓을 했다.
***
“와!”
푸르른 초지가 광활한 언덕에 오르자마자 재윤이 발랄하게 뛰어갔다.
“오빠!”
새하얀 등대와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둔 자리에 조화롭게 하얀 그늘막이 쳐져 있었고, 재윤의 눈높이에 맞춘 듯한 귀여운 갈랜드가 바람결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재윤아!”
“오빠!”
땅바닥에 해바라기 바람개비를 박던 희성이 제게 종종 달려오는 재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재윤이 까르르거리며 오빠한테 매달렸다.
“쟨 오빠가 저리도 좋을까.”
“희성이도 만만치 않아요. 재윤이 온다고 제 용돈을 탈탈 털어서 저런 것들을 인터넷으로 샀더라고요. 핸드폰 화면도 재윤이 사진이에요.”
은재의 혼잣말에 지혁이 넌지시 고자질했다. 점심 바비큐 준비로 여념 없던 정경이 은재를 발견하고 팔을 높이 들었다. 은재도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 오느라 고생했지!”
“너야말로 준비하느라 고생스러웠겠어.”
정경의 둘째인 희민이 ‘이모!’ 하며 은재의 허리춤을 감았다. 은재는 가져온 로봇 장난감을 희민의 품에 안겨줬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은 가운데, 본격적인 소풍이 시작되었다.
능란한 솜씨로 지혁이 바비큐를 구웠고, 서울 촌놈인 강윤은 지혁의 훌륭한 보조 역할을 했다.
은재와 정경은 그간 쌓였던 수다를 떨면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오빠! 등대 갈래!”
“그래, 오빠가 재윤이 데려다줄게.”
“재윤이 손잡아 줘.”
“알았어. 오빠 손 꽉 잡아.”
부모들이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는 동안, 희성이 든든하게 재윤과 희민을 챙겼다.
희성이 껌딱지인 재윤이었고, 희민은 시샘을 내면서도 형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다소 시끄럽고, 많이 정다운 가운데에서도 유모차 안의 강재는 잘도 잤다.
“이야, 강재는 이런 와중에도 깨질 않네?”
“절대 안 깨. 어쩔 땐 종일 잘 때도 있어. 내가 오죽하면 숨 쉬나 들여다본다니까.”
“진짜 순하다. 언니는 좋겠다. 난 망둥이 같은 두 놈에다, 멧돼지 같은 큰 놈한테 종일 시달리는데.”
“내겐 두 배의 몫을 하는 딸아이가 있어.”
“하긴, 저 기운 넘치는 것 봐. 웬만한 장정 못지않아.”
재윤은 그사이 등대 난간에 매달려 말 타듯 ‘이랴!’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의젓한 희성이 호위무사처럼 아이의 곁을 지켰다.
“그나저나 언니, 내가 요즘 골치가 아파. 희성이가 상위 1% 영재래.”
“정말? 역시! 예전부터 예사롭지 않았어.”
“어쩌다가 저런 애가 태어났지? 양쪽 집안 어디에도 머리 좋은 유전자는 없는데.”
“좋은 일인데 왜 심란해?”
“내년에 중학교 가잖아. 선생님들은 서울이 안 되면 광역시 중학교라도 보내라는데, 지혁 씨 뱃일로 근근이 사는 우리 형편에 가당키나 해? 선생님들이 부추긴다고 괜히 테스트를 받았나 봐.”
정경의 시름을 들으며 은재는 힐끗 강윤을 쳐다봤다. 귀동냥으로 듣던 강윤이 그녀의 뜻을 읽고 픽, 하고 웃으며 턱짓했다.
“우리 집으로 유학 보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갑작스러운 말 아니야. 안 그래도 비슷한 얘기로 의논한 적 있어. 희성이가 영재인 걸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이 재윤이 아빠고.”
은재는 놀라서 손사래 치는 정경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강윤이 넘겨다보며 한 소리 보탰다.
“희성이 보내세요, 제수씨. 저희가 딱히 할 일도 없어요. 희성이가 알아서 잘할 텐데요.”
“그래도…… 너무 염치없어서….”
“내가 네게 도움받은 게 훨씬 많아. 그리고 내 욕심이기도 해. 희성이 잘 키워서 사위 삼을 거니까.”
“어머, 언니도 참!”
은재의 방대한 목표에 정경이 깔깔 웃어젖혔다.
그 순간.
“서은재.”
강윤의 낯이 사색이 되었다.
“사위라니? 재윤이를 희성이한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야? 난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재윤이도 아빠랑 결혼한다고 했고.”
“농담이야, 농담. 이제 13살, 6살 애들인데!”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를 은재는 즉시 달랬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정색하는 그에게 은재는 양손을 들어 항복의 뜻을 표했다. 한시름 놓은 강윤이 그제야 지혁의 보조 역할에 충실했다.
‘상무님 의외다, 언니.’
‘우리 집에도 큰 놈이 있지?’
‘응.’
웃음을 참는 정경의 입술이 심하게 실룩거렸고, 은재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어젯밤 희성 오빠를 만날 생각으로 들떠 있던 재윤은 은재의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했었다.
“엄마, 나는 희성 오빠랑 꼭 결혼할 거야.”
아빠가 이 진실을 알면……
아마도 울겠지.
바보 도강윤.
“픽.”
강윤은 추호도 모르게 의뭉스러운 미소를 걸며, 은재는 새하얀 등대의 주변에서 그림처럼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날을 소중히 여기리라.
당신과 함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