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결국, 지각했다.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테이프 커팅식이 끝나고, 재단 이사장을 맡은 민경애 여사가 한창 취임사 중이었다.
“상무님, 늦으셨습니다.”
“흠, 차가 막혀서.”
“그러게, 제가 모시러 간다고 했잖아요.”
미리 와서 대기하던 호석이 구시렁거렸으나, 강윤은 모른 체하며 민 여사의 연설에 집중했다.
삼현문화재단 창단식이 있는 날이었다.
수많은 회의를 거쳐 다섯 명의 임원이 선출되었고, 재단 이사장으로는 애초 서은재가 거론되었지만, 은재는 적극적인 활동과 체계적인 운영을 위해선 민경애 여사만 한 분이 없다며 설득하여 민 여사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도형호 회장은 아내의 활발한 대외활동에 적잖이 곤란한 기색이었으나 울며 겨자 먹기로 전폭적인 지원을 선언하여 실추한 이미지를 그나마 만회했다.
“근데, 작은 사모님은 안 오셨어요?”
“오다가 멀미해서, 화장실 다녀온다고.”
“멀미요? 체하셨어요?”
“응. 며칠 전에 밥 먹다가 체하더니, 그 영향인지 오늘도 속이 매스껍다네.”
강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한없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강당 출입문을 넘겨다봤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내가 너무 괴롭혔나.’
그답지 않게 반성하며.
오늘 밤만큼은 은재를 평온하게 내버려 두자고 결심하며.
밤엔 또 음험한 마음가짐을 가진 녀석이 불끈불끈 용솟음치겠지만.
징―
―속이 답답해서 정원에 있을게.
―아직도 그래? 내가 당장 갈게.
―아니야. 심하지 않아. 시원한 공기 쐬면서 쉬고 있을 테니까, 도 상무님께서는 창단식 끝나면 나오세요.
―알았어. 안 좋으면 바로 연락해.
은재의 메시지에 답을 보내고, 강윤은 애타는 심정으로 창단식이 종료되길 기다렸다. 삼현그룹의 상무이사라는 직책이 오늘만큼은 불만스러웠다.
“축하드려요, 어머니.”
“은재는?”
드디어 창단식이 끝나고, 강윤은 민 여사에게 준비한―물론 호석이―꽃다발을 전달하며 예우를 갖췄다.
“속이 안 좋다고 밖에 있어요.”
“뭘 먹었기에? 식중독은 아니고?”
“딱히 그럴 만한 건 먹진 않았는데… 며칠 전 급체하더니, 영 속이 불편하나 보네요.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얘는! 제 아비를 닮았나? 세상 무심하구나! 급체하면 얼마나 고생스러운데!”
공연히 호들갑 떤다고 한 소리 들을 듯하여 사뭇 무덤덤하게 전하는 아들에게 외려 민 여사는 버럭 힐난했다.
“안 그래도 삐쩍 마른 아이가 잘 못 먹으면…….”
“체질상 마른 거지, 먹는 건 잘 먹어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수시로 구첩반상을 보내시잖아요.”
“은재 어디 있니? 당장 한약이라도 한 재 지어줘야겠다.”
신기한 노릇이다.
아들에게 향했던 집착이 사라진 민경애 여사는 뒤늦게 얻은 딸인 양 며느리한테 온갖 애정을 쏟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은재의 처세로 인한 효과였다.
‘서은재, 하여간 대단한 여자야.’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도록 열성적으로 지지한 데다, 어딜 가나 시어머니에 대해 칭송하며, 민 여사의 인터뷰 기사엔 필히 멋들어진 사진으로 장식해 주는 며느리가 예쁘지 않겠느냐 말이다.
“은재는 안 보이고, 왜들 이리 소란스러워?”
“아버님, 강윤이가요, 글쎄…….”
도성만 회장이 다가오자 민 여사가 얼씨구나 하듯이 일러바쳤다. 엉뚱하게 대역죄인이 된 강윤은 잠자코 벌섰다.
한데.
“아, 은재가 탈이 났단 말이지?”
고자질을 모두 들은 도성만 회장이 뜬금없이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아버님….”
어안이 벙벙한 강윤과 민 여사를 두고, 그가 기분 좋게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내가 은재를 먼저 만나봐야겠구나.”
***
꽃잎이 싱그럽고, 바람이 보송보송한 봄날이었다. 뭉게구름이 넘실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은재는 산뜻한 산소를 들이켰다.
“음, 맛있어. 왜 공기도 맛있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매스꺼운 기운으로 울렁거리던 위장이 한결 편해졌다.
“속이 많이 안 좋은 게야?”
“할아버지.”
도성만 회장이 벤치로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이라, 은재는 태평하게 고갯짓했다.
“멀미인가 봐요. 이젠 괜찮으니 염려 마세요.”
“나한테 꿈 안 사련?”
“네? 꿈이요?”
뜬금없는 도성만 회장의 제안에 은재는 적잖이 황당했다.
“얼마에요?”
“백 원이면 돼.”
장난기 다분한 그에게 은재는 도도하게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들어보면 안 돼요?”
“아무렴, 내가 네게 흉몽을 팔까?”
“좋아요. 살게요.”
장단을 맞추며 지갑을 열어보니, 동전은 없고 지폐만 있었다. 은재는 그중 초록색 지폐를 꺼내 살랑거렸다.
“백 원은 없는데…… 만 원은 안 돼요?”
“내 인심 써서 만 원에 주마.”
도성만 회장이 너스레 떨며 냉큼 만 원을 챙기더니, 본격적으로 꿈을 풀었다.
“내가 바닷가 산책을 하다가 너를 봤어. 그래서 내게 오라고 손짓하는데, 네가 이상하게 수평선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지.”
“제가요?”
“응. 그런데 갑자기 수평선 너머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용이 솟아오르더니,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게 파도를 일으키며 네게 다가가더라고.”
꿈 이야기에 심취한 도성만 회장의 목청이 드높게 올라갔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은재는 절로 집중했다.
“그래서요?”
“삽시간에 널 휘감고서 빙그르르 돌더니, 네 뱃속으로 쏙 들어가지 뭐냐.”
“제 배로요? 용이 그렇게 사라졌어요?”
“응. 그래서 내가 꿈꾸는 와중에도, 아이고! 태몽이로구나, 했다는 게 아니겠냐.”
“태몽이요?”
“그렇대도. 영락없이 태몽 아니겠냐?”
“제가 임신을 했단 말씀이세요?”
“네 속이 안 좋은 것도 입덧 아니냐?”
“입덧…….”
“은재, 너는 기미를 전혀 못 느꼈어?”
체한 것처럼 메스꺼운 것이 입덧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벅찬 감정이 치솟았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어디 좀 다녀올게요.”
“오냐.”
은재는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걸어가면서 핸드폰을 꺼내 일정표를 확인했다.
한동안 민경애 여사의 재단 이사장 취임으로 사진 촬영을 진행하느라 바빴던 나날이었다.
‘아…… 보름이나 지났구나.’
날짜를 헤아리다가, 비로소 매달 정확하던 생리를 안 했음을 인지했다.
“임신 테스트기 하나만 주세요.”
설렘을 가진 채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구입하고, 은재는 재단 건물의 화장실로 갔다.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붉은색 줄이 하나 생기더니 잠잠했다.
“아닌가?”
실망하려는 찰나.
서서히 붉은색 줄이 하나 더 떠오르기 시작했다. 점차 또렷해지는 두 줄의 붉은 선.
“아.”
은재는 감격스러웠다.
첫 번째 아기를 잃었던 경험이 있었고, 강윤과 재혼한 후 애타게 기다리던 아기인지라, 더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아기야.”
손으로 아랫배를 소중하게 쓸었다. 온화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찾아와 줘서 고마워.”
***
창단식이 종료 후 외부 정원으로 나왔지만, 벤치에서 쉬던 은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불안감이 가중된 강윤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때, 도성만 회장이 뒷짐을 지고 슬렁슬렁 걸어왔다.
“은재는 화장실 갔어.”
“또 토했어요?”
“네가 잘 좀 해.”
기함하는 손자의 반응에 할아버지가 넌지시 곁눈질했다. 다소 의뭉스러운 낌새였으나 강윤은 오롯이 은재 걱정으로 움직였다.
“은재야.”
때마침 화장실에서 은재가 나왔다. 안색은 나쁘지 않았으나 행동거지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강윤은 그녀의 어깨에 손대며 지그시 들여다봤다.
“많이 안 좋아? 병원 갈래?”
“음, 병원은 가야겠어.”
입술을 달싹거린 은재가 고갯짓했다.
강윤은 금세 파리해진 채 그녀의 손을 불끈 쥐었다.
“빨리 가자.”
“잠깐. 진정해.”
돌연 은재가 옅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어떻게 진정해? 네가 아프잖아.”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지나 알아?”
“급한 대로 내과? 아님, 의성대 병원으로 갈까?”
“가기 전에 먼저 보여줄 거 있어.”
강윤은 초조해서 미칠 지경인데, 도리어 은재는 여유로웠다. 성급한 그를 잠재우고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이거.”
영문 모르는 강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길쭉한 스틱을 들여다봤다.
비로소 임신 테스트기임을 알아챘고, 선명한 두 줄을 발견했다.
“아.”
강윤이 믿기지 않은 안광을 들자, 은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길게 휘었다.
“우리 산부인과로 가야 해.”
“은재야.”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축하해. 아빠 된 거.”
경이로운 감격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강윤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삽시간에 충혈된 눈동자를 발견한 은재는 당황했다.
“뭐야? 도강윤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