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81화 (81/84)

외전 4.

“서은재….”

먼저 손을 내민 건 도강윤이었다.

“오지 마.”

은재는 냉정해지려 애썼다.

단단한 가슴팍을 거칠게 밀쳐냈다. 못내 미안한 듯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모순이다.

짜릿한 키스에 홀려 정신 놓았던 주제에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하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접근 금지 푯말이 붙은 듯한 고고한 남자와의 결론은 뻔한데…….

“꺼져, 도강윤.”

은재는 사납게 내뱉은 후, 쌩하니 달렸다.

***

강윤은 굳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희뿌연 함박눈 너머로 사라지는 서은재를 붙잡지 못했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그 말이 투창처럼 심장을 관통했다.

짧다면 짧은 19년의 생이지만, 제한된 삶이었다.

행동의 제약보다는 삼현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옭매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절제했다. 빗장을 걸어둔 것처럼 제 감정, 말, 생각조차.

한데, 서은재 앞에서 무너졌다.

이성 없는 짐승처럼 너의 입술을 삼키고, 너의 혀를 빨아대며…….

“빌어먹을.”

제어하지 못한 자신에게 하는 질타였으나 이성 저편은 인식하고 있었다.

너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사로잡혔음을…….

너의 불신을 깨트려야겠음을…….

“하.”

강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어쭙잖은 반항을 할 생각이라면…….]

두 번의 신호음 만에 받은 아버지 도형호는 냉소적으로 조롱했다. 어금니를 바락 물었던 힘을 풀며, 강윤은 차분히 말했다.

“서은재 측에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아버지는 어떠한 결정이 유리한지 명백한 구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낱 하청기업보다 삼현의 장래가 훨씬 중요했다.

“지키신다면, 바로 유학을 떠나겠습니다.”

[그러마.]

도형호가 승낙했다.

***

은재는 함박눈으로 가리는 시야를 닦지도 못한 채 무조건 그의 반경에서 벗어났다.

모퉁이를 꺾고 꺾다가, 비로소 혼자임을 깨닫고서야 담벼락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술이 따끔따끔하고, 아직도 화끈거렸다. 심장박동도 여전히 터질 것처럼 뛰어댔고.

“……미친놈.”

은재는 제 입술에 조심스레 손끝을 댔다.

두툼하게 부푼 입술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생소했다.

도강윤의 강렬했던 입술이 떠올랐다.

각인된 듯한 촉감 또한.

“미친년.”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무릎에다 묻었다.

검은 정수리 위로 흰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일 때까지 제 속에 잔재한 열기를 식혔다.

얼마 후 3학년은 졸업했고, 도강윤은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렇게 지독한 몸살 같던 도강윤과 영원히 안녕했다.

아니……

영원히 안녕, 이라고 믿었다.

부부의 연을 맺을 미래는 상상도 못 한 채.

―재혼 6개월 차, 현재의 아침.

10년이 훌쩍 지난 서른 살의 은재는 아침부터 격렬한 남자한테 포로로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남자와 안녕을 꿈꿨다니…….’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하아.”

은재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숨소리가 흘렀다.

엎드려 누워 있는 은재의 어깨에 자잘한 입맞춤을 한 강윤이 시트를 움켜쥔 손에 깍지를 꼈다.

자신보다 두 배는 큰 손에다 초점을 두며 은재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남자는 손도 어쩜 이렇게 단단해.

“으흠.”

이 와중에 좋니?

흐뭇할 틈도 주지 않는 남자인데?

날이 갈수록 강렬한 남자를 은재는 새치름한 눈초리로 흘겼다.

이 깍지도 사랑의 몸놀림이 아니라 옭아매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왜 이렇게 아침부터 좋지?”

“언제는 아침에 안 한 것처럼 말하네?”

“매일 좋아.”

하지만 뾰족한 심리는 귓가로 달콤하게 스미는 애정 어린 고백에 대번 무너졌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부드러운 입술을 겹쳤다. 다정한 키스를 하면서도 전신에 소름이 번졌다.

강윤은 부드럽고 느긋했다.

정확하고 끊김 없는 음률처럼 노련미가 타고났다. 스며들어 가는 느낌을 선사하는 그에게 은재는 감사했다.

다소 피곤했지만.

“오늘은 정말 종일 이러고 있고 싶다.”

강윤이 은재와 낀 깍지에 힘을 주며 능청을 떨었다.

“그렇지?”

“아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냉정한데?”

단칼에 일축하자, 강윤이 아랫입술을 삐죽, 했다. 그러면서 은재의 목덜미에다 입술을 댔다.

“명확한 거지.”

“내가 이 명확함에 반했지.”

“어느 정도로?”

“행동으로 보여주지.”

장난기 서리게 응수한 강윤이 상체를 일으켰다.

“꺅!”

그리고 어느 때보다 빠르고 격렬한 열정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뜨거운 눈길로 내려다보는 그는 숨 막히도록 매혹적이었다.

더불어 인내심 같은 건, 저 멀리 태평양에다 내다 버린 듯 극심하게 덤벼오는 것 또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은재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격해질수록, 침실을 밝히는 태양은 훤해졌다.

“은재야.”

잔혹하도록 단단한 그였다.

흑막처럼 까맣고 어두운 눈동자는 오롯이 은재를 향한 갈망에 불타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을 짓이길 듯이 몰아붙였고, 오직 본능에 충실했다.

그가 행하는 채움의 행위는 지독히 아름답고 뇌쇄적이었다.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원치 않았다.

뜨거운 화기가 온몸을 덮쳤고, 오롯이 서로의 몸이 녹아서 서로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그들은 같이 소유했으며, 오롯이 서로에게 몰입했다.

“아, 아. 도강윤.”

“하, 은재야.”

강윤의 관능적인 숨소리도 터졌고, 동시에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전율에 흐드러졌다.

“사랑해, 서은재!”

강윤이 야성적으로 포효했다.

그 맹렬함에 은재는 넋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강윤이 진동하듯 부르르 떨며, 거칠고 뜨거운 입술로 은재의 입술을 덮었다.

달뜬 열정이 서로에게 전이되었다.

‘음. 이 느낌, 너무 좋아.’

은재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나누고, 태풍 같은 신열을 한 차례 겪고 난 후의 온화함.

놓기 싫다는 듯 천천히 입술을 뗀 강윤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모로 누우며, 은재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쪽.

그리고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서로의 몸에 짙게 밴 체향을 음미하며, 깊은 여운이 소화될 때까지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띠, 띠.

강윤의 알람이 울렸다.

“대체 몇 시인 거야?”

“8시.”

나른한 은재의 물음에 강윤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알람을 껐다.

“준비할 시간이네.”

외출 준비를 해야 하지만, 은재조차 강윤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 은재는 꼬물거리며 탄탄한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잠을 잔 기분이 아니잖아.”

“그냥 쨀까?”

강윤이 은밀하게 유혹하며, 부드러운 손길로 은재의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녹초가 되었던 몸이 달래지는 느낌을 만끽하다가, 은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단단한 남자의 몸을 냉정하게 밀어내고, 주섬주섬 가운을 걸쳤다.

“왜?”

강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스레 올려다봤다.

“어차피 우리는 없어도 되지 않나?”

“될 것 같아?”

“아니.”

“늦장 부리지 말고 당장 일어나세요, 도강윤 씨.”

“한 시간 정도는 여유 있지 않아?”

“씻고 화장하려면 촉박해.”

“빠듯하게 한 번 더 하자.”

“작작 좀!”

찰싹!

은재는 그의 등짝을 때렸다.

“아, 서은재.”

엄청난 매운 손맛에 강윤이 끙, 하는 탄식을 흩뿌리며 매트리스에 등 대고 누웠다.

‘누가 저 남자를 카리스마 넘치는 도강윤 상무로 볼까? 영락없이 앤데.’

은재는 쯧쯧 혀 차며, 가운을 펄럭이며 욕실로 향했다.

자연스레 가운의 끈을 풀며 욕실 문을 연 순간.

“혼자선 안 되지.”

어느 틈에 뒷등으로 다가온 강윤이 와락, 은재의 허리를 감았다.

“시간 없다니까!”

“같이 씻기만 할게.”

강윤이 그 자세로 은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공중으로 뜬 다리를 버둥거리는 은재를 든 강윤이 성큼성큼 욕실로 진입했다.

“거짓말! 내가 한두 번 속아?”

“오늘은 믿어.”

“안 믿어!”

“믿어, 믿어. 믿어도 돼.”

스르륵, 앞섶이 벌어진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호시탐탐 은재의 몸을 탐내던 남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깻죽지를 야금야금 씹어댔다.

간지러움과 짜릿한 전율이 동반했다.

“까르르.”

은재는 자지러진 웃음을 터트리며, 발끝을 턴 하듯이 빙그르르 돌렸다.

이 혈기 왕성한 남자를 제압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도강윤.”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바락 감고서 도도하게 턱을 곧추세웠다.

“으흠?”

“이리 와, 내가 해줄게.”

은재는 그의 목을 당기며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쳤다.

당돌한 은재의 유혹에 강윤이 기대 만발한 눈빛을 내리깔며, 한 발 한 발 따랐다. 은재는 한쪽 팔을 등 뒤로 돌려 샤워기 꼭지를 눌렀다.

쏴―

수증기가 희뿌옇게 차올랐다.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의 모습을 감추듯.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