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강윤은 서은재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지 않았음을 처절히 후회하며, 핸드폰을 꺼내 무작정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야. 우리 도련님…….]
통화 상대는 13년 동안 강윤의 곁을 지켰던 경호원 겸 운전기사인 이승경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열일곱 살의 강윤이 친모를 만나는 자리를 막지 않았다는 사유로 해고되었지만, 여전히 강윤의 전화는 반겼다.
“아저씨!”
[목소리가 왜 이리 가빠? 무슨 일 있어?]
“삼현사립고등학교 1학년 서은재.”
강윤은 헐떡이며 요청했다.
“어디 사는지 알려줘. 급해요.”
[…서은재? 알았어. 숨 좀 돌리고 있어, 도련님.]
“예.”
이승경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오직 강윤의 안위를 걱정하며 전화를 끊었고, 강윤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지만,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징―
징―
그동안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했다. 저택 대표번호이기도 했고, 안 비서이기도 했고, 어머니 민경애 여사의 번호도 떴다.
모조리 무시했다.
큰길가로 나와 연말 분위기에 휩싸인 공간에 선 강윤은 자신 혼자 동떨어진 세계에 낙오된 기분이었다.
갈피 못 잡는 와중에 드디어 이승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련님, 서은재 거주지는 서울…….]
그때.
휘황한 네온사인이 휩싸인 건너편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을 포착했다.
“아저씨, 연락드릴게요.”
강윤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라진 자취를 쫓아 모퉁이를 도니, 컴컴한 골목이 나타났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내디디며 사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드디어 작은 뒤통수가 잡혔다.
“서은재.”
강윤은 질주하듯 달려가, 가냘픈 손목을 잡아챘다.
“앗!”
기함하며 뒤돌아보는, 서은재의 나뭇결 같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뺨엔 붉은 물이 든 채.
***
쫙!
“네가 제정신이야?”
아버지 서정탁이 다짜고짜 손찌검을 날렸다. 격한 일격에 무방비했던 은재는 풀썩 주저앉았다.
“여보!”
“정녕 아비 일을 그르칠 작정인 게지!”
엄마의 만류에도 아버지의 손이 은재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은재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묶였던 머리카락이 처참히 헝클어졌다.
“감당도 못 할 주제에 삼현그룹 독자한테 치근덕거려?”
삼현그룹 독자?
도강윤?
“너 때문에 행여라도 삼현에서의 하청이 틀어지면, 회사가 입을 타격이 얼마나 큰 줄 알아!”
“대체 왜 이래요?”
“이 맹랑한 것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고!”
좌르르―
바닥에 흩뿌려지는 사진에 도강윤이 있었다. 은재의 얼굴 가까이 턱을 기울인 그의 동작 때문에 키스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이따위 지저분한 짓거리를 해!”
“은재야, 남학생이랑 벌써…….”
엄마도 경악했다.
“일반 남학생도 아니라고! 삼현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야! 도형호 부회장 아들인!”
“삼현의 후계자요?”
“어린 게 겁도 없이!”
엄마는 열일곱 살 딸의 일탈이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이유가 달랐다.
“부회장님께서 내게 직접 전달했어.”
아버지는 삼현그룹의 신임을 잃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이 의미가 뭔 줄 알아! 경고라고! 함부로 제 아들에게 집적이지 말라는 경고!”
“삼현 측에서 하청 끊으신대요?”
“이번은 점잖게 주의만 주셨어. 딸 몸가짐 조심시키라고.”
“쿡.”
은재는 실소했다.
남녀의 문제에 여자만 조심하면 되나? 어른들의 편협한 논리가 우스웠다.
“이게 웃어! 웃음이 나와!”
아버지의 손이 다시 올라왔지만, 은재는 쓱― 피하며 일어났다.
뜻밖의 행동에 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벌건 볼때기를 똑바로 내보였다.
“내가 재벌가에 시집가는 게 소원 아니었어요?”
그러고선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삼현그룹 아들이면 더 환영할 일 아니야?”
“너……!”
“근데 말이죠.”
서러움이 치솟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걔 별로야. 내가 별로라고!”
“은재야!”
시야가 뿌예졌다.
은재는 하찮은 일에 등신처럼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뛰쳐나와 무작정 거리를 거닐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에서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일부러 화려한 거리를 벗어나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주변이 컴컴하니 눈시울이 울렁였다. 아릿한 콧방울에 힘 줄 때였다.
“서은재.”
“앗!”
강한 손이 팔목을 잡아당겼다.
아이처럼 훌쩍이는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도강윤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니, 미움과 원망이 휘몰아쳤다.
“너…… 맞았어?”
도강윤이 은재의 붉은 뺨에 손댔다.
미세한 기운이 전이되었고,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손대지 마.”
휙―
은재는 단박에 고개를 피했다.
“놔요. 난 또 오해받기 싫거든?”
도강윤은 은재의 힐책을 이해했다. 하지만 감정 절제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순순히 손을 거두며, 불안정하며 안쓰러운 눈빛을 내리깔았다.
“이 일에 대해선 내가 전적으로 사과할게.”
사과라.
그런 표정으로?
은재는 공연히 울컥했다. 하염없이 건조한 표정과 의례적인 언사에 화도 났다. 그에게 흔들리고, 애틋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뭐 있었나? 사과하고, 사과받을 정도로?”
“…….”
“어이없네, 진짜.”
싫증난다.
성공에 목마른 아버지도, 원치 않는 상황에 휩쓸린 자신도.
“와! 눈이다! 함박눈이야!”
번화가 골목길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올해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포슬포슬한 눈이 너울너울 시야를 가리며 도강윤의 기다란 몸을 얼핏얼핏 감췄다.
‘눈송이 같아.’
도강윤은 잡으면 잡을수록 사르르 녹아버릴 눈송이를 닮았다.
뜨거울수록 더 빨리 녹겠지.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 대신.”
씁쓸히 입술을 뗐다.
“난 그 대단한 도강윤하고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서로 모른 척해요.”
도강윤은 침묵했다.
“그냥 신경 꺼주면 좋겠어.”
흑막 같은 눈동자를 내리깐 채 탄탄한 가슴팍만 오르락내리락 들썩였다.
“이런 대화도 웃기네. 어차피 아무 일도 없었는데…….”
고작 벤치에서의 10분이 전부였다.
고작 내일의 약속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이젠, 끝.’
은재는 제 마음에 결론을 내리고 발끝을 비틀었다.
“있으면?”
돌연 그가 손목을 거칠게 그러당겼다.
멈칫하는 은재의 코앞으로 잡아먹을 태세의 눈동자가 다가왔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
“너하고 나, 뭐 있으면 되나?”
벙한 사이, 도강윤의 입술이 은재의 입술을 덮쳤다.
입술이 맞닿자마자, 스파크 같은 전율이 일었다. 은재는 질겁하여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작은 뒷머리를 큰 손으로 감싸며 입술을 서슴없이 머금었다.
단연코 타인과 입맞춤조차 해본 적 없던 은재의 입술이었다.
그 입술을 도강윤이 차지했다.
‘아…….’
은재는 무릎이 풀렸다.
키스는 같잖은 행위라 생각했다.
왜 그렇게들 남과 입술을 붙이며 키스했다고 호들갑을 떠는지, 뭐 그리 짜릿하다고 다들 못 해서 안달인지, 비웃었다.
그런데, 어이없는 교만이었다.
이런 느낌이라니.
왜.
어째서.
멈출 기세 없는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나 교차하는 서로의 숨결이 닿았다.
서로의 가파른 심장박동을 인지하면서도, 은재는 묘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원래부터 키스는 짜릿한 건지, 상대가 도강윤이라서 짜릿한 건지 모르겠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도강윤이라는 남자로부터 전달받는 이 전율은.
처음 서로의 눈과 마주친 순간부터 느꼈던 떨림 때문일까.
짧다면 짧은 10분이 일과의 중심을 차지했던 그 묘한 두근거림이 문제였던가.
아니면, 두려우면서도 멈출 수 없는 갈증이 원인이었을까.
우린 서로에게 닿고 싶었던 열망이 강했나.
그래서……
이 뜨거운 소름이 견딜 수 없이 짜릿한 걸까.
눈이 내렸다.
서로의 심장을 독차지한 서로처럼 세상을 눈이 온통 독차지했다.
폭신폭신한 눈송이가 뜨거운 불덩이에 닿은 양 밀착한 두 사람의 몸에 내려앉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걷잡을 수 없는 화기였다.
“음…….”
그 화기는 발끝부터 전신으로 퍼지며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숨이 막힌 은재의 입에서 약한 숨소리가 흘렀다.
“아.”
그 소리로 미친놈 같았던 도강윤이 이성을 찾았다.
퍼뜩 정신이 들듯 입술이 떨어졌다.
“…….”
자유를 찾았으나 은재는 넋 나간 채 약하게 헐떡였다. 그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침묵이 전부였다.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일시적인 패닉 상태였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