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은재의 도발에 대한 복수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서로의 눈을 보자마자, 서로의 숨결을 느끼자마자 둘의 흐름은 정지했다.
도강윤과 서은재.
서은재와 도강윤.
너와 나의 범주에만 속한 것처럼 오직 서로만 인식했다.
“도강윤! 거기서 뭐 해?”
그때, 불청객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홀린 두 사람을 깨웠다.
3학년 여학생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어, 은재는 기회 삼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도강윤! 쟤 뭐야!”
“현서야, 그만해.”
“놔, 박재민!”
은재는 걸어가면서도 앙칼진 여학생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자신을 좇는 느낌의 강윤의 시선만 의식되었다.
뒷등이 아찔한 전류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했다.
***
다음 날 점심시간.
‘도망친 주제에 왜 왔을까?’
이성과 달리 은재의 발은 끌리는 대로 후문 정원의 벤치로 향했다.
일말의 두려움이 파고드는 심리 속에서 묘한 기대감이 얽혀들었다.
“나 보러 왔어?”
기대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강윤이 어제처럼 그 자리에 있었고,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은재를 기다리는 거였다.
“나 기다렸어요?”
은재는 그의 능청스러운 질의에 다소 시큰둥하게 반문하며 부러 그에게 등 보이게 벤치에 앉았다.
두 사람의 틈에서 감도는 팽팽한 기류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 있음을 알았다.
“이런 걸 두고 이심전심이라고 하나?”
“우연이라고 칠게요.”
“서은재라 했지?”
“도강윤이죠?”
“원래부터 지는 걸 싫어하는 거야? 나라서 그런 거야?”
“둘 다요.”
“내가 싫어?”
“좋지 않은 건 확실해요.”
“픽.”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약간 오만한 비소 같아서 한층 섹시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좋아져?”
도강윤이 허리를 슬쩍 비틀면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쓱― 그의 얼굴과 함께 선홍의 섹시한 입술도 가까이 접근했다.
“서은재 마음에.”
“느끼한 소리 하지 마요. 마음에도 없으면서.”
허스키하게 깔리는 저음에 홀리지 않으려, 은재는 심중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왜 그렇게 단정해?”
“3학년들은 졸업 앞두고 다들 무료한가 봐요. 매일 한두 명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던데……. 날 두고 내기했어요?”
“적어도 난 아니야.”
“내기가 있긴 한 거네. 그럼 그쪽은 뭐예요?”
“개인적인 사심.”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강윤도 대번 대답했다. 망설이지 않은 태도엔 자신감이 차고 넘쳤는데, 신기하게도 거만하지 않았다.
“왜요?”
“네가 날 맛있게 봤잖아.”
“음.”
기습적인 공격에 은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바람 든 나뭇잎 같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본 그가 재미있다는 듯 옅게 웃었다.
“왜 얼굴을 붉혀? 무슨 상상을 했는데?”
“안 했거든요!”
얄궂은 남자를 상대하기엔 아직 기량이 부족한 걸 은재는 깨달았다. 버럭, 성질을 내며 일어나려는데, 강윤이 덥석 잡았다.
“가지 마.”
“자꾸 놀리잖아요.”
“서은재를 어떻게 놀려.”
은재를 깊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강윤의 음성이 왠지 촉촉했다.
메마른 은재의 심장을 적실 만큼.
“놔요.”
은재는 팔을 흔들었다.
퉁명스럽지만, 의욕은 없는 무기력한 저항에 강윤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윽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매일 10분.”
“네?”
“매일 10분만 여기서 보자.”
“…….”
“내일도, 모레도.”
“됐어요.”
은재는 콧방귀 뀌며 이번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쌩하니 가버리는 그녀의 등 뒤로 나직하게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다릴게.”
바람처럼 날아드는, 오감을 사로잡는 도강윤의 목소리와 함께.
***
“지나가다 들렀어요.”
“픽.”
다음 날, 은재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강윤은 군소리하지 않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 후.
은재와 강윤은 그들만의 규칙처럼 후문 정원 벤치에서 만났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진 않았지만, 특별했다.
서로의 내면에 싹트는 감정을 묵언으로 교류하며, 삼현의 도강윤이 아닌 ㈜정진의 서은재가 아닌, 오직 강윤과 은재로 서로를 느끼는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10분의 시간이 한 시간이 되어가며, 네 시간이 넘어갈 즈음.
12월 31일.
그 해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종업식이라 점심시간도 없는 날인데, 여느 날처럼 그들은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공존했다.
“내일이면 스무 살이네요?”
“응.”
“스무 살이 되면 뭐 할 거예요?”
“뭐 할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황당하다는 듯 핀잔하자, 강윤은 열아홉 살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듣기 좋다.”
“뭐가요?”
“서은재의 반말.”
“아! 또 느끼해!”
강윤의 시선이 은재의 얼굴에 멈추는 순간, 은재는 짜증을 내긴 했지만, 내심 불끈불끈한 심장을 쓸어내렸다.
‘정말 심장에 해로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는 시간의 흐름처럼 더하게 짙어졌고, 서로의 눈빛과 미소에 중독된 것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만날래?”
“네?”
“열여덟 살의 서은재와 스무 살의 도강윤으로서 말이야. 학교가 아닌 밖에서.”
데이트 신청?
“어디가 좋겠어?”
“허락한 거 아니에요.”
“데리러 갈게.”
“하여간, 안하무인이야.”
새침하게 흘기자, 강윤의 입매가 가늘게 늘어났다.
뻗대듯 턱을 들던 은재의 손날이 휘적거렸다. 손짓을 따라 강윤이 순순히 기울였고, 은재는 귓가에다 은밀하게 속닥였다.
“선릉로100길.”
그러곤 일어났다.
그의 눈초리를 누리듯 슬렁슬렁 후문 정원에서 걸어 나갔다.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그는 알 것이다.
함께 공유하는 우리의 시간에 만나면 된다는 걸.
***
“도강윤, 당장 서재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귀가하던 도형호 부회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선릉로100길’을 검색하던 강윤은 곧장 부친의 서재로 불려갔다.
“내 누누이 구설을 조심하라 하였건만.”
강윤이 들어서자마자 아버지 도형호는 책상에다 무언가를 거칠게 던졌다.
“신성한 학교에서 이따위 저급한 짓거릴 해!”
자르르―
밀물처럼 흩어지는 물체는 여러 장의 사진이었다.
주인공은 강윤과 서은재였고, 후문 정원 벤치에서 만나왔던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서로의 입술이 맞닿기 직전의 장면 등등. 각도에 따라선 키스로 오해할 만한 사진도 포함해서.
“감시하세요?”
강윤은 냉정하게 항의했다.
“얼마나 절 옥죄여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감시라니.”
도형호는 흥분하지 않았다. 사뭇 서느런 톤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자세히 봐라, 어떤 사진인지.”
강윤은 차분히 아무 사진이나 집었다. 사진 상단에 영문조합번호와 어제의 날짜, 찍힌 시간대가 있었다.
“학교 CCTV입니까?”
“그래. 학교 곳곳에 깔린 CCTV다. 이걸 어떻게 입수했는지 아느냐? 누군가 김 실장한테 제보한 거야!”
“제보요? 누구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그룹을 염탐하며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기자일 수도 있고, 그룹과 적을 둔 상대일 수도 있고.”
도형호가 언짢은 고갯짓을 했다.
“중요한 건, 제보자의 실체가 아니야. 어떤 자가 호시탐탐 너의 약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지. 이런 자가 한둘이겠어?”
“…….”
“더구나 떠벌리기 좋은 건이 재벌 3세의 염문설 아니겠느냐?”
강윤은 듣기만 했다. 그저 망연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제 막 시작해 보려는데…….
“어디 여자가 없어서 하청기업 딸과.”
도형호의 검지가 사진 손 서은재를 지목했다.
“그쪽에다도 주의 줬다.”
“뭐라고요?”
강윤은 무감각한 신경에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서은재의 처지에 어떠한 파문이 발생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두려웠다.
“서은재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단순히 얘기 몇 번 나눈 정도라고요.”
“두둔하는 거냐?”
“제 감정을 떠보시려거든, 차라리 솔직하게 물으세요.”
“네 반응을 보아하니 물을 필요도 없구나.”
“틀리셨어요. 애먼 피해자를 만들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뻔히 아시면서 왜 일을 크게 만드세요?”
“불씨는 발견 즉시 짓밟아서 꺼버려야지.”
신랄한 질문에 냉혹한 답이 왔다. 잇따라 도형호의 손이 강윤의 뺨을 긁듯이 건드렸다.
“매사 경각심을 갖거라.”
살갗에 생채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강윤은 절망과 같은 통증으로 어금니를 바락 물었다.
“네 행동거지 하나에 수백 명의 모가지가 달려 있다.”
이어서 날아온 건, 위협이었다.
아들에게가 아닌 서은재 측으로 향한 화살.
저 날카로운 눈빛만으로도 자신이 구축한 카테고리를 삭제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아버지였다.
“유학 떠날 채비나 해라. 졸업하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도형호의 말은 끝나지 않았으나 강윤의 귀엔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사람뿐이었다.
‘서은재.’
휙, 강윤은 그대로 돌아섰다.
“내 말 안 끝났어! 도강윤!”
도형호의 고함이 웅장한 저택에 메아리처럼 울렸으나 강윤은 정지하지 않았다.
쏜살같이 삼현가를 벗어나 드넓은 정원을 내달려서 밖으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