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열일곱 살의 서은재.
“도강윤이다!”
세라의 외침에 반 친구들이 은재의 뒷등과 근접한 창가로 우르르 몰려왔다.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3학년 건물 쪽으로 한데 모였다.
“겁나 섹시해.”
“야, 도강윤. 19세에 저토록 치명적이면 구속감 아니냐?”
“우리 도강윤은 볼 날도 얼마 안 남았지? 도강윤 졸업하면 무슨 낙으로 사니.”
도강윤, 도강윤.
전학 온 지 이틀 만에 수십 번은 들은 이름이다.
그뿐이랴.
삼현고등학교의 재단인 삼현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도강윤.
비주얼만으로도 주변인 배경 만든다는 도강윤.
올림피아드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머쥔, 뇌도 섹시한 도강윤.
“미친. 도강윤 셔츠 단추 풀었어.”
“저 어른 쇄골 봐라. 열라, 맛있겠다.”
아예 나방처럼 창살에 매달린 김민서가 군침을 질질 흘렸다.
‘어른 쇄골?’
은재의 초점이 무심코 이동했다. 맹세코 퇴폐적인 마음은 아니라고, 내심 거만을 떨면서도 눈초리는 치밀했다.
“진심으로 도강윤 성인 버전 영접받고 싶다.”
“이 저속한 새끼들아! 우리 오빠한테 성희롱하지 마라! 죽여 버린다.”
“누구 맘대로 네 오빠야!”
이윽고 은재는 3학년 교정의 남학생 무리를 발견했다. 남색 교복을 입은 탓에 영락없이 건달패거리로 보였는데, 그중 단연코 돋보이는 존재가 있었다.
‘아하.’
은재는 한눈에 ‘도강윤’임을 인지했다.
‘저런 비주얼인데 재벌이야?’
친구들의 오두방정을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론 비딱한 심리가 깃들었다.
‘재수 없어.’
17년째 재벌이 꿈인 부친한테 부대낀 처지로선 신의 편애로 태어난 인간한텐 극한의 거부감이 들었다.
‘엮일 일도 없겠지만.’
은재는 시선을 거뒀다.
자신에게 불어닥칠 미래는 예견하지 못한 채.
―열아홉 살의 도강윤.
“날 봐주세요, 하고 서 있네. 천박하게.”
“어쩜. 수준 낮게 너무 표난다.”
“그러게요.”
연회에 참석한 건우건설 허강심 여사가 한편의 여학생을 턱짓하며 이기죽거렸다. 그녀에게 알랑방귀 뀌던 사모님들이 호호호, 맞장구쳤다.
‘또 시작이군.’
강윤은 사모 일행의 시야 반경에 들지 않으려, 가던 길을 되돌렸다. 때마침 접근하던 채종훈이 그에게 건들건들 어깨동무했다.
“쟤야.”
“치워.”
“보기나 해. 쟤라니까.”
강윤의 냉정한 명령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종훈이 저만치를 턱짓했다.
“서은재라고, 1학년.”
“누구?”
“서은재. 전학 와서 첫 출현인데, 졸라 이쁘지? 완전 특A급이야.”
채종훈은 항상 여자의 외모에다 점수를 매겼다. 제 기준대로라면 본인은 C급일 텐데.
“새끼들이 아주 난리가 났다니까. 누가 먼저 차지하는지 한판 한단다.”
“내기한다고?”
“어. 구미가 당겨?”
강윤은 그제야 그쪽을 봤다.
서은재라.
꼿꼿한 자세를 갖춘 여학생이 망막에 들어찼다.
늑대 같은 수컷들의 군침을 흘릴 만하게 생긴 데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몸매를 갖췄으니, 고고한 사모님들의 표적이 될 만도 했고.
“도강윤 눈에도 괜찮은 몽타주이지?”
흥미로운 건 눈빛이다.
피라미드의 높은 단계를 차지했다고 믿는 군상의 모임인 만큼 대외적으론 평화로우나 그 이면엔 먹이사슬의 날카로운 이를 감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표적이 등장하면, 너도나도 첨예한 잣대를 세웠는데, 독사의 혓바닥을 못 견딘 당사자는 눈물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서은재는 달랐다.
주눅 들지 않은 자태로 당돌한 눈빛을 유지했다.
“네가 참여하면 난 무조건 너한테 건다. 너라면 한 큐일 테니까. 할 거지?”
“픽.”
강윤은 입꼬리를 올렸다. 철없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서 발길을 틀었다.
“뭐야, 새끼야!”
종훈이 우락부락하게 외쳤다.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손만 들었다.
***
은재는 아버지의 철저한 계획으로 삼현재단에서 주최하는 삼현고등학교 학부모회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하, 대놓고 상품화하시네.’
1년에 단 1회이며, 학부모와 자녀가 함께 즐기는 행사라는 타이틀로 포장하나, 실질적으론 자제들끼리의 정략결혼을 위한 사교 연회였다.
아버지 서정탁은 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어이 은재를 전학시켰다.
딸이 재벌가 자제의 눈에 띄어 재벌가의 사돈이 되길 학수고대하며.
“네가 서은재지?”
한 남학생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한성제약 차남 한영……. 야, 야! 어디 가?”
은재는 대놓고 무시하고, 야외 정원으로 나왔다. 겉옷을 입지 않아 찬기가 덮쳤지만, 갑갑해서인지 되레 시원했다.
‘결국 저런 멍청이랑 결혼하겠지.’
진작에 정략결혼을 받아들인 은재였다.
세뇌당한 것보단 체념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놈이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싫다.’
씁쓸한 숨을 뱉으며 굵은 나무를 돌 때였다. 불쑥 거뭇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앗.”
은재는 깜짝 놀라며 한발 물러섰다. 드높을 정도로 훤칠한 남자가 눈길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도강윤?’
하늘의 별 같은 남자와의 근거리에 당황하는데, 그가 선홍의 입술을 늘렸다.
“너.”
허스키한 저음.
아찔할 정도로 농염하여, 은재는 저도 모르게 경직했다.
“의도적이야?”
“네?”
“아닌가? 상당히 일차원적인 접근 방식이라.”
도강윤이 냉소적으로 어깨를 으쓱, 했다.
젠체하는 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잘난 탓에 본의 아니게 배어 있는 모태 오만인 데다, 잦은 일에서 비롯된 반격이었다.
하지만, 은재는 짜증 났다.
‘실제로도 재수 없구나.’
삐뚠 마음은 비딱한 무리수를 두기 마련인데…….
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소문대로네요.”
은재는 턱을 곧추세워, 단추 풀린 셔츠 틈새로 드러나는 쇄골을 천천히 훑어 내리며, 자못 은밀하게 읊조렸다.
“맛있게 생겼어.”
***
“뭐?”
강윤은 총을 한 발 맞은 기분이었다.
열일곱 살인 여학생의 조숙한 도발은 매사 의연함을 자랑하던 그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너….”
“이 호텔 에그타르트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아직 못 먹어봤는데, 맛있겠네.”
서은재가 선수 쳤다.
분명 그의 쇄골을 맛보는 듯한 눈초리였는데, 즉각 뒤편의 테라스로 시선을 넘기며 좀 전의 강윤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먹어봐야겠다.”
그러곤 사뿐사뿐 테라스로 가버렸다.
강윤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에 테이블 위의 에그타르트가 잡혔다.
“하, 얕잡아보지 말라 이거지?”
“혼자 왜 웃냐?”
실소하는 그의 곁으로 채종훈이 다가왔다. 녀석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에서 역한 남새가 퍼졌다.
“별난 놈을 만나서.”
“너만 하겠냐?”
강윤의 눈살에 종훈이 얼른 담배를 껐다.
“여자애들이 저렇게 안달복달하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자칫 게이로 오해해, 이놈아.”
채종훈의 손가락질이 강윤을 보기 위해 테라스에 몰려 있는 여자애들을 가리켰다. 영락없이 세자의 간택이 절실한 후궁들 같았다.
“내가 오해 사지 않도록 도와주마. 우리 남자로서 거하게 놀아보자.”
“꿍꿍이가 뭔데?”
“눈치 빠른 놈. 최예지가 스위트룸에서 파티한다는데, 네가 있어야 초대해 준대. 그러니까 나 좀 키워줘라.”
“키나 키워.”
“야! 새끼야! 내가 키 얘기하지 말랬지! 나도 이렇게 앙증맞기 싫어!”
광분하는 친구를 두고, 강윤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안쪽 깊숙이 진입하여 대상을 찾았으나 서은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도망갔네.”
강윤의 한쪽 입술이 설핏 휘었다.
“픽.”
조만간 보자, 서은재.
***
은재는 며칠째 생리통 핑계로 학교 후문 정원에서 점심시간을 때웠다. 급식실에서는 도강윤과 마주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욱해서.’
자신의 황당한 도발이 창피했고, 무엇보다 도강윤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내가 어쩌다.”
접싯물에 코 박는 심정을 절실히 이해하며 정원 벤치에 털썩 앉는데, 3학년 교복의 남학생이 껄렁하게 접근했다.
“서은재?”
무슨 까닭인지 연회 이후부터 똥파리들이 자꾸 꼬였다. 은재는 피곤해서 심드렁하게 올려다봤다.
“저 아세요?”
“우리 학교 애새끼 중 서은재 모르면 등신이지.”
거친 언변은 이 학교 자제들의 특성이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 탓인지 대외적으론 격식을 차리다가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입이 심히 걸었으며 욕을 예사로 했다.
“너 나랑 사귈래?”
침묵하고 있자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누구신데요?”
“신화호텔 채종훈. 날 어떻게 모르지? 나도 나름 유명 인사인데.”
“안 바쁘세요?”
“응. 졸업만 남아서 졸라 한가해.”
“아하.”
“그래서? 나랑 사귄다고?”
“아뇨. 그럴 리가요.”
“왜?”
“제가 얼굴을 많이 따져요.”
“야! 이 잘난 몽타주를 두고 뭘 따져. 이렇게 또렷한 쌍꺼풀에다, 이 깊고 풍성한 속눈썹 봐라. 죽이지 않냐?”
채종훈이 눈꺼풀을 차양처럼 내리깔며 하찮은 외모를 어필했다.
은재는 시큰둥하게 끔벅였다.
“똑바로 못 들었나 본데…… 많이요.”
“많이?”
“네, 많이.”
“어. 알았어.”
고백도 빠르더니 포기도 빠른 채종훈이다. 쉽사리 수긍하고 멀어지는 뒷등을 주시하며, 은재는 쯧 혀를 찼다.
“키나 키우지.”
“쿡.”
별안간 뒤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는데, 뒤편 벤치에서 거뭇한 인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
도강윤이었다.
결단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의 등장인 데다,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은재는 정색했다.
“언제부터 엿들었어요?”
“내가 있는데 네가 왔어.”
“있으면 있다고 기척을 했어야지!”
“내가 왜?”
도강윤이 무심히 턱짓했다.
틀린 소리가 아니라서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필이면.’
원인은 화단이었다.
등받이를 맞댄 벤치의 끝이 사철나무 화단에 가려져 있어, 반대편의 늘어진 다리를 보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가지?’
애먼 화단을 노려보며 궁리를 모색할 때였다.
“그래서?”
불쑥, 도강윤의 얼굴이 벤치의 등받이를 넘어왔다.
“내 얼굴은 어때?”
“네?”
완벽한 이목구비가 코앞이었다. 놀란 나머지 은재는 굳어버렸는데, 그의 치명적인 입술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네 기준에 들어?”
도강윤의 숨결이 은재의 입술을 건드렸다.
여우의 유혹처럼 살랑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