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미안하다.”
“제가 면회를 온 거는, 악어의 눈물 같은 사과를 받기 위함이 아니에요.”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 이제 와 참회한들.
서정탁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떨어뜨렸지만, 은재는 동정하지 않았다.
“아니야. 나는 뉘우…….”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차갑게 잘랐다.
어쭙잖은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았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혈연관계를 끊겠습니다. 딸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은재야.”
“어차피 죽이신 거나 다름없고요.”
“…….”
서정탁은 반박하지 못했다. 죄의식에 휩싸인 채 자포자기했다.
은재는 일어났다.
시간이 남았지만, 울먹이는 서정탁에게 등 돌리고 면회실에서 나왔다.
‘끝났어?’
강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면회실 출입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틈새로 의젓한 눈빛을 내리깔았다.
‘응.’
은재는 무언으로 고갯짓했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도려낸 기분이었다. 이제야 억압에서 벗어난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고생했어.”
강윤은 묻지 않았다. 위로하듯 뒷등을 지그시 눌렀다.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은재는 그윽하게 올려다봤다.
얼마 전 호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현장에서 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강윤은 은재의 자상을 지혈하던 손을 떼지 않았다고.
갈비뼈 사이의 늑간동맥 절단으로 과다 출혈이 발생했고, 이동 중 사망할 확률이 높았지만, 강윤의 응급 처치로 살았다고도 했다.
삼현가 사람들은 은재가 도강윤을 살려줬다고 하지만, 강윤 또한 은재를 살렸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도강윤도 고생했어.”
“난 한 일도 없는걸.”
“없긴.”
은재는 겸손한 미소를 흩뿌리는 그에게 화답하듯 웃어주며, 제 은인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강윤이 은재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고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은재.”
“응?”
“오빠 소리가 영 시원찮아.”
운전을 시작하며 구치소를 빠져나오자, 그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지 부러 엄하게 혼냈다.
“나름의 노력 중이야.”
뚱하게 대꾸하다가, 은재는 발끈했다.
“생각보다 어렵다고!”
“어려워?”
“어. 도강윤과 오빠는 왠지 안 어울려.”
“오빠가 안 어울리는 남자도 있나? 남자는 모두 다 오빤데?”
“일종의 불협화음이지.”
어느덧 은재의 속을 짓눌렀던 음울함이 완전히 소실했다. 밝은 기세를 되찾은 은재는 사뭇 얄미운 투로 덧붙였다.
“기억해 봐. 학교 다닐 때도 죄 도강윤, 도강윤 하지 않았어? 오빠라고 불렀던 후배 있어?”
“음….”
강윤의 눈썹이 미간으로 집합했다.
“없지?”
“없어. 형이라도 부른 녀석도 없어.”
그의 빠른 인정에 은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면서 핸들을 잡지 않은 그의 손바닥 밑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거 봐. 역시 도강윤은 도강윤이어야 제맛이야.”
“제맛?”
강윤이 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끼며, 은근한 눈빛을 던졌다.
“나는 어떤 맛인데?”
뉘앙스가 심히 엉큼했다.
“하여튼!”
은재는 째려보며 손을 빼려고 했다. 파닥거리는 손을 강윤이 굳세게 잡고서 놓질 않았다. 그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내부를 채웠다.
***
“잠깐.”
“응?”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강윤의 손이 은재의 두 눈을 가렸다. 영문을 모르는 은재는 그의 이끌림에 따라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야외 테라스로 나왔음을 인식했을 때.
쓱―
가림막 같던 손이 떠났다.
“아.”
은재의 눈앞에 눈부신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너무 근사해.”
푸르른 하늘 아래.
초록의 잔디밭에 버진 로드처럼 하얀 꽃잎이 뿌려진 길을 따라 하얀 백합과 장미로 조성된 풍성한 생화 장식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길 끝엔 흰 커튼 캐노피가 바람의 흐름 따라 부드럽게 하느작거리고 있었다.
“퇴원 기념 이벤트, 이런 거야?”
“서은재를 위한.”
강윤이 으쓱했다.
“언제 이렇게 꾸몄어?”
“어제, 오늘. 장장 이틀에 걸쳐서.”
“아침 일찍 다녀올 데가 있다더니, 이것 때문이었어?”
“으흠.”
“혼자서 이걸 어떻게….”
“내겐 정 비서가 있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는 그의 너스레에 은재는 기분 좋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
“정말 예뻐.”
사뿐사뿐, 꽃잎 길을 나아갔다.
캐노피 밑에 도착하여, 물결처럼 하느작거리는 천을 허리에 감고 빙그르르 도는 그녀를 강윤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멋진 야외 결혼식장 같아.”
천과 장난치던 은재의 손이 흰색 천이 덮인 테이블 위의 싱그러운 생화로 옮겨갔다.
보들보들한 꽃잎을 매만지는 은재의 입술에도 웃음꽃이 만개했다.
“서은재.”
“응?”
다정한 부름이 들렸다.
무념하게 고개를 드니, 강윤의 안광에 반지르르한 윤기가 돌았다.
“우리 결혼하자.”
“……!”
놀란 은재의 사고가 정지했다.
예상했다는 듯 강윤이 여유롭게 생화 장식 속에 감춰놓았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열린 상자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커플링이 담겨 있었다.
“어른들로 인한 정략결혼이 아닌,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원하는 진짜 결혼.”
강윤이 그윽하게 내려다봤다. 무한한 사랑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가 신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반지를 올리며, 정식으로 청혼했다.
“내 진짜 아내가 되어줄래?”
은재는 눈물이 핑 돌았다.
감동으로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올랐다.
꽤 오랫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높고 견고하던 장벽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뿐만 아니라.
트라우마처럼 끈질기게 머릿속을 괴롭히던 사념도 말끔히 사라졌다.
“하…….”
은재는 멎었던 심장에 산소를 불어 넣었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반지를 받아 들었다.
“응.”
강윤이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은재의 목덜미를 감으며 뜨겁게 키스했다. 그들의 주위를 맴도는 꽃향기처럼 짙은 사랑을 전하며.
***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은 은재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이 흡족했다.
‘암튼 이 남자는 눈썰미도 완벽하다니까.’
감각 뛰어난 남자가 준비한 원피스는 늘씬한 허리선을 강조했을 뿐 대체로 담백한 디자인이었는데, 고결한 웨딩드레스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순결한 느낌인 게 양심상 걸리지만.”
두 번째인 데다―둘 다 한 남자지만―진즉 퇴폐에 물들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뭐.”
은재는 긴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묶고서, 야외 테라스로 돌아갔다.
그사이 검은색 슈트로 갈아입은 강윤이 백합 꽃다발을 든 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근사했다.
“도강윤.”
은재는 치맛자락을 사락거리며 그의 곁으로 갔다. 그녀의 자태를 보자마자 강윤의 입술이 매력적으로 벌어졌다.
그 표정도 완벽해서, 은재도 싱그레 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 결혼식 할까?”
강윤이 꽃다발을 전달했다.
은재는 부케 같은 백합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짐짓 새침한 눈짓을 했다.
“재혼식이야.”
“픽.”
강윤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은재도 비슷한 눈매로 웃으며, 그의 팔뚝에 팔짱을 꼈다.
드디어.
두 사람만의 재혼식을 시작했다.
서로의 초점을 놓지 않고서, 광채 같은 미소를 흩뿌리며, 하얀 꽃잎이 깔린 로드를 거닐어, 하늘하늘한 캐노피 아래 도착했다.
“다시, 내 아내가 되어줘서 고마워.”
“내 진짜 남편이 되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의 눈을 품고서, 감사함과 소중함을 일깨웠던 지난날들의 감정을 되새기며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특별하진 않지만, 특별한 의식이었다.
“사랑해.”
감미로운 속삭임처럼 강윤이 은재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산뜻하게 입술을 늘린 은재는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까치발로 섰다.
“사랑해.”
도발적인 여자는 입맞춤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며, 달콤한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입술을 떼자마자 강윤이 은재의 두 발이 공중이 뜨도록 번쩍 안아 들었다. 붕 뜬 몸을 어쩌지 못한 채 은재는 당황했다.
“뭐 하는 거야?”
“다음 의식을 치러야지.”
“꺅!”
은재는 한껏 고대하면서도, 내숭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강윤은 어림도 없다는 듯 바락 안은 채 거침없이 나아갔다.
***
우아하게 묶었던 은재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다디단 꿀을 취하듯 달콤한 키스를 하던 강윤이 입술을 떼고, 뜨겁고 그윽한 안광으로 들여다봤다.
강윤의 손이 올라왔다.
스르륵.
은재의 머리끈을 빼내는 느른하고 부드러운 손길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커튼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들어 올려, 다정히 입 맞췄다.
“훗.”
은재는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으며, 대범하게 그의 허벅지 위에 타고 올랐다. 그리고 열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오히려 능숙한 강윤의 입술과 혀가 은재를 사로잡았다. 길고 보드라운 머리카락 속에 큰 손을 찔러 넣고, 진하게 키스했다.
입안을 구석구석 탐하는 그의 키스에 찌릿찌릿한 소름이 돋았다.
꼼꼼히 키스에 몰입하던 그의 입술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은재의 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하.”
터질 듯한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는 어느 때보다 정성스러웠고 성실했다. 금세 자신을 쟁취한 그로 인해 은재의 숨소리에 열이 올랐다.
“음… 도강윤.”
머리끝까지 몰려오는 아찔한 전율로 몸을 뒤틀었다.
“어서.”
재촉할 정도로, 은재는 참을성을 잃었다.
그의 열기와 온기를 한꺼번에 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