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절히 널 원해-74화 (74/84)

74.

“할아버지, 우리 산책하러 가요.”

“그럴까?”

은재와의 산책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는 도성만 회장이 얼른 휠체어를 가져왔다.

“이젠 걸을 수 있다니까요. 내일이면 퇴원하고요.”

“어차피 오늘로 휠체어는 끝이잖아. 마지막 승차를 즐겨.”

“할아버지 힘드시잖아요.”

“어서 가자. 기온이 좀 차졌으니까, 옷 단단히 채비하고.”

그의 채근에 은재는 하는 수 없이 카디건을 걸치고 휠체어에 앉았다. 도성만 회장은 능숙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절 왜 꼭 휠체어에 태우세요?”

“은재 너도 날 이렇게 산책시켜 줬잖아. 나도 보답해야지.”

“보답이라뇨. 할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게 훨씬 더 많은데요.”

“은재 네가 훨씬 많아.”

“제가 뭘요?”

산책로의 볕 좋은 자리에 세워놓고서 도성만 회장이 앞으로 왔다. 벤치에 앉은 그가 은재의 손을 잡으며 살살 보듬었다.

“강윤이 행복하게 해준 거.”

“할아버지.”

“강윤인 냉엄한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제 감정은 꾹꾹 눌러 살던 놈이야. 그랬던 놈이 요즘은 나사 풀린 것처럼 헤벌쭉해서 다니잖아.”

“맞아요, 나사가 수십 개는 빠진 것 같아요.”

“보기 좋잖아.”

허허, 웃어젖힌 그가 되물었다.

“왜? 은재는 싫어?”

“싫진 않지만, 회장님께 혼날까 겁나요.”

“괘념치 말아.”

“왜요?”

“걔 아비도 혼쭐이 난 바람에 예전보단 무던해졌어.”

말뜻을 가늠할 수 없어 은재는 갸웃했다. 도성만 회장이 어영부영하게 넘기더니,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갈까?”

“또 먹어요? 저 소화도 안 되었어요.”

“많이 먹어야 회복이 빠르지.”

“저 다 나았다니까요.”

은재의 볼멘소리를 무시하고, 휠체어 바퀴가 편의점을 향해 빙그르르 돌았다. 단란한 두 사람의 주위로 선선한 바람이 머물렀다.

***

삐―

“회장님, 도 상무님 오셨습니다.”

인터폰에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결재 서류 검토에 여념 없던 도형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단정하게 매무새를 갖춘 강윤이 들어서서 묵례했다. 넥타이는 물론 넥타이핀, 커프스단추까지 완벽하게 갖춘 모습에 도형호는 흡족했다.

“앉아라.”

“네.”

중앙 소파에 착석하는 아들을 보며, 도형호도 책상을 돌아 나왔다.

“은재는 내일 퇴원한다고? 몇 시에 하느냐?”

“교수님 회진이 끝난 후가 될 테니, 오전 10시쯤 될 듯합니다.”

“그래서 연차를 냈구나.”

“네.”

“3일이나 냈던데? 주말까지 합치면 장장 6일은 휴가고.”

“겸사겸사 쉬려고요.”

에둘러대는 낌새가 의심스러웠다.

도형호는 실눈을 뜨고 아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여느 때보다 혈색이 맑았고, 눈빛도 서글서글했다.

‘신기한 노릇일세. 아들의 눈빛이 변하다니….’

새삼 깨달은 도형호였다.

아들의 소중함을.

서정탁의 피습으로 잃을 뻔했던 아들이었다.

만일, 그 일로 크게 다쳤거나 목숨이 끊겼더라면, 아들과 마주 앉아 있는 이 평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아들을 구했던 서은재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더라면, 아들의 이런 표정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사한 일이었다.

“은재와 여행이라도 가려는 거냐?”

“별장에서 쉴까 합니다.”

“이왕이면 날을 길게 잡아서 해외로 가지. 연차도 상당히 남았잖느냐?”

의외의 발언에 강윤의 눈썹이 들썩했다. 도형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부연했다.

“병원에 있느라 갑갑했을 테니, 딱 트인 데서 여가를 즐기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저도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2차 상생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고, 은재도 장거리 비행은 무리일 듯해서요.”

“하긴. 아무리 젊어도 큰 수술을 한 몸이니…….”

부자(父子)의 대화가 제법 술술 이어졌다.

도형호는 자신의 편한 화법이 아들에게도 작용했음을 인지하며, 무의식중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힐끗 일별한 강윤의 입가도 설핏 길어졌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라.”

“은재가 퇴원하면, 혼인신고를 하려고요.”

“혼인신고? 이렇게 갑자기?”

느닷없는 통보에 여유롭던 도형호는 당황했다. 결단을 내린 듯 강윤의 안광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재결합을 승낙하셨잖아요.”

“암만 그래도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세간의 이목도 무시할 수 없고.”

“병원에서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아버지의 반대를 맞닥뜨린 강윤은 솔직하게 피력했다.

“제가 은재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야겠다고.”

“흠.”

도형호는 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응급수술을 앞뒀던 은재에게 법적 보호자로 남아 있는 사람은 가해자인 서정탁뿐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고, 의료인인 원 교수의 동의로 수술할 수 있었다.

“저는 두 번 다시 은재의 보호자 자격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허락은 하마.”

아들의 강경한 표명에 도형호는 한발 물러섰다.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세요.”

“나와 네 엄마를 혼인신고 증인으로 등록하거라.”

아들의 첫 번째 혼인신고 증인은 도성만 회장과 서정탁이었고, 당시에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꼈던 도형호였다.

이번만큼은 사수하련다.

“저야 감사하죠.”

강윤의 입술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얼빠져서는.”

괜한 심술에 도형호는 이맛살을 구겼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도 실룩 올라갔다.

***

탁.

욕실에서 씻고 나온 강윤이 조각처럼 아름다운 상체를 드러낸 채 소파로 걸어갔다. 어스름한 조명의 빛을 받은 몸이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미리 준비해 온 티셔츠를 입는 그의 뒷등을 좇던 은재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군침을 삼켰다.

“잘 자.”

슬쩍 넘겨본 강윤이 간단히 인사하고, 병실 내부의 불을 끄더니 보조 침대에 드러누웠다.

평소에 해주던 이마 뽀뽀도 없이.

‘오늘은 왜 이리 성의가 없지?’

문의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병동 복도의 빛이 어스름하게 비쳐들어, 그의 완벽한 뒤태가 망막을 희롱했다.

‘피곤한 거야? 심드렁해진 거야?’

불평 가득한 눈초리를 던지던 은재는 부러 은근한 음색을 냈다.

“강윤 오빠.”

“응?”

강윤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왜 그 멀리에서 자?”

은재가 병원에 입원한 후, 괜찮다고 하는데도 쭉 병실 보조 침대에서 불편한 잠을 자는 강윤이었다. 더한 불만은 보조 침대를 가장 먼 쪽 벽에다 붙였다는 거였다.

“여기가 편해서.”

“이리로 오면 안 돼?”

“안 돼.”

“왜?”

“잘 자.”

대답을 회피한 강윤이 무정하게 돌아누웠다.

“야! 도강윤!”

발끈, 성질이 올라온 은재는 베개를 그에게 던졌다.

퍽! 제대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강윤이 황당해하며 일어났다.

“은재야.”

“왜 내 옆으로 안 오는데? 나한테 냄새나서? 나 인제 씻어!”

“뭐?”

수술로 인해 한동안 제대로 씻질 못했던 은재는 오해했다. 황당한 듯 실소한 강윤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은재는 뽀로통하게 그를 노려봤다.

“오늘도 씻었어.”

“하.”

강윤의 잇새에서 탄식 같은 숨소리가 터졌다.

“미치겠다, 서은재.”

그러곤 콧잔등을 찡그리며, 큰 손으로 은재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왜?”

“내가 죽도록 참고 있는 거 모르지?”

“음?”

“사리가 나올 판이라고. 이 앙큼한 여자야.”

비로소 은재는 강윤의 인내를 깨달았다.

행여 곁에서 자다가 못 참고 건들기라도 해서 은재가 아프게 할까 봐 수행하는 심정으로 멀리서 자는 거였다.

“도강윤.”

은재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서 입술을 포개었다.

쪽.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는 내일 퇴원하잖아.”

실룩.

강윤의 눈썹이 동요했다.

“지극히 건강해졌고…….”

은재는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며 손은 티셔츠 밑으로 집어넣었다. 대범한 유혹에 강윤의 탄탄한 복부 근육이 꿈틀했다.

“앞으로는 더 건강해질 거고….”

유혹적인 손가락이 촘촘한 복부의 근육을 계단처럼 올랐다. 그의 탄력적인 살결에 도사리는 긴장감을 느끼는 순간이 은재는 한없이 즐거웠다.

“흠.”

강윤의 잇새에서 뜨거운 숨소리가 흘렀다.

그의 허스키하고 섹시한 숨소리를 느끼며, 은재는 그의 입술 곡선을 부드럽게 삼키며,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오랜만인 키스였다.

입안의 숨결을 공유하며, 서로의 혀를 맞물었다.

“하, 은재야.”

강윤의 갈라진 목소리가 틈새로 토해졌다.

“널 미치도록 원해.”

그리고 은재의 목덜미를 부여잡아 바짝 당기고서 굶주림에 시달린 키스를 퍼부었다.

“나도.”

두 사람은 격렬한 키스 속으로 빠져들었다.

깊은 키스를 나누면서도, 은재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자신이 그를 얼마나 원하지는 세세하게 전했다.

그를 원한다.

오직 그만을.

그녀의 강렬한 갈망을 느낀 그의 심장박동이 불끈불끈 뛰었다. 은재의 손바닥을 통해 그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강윤을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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