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길 기자!”
휭하니 가버리는 그를 서정탁은 얼른 쫓으려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때, 옆 테이블의 손님이 탄성처럼 큰 소리를 내질렀다.
“어머! 삼현그룹 회장 아들이 혼외자였대!”
“정말?”
“어, 기사 엄청 많이 떴는데?”
뭐라고?
서정탁은 갈고리처럼 그녀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질겁한 그녀가 소리쳤으나 그는 악착같이 기사 전문을 읽어 내려갔다.
―도형호(57) 삼현그룹 회장이 언론사를 통해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라며 외아들 도강윤(30) 상무가 혼외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도 회장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아내인 민경애(56)와 아들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졌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장성한 아들은 용서로 자신을 보듬었다. 그에 따른 고마움을 전하고, 다른 면으로는 실망을 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었다”라며 고백의 배경을 밝혔다. …(중략)
삼현 도형호 회장의 불륜 상대는? 영화배우 백지연?
연관 기사의 제목도 눈에 들어왔다.
“하!”
서정탁의 손이 무기력하게 풀렸다. 질색한 여자들이 제 핸드폰을 회수해서 그를 노려보며 물티슈로 벅벅 닦았다.
그때, 식당으로 곱슬머리에 통통한 남자가 들어섰다. 곧장 다가온 그가 능글능글한 태도로 물었다.
“서정탁 씨 되시죠?”
“그렇소만.”
“기막힌 걸 전달해 드릴게요. 수고하십시오.”
신분 확인을 한 남자는 다짜고짜 서류 봉투를 건네고서 가버렸다.
영문을 모르기에 서정탁은 무심히 봉투를 뜯었다.
“이게 뭐야?”
봉투의 내용물은 딸인 서은재에 대한 ‘접근금지 임시조치 결정문’이었다.
서정탁은 알아차렸다.
이 모든 술수를 조종한 이가 누구인지…….
“도강윤!”
이놈이 선수를 치다니.
만만히 여겨선 안 될 놈이었건만.
“네놈이 감히 날 우습게 여겨.”
주먹을 쥐고 파들파들 떠는 서정탁의 눈알이 희번덕희번덕했다.
***
상생 프로젝트 미도 작가 특별전의 화려한 개막식이 열렸다.
전시회의 주체인 미도 작가는 불참했지만, 아트미디어 등 볼거리가 풍부한 전시회기에 개막식인데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울러, 혼외자 고백 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도형호 회장 대신 민경애 여사가 개막식 테이프를 끊었고, 가장 비싼 값으로 작품을 구매하며 우아한 미소로 인터뷰도 진행했다.
“저도 미도 작가의 팬입니다.”
“며칠 전 미도 작가님께서 5억이라는 큰 금액을 기부하셨고, 삼현에서는 그에 동참하며 삼현어린이재단을 설립한다고 발표하셨잖아요.”
“네, 삼현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죠.”
“민경애 여사님께서 추진하셨다던데, 재단을 직접 이끄실 건가요?”
“아니요. 재단을 올바르게 이끌 만한 분을 모실 계획입니다.”
“혹시 그분이 미도 작가님이세요?”
“글쎄요.”
민경애 여사는 계획대로 모 여성지를 통해 심경을 밝혔다. 그 후 ‘고결한 어머니’로 만인의 찬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에 따른 손실도 따랐지만.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요?”
“그럼요.”
“외람되지만, 많이들 궁금해하셔서요.”
“편히 말씀하세요.”
“미도 작가님과 도강윤 상무님의 로맨스가 장안의 화제잖아요. 여사님께서는 두 분의 재결합을 찬성하십니까?”
“물론이죠. 아들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대단한 어머니세요.”
아들의 로맨스에 열렬히 응원하는 어머니 역할을 연기하는 것.
이러다간 두 사람 재혼식에 꽃바구니를 들고 설치게 되는 건 아닐는지.
“어머니는 의외로 인터뷰를 즐기는 듯하군.”
“예, 고결한 어머니로 인기가 아주 좋으시답니다.”
기자와 열성적으로 인터뷰 중인 어머니를 먼발치서 관망하며, 강윤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곁의 호석이 속닥속닥 주워섬겼다.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인터뷰를 거절하지 않으세요. 강의도 잡히셨다는데요?”
“강의까지? 어머니는 대외적인 활동을 질색하셨는데?”
“적성을 찾으신 거죠.”
“상생 프로젝트의 다음 주자는 어머니일 수도 있겠군.”
“저도 장담합니다.”
호석의 응수에 강윤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되씹었다. 한순간에 입지가 뒤바뀐 부모님이지만, 마냥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기고만장했던 아버지의 기가 눌린 건 안타깝지만, 덕분에 아들뿐이던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셨으니.
“참, 서정탁 씨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한편, 강윤이 고용한 이인규의 깔끔한 일 처리로 접근금지 결정문을 전달받은 후 서정탁은 자취를 감췄다.
언뜻 백지연 측에 접근했다가 소득 없이 내쫓겼다는 소식은 들었다.
세간에 강윤의 친모로 밝혀진 백지연도 제 코가 석 자인데.
“별일 없겠죠?”
“은재는?”
“작은 사모님이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죠.”
“그럼 됐어.”
강윤은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은재만 무사하고 평온하면 되었다.
‘보고 싶네.’
복잡한 일들을 해결하느라 일주일 넘게 만나지 못한 은재였다. 은재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 행사가 끝나면 목포로 가야겠어.’
“상무님.”
그의 상념을 깨우며, 배 책임이 직원과 함께 한지로 포장된 커다란 액자를 들고 왔다.
“작가님께서 따로 준비하신 작품입니다. 상무님 선물이라고 하셨어요.”
“선물이요?”
“네, 꼭 오늘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고마워요.”
은재가 준비한 선물이라.
“제가 들게요.”
기대감과 섞이는 설렘을 가진 채 선물을 받아 드니, 호석이 얼른 가져갔다. 강윤의 턱짓에 그가 포장을 풀었다.
“우와! 멋있다.”
커다란 액자에 담긴 사진을 먼저 본 호석이 턱이 빠질 만큼 감탄사를 터트렸다.
미리 알고 있던 배 책임과 직원이 키득거리며 강윤의 반응을 고대했다.
‘이 여잔 이걸 언제…….’
뒤늦게 사진을 본 강윤은 기막혔다.
등대 언덕에 서 있는 강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람결 따라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두고서, 그는 어딘가를 보며 눈매를 설핏 늘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선 끝엔 서은재가 존재했으리라.
“이야! 우리 상무님, 끝내주게 멋있으시다. 한류로 나가셔야겠어요.”
“흰소리 그만하고, 차에 가져다놔.”
“예!”
호석을 도와 백 책임과 직원이 주차장으로 가고, 강윤은 전시장 분위기를 여유롭게 살폈다.
무심히 전시장 입구를 볼 때였다.
몰려 있는 관람객 틈에서 낯익은 사람을 포착했다.
“씩.”
강윤의 입매가 저절로 길어졌다.
***
은재는 남모르게 전시회장에 도착하여, 미도 작가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과 섞인 채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남자를 찾았다.
‘저깄다.’
잠시 후 압도적인 아우라를 뽐내는 도강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제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입술에 미소가 만발했다.
‘도강윤!’
은재는 마음속으로 그를 열렬히 불렀다.
그녀의 텔레파시가 통한 듯 강윤의 눈길이 이쪽을 향했다.
드디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은재는 슬쩍 손을 들으며 입 모양으로 인사했다. 그녀를 발견한 강윤의 입술도 매력적으로 휘었다.
저벅저벅.
그는 주저하지 않고서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폴짝 뛰어나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은재는 도도하게 참았다. 여느 때처럼 명쾌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그때.
평화로운 인파 틈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응?’
서정탁임을 알아본 순간, 은재는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발견했다.
살기 띤 칼의 목표는 강윤이었다.
“안 돼!”
은재는 반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본능을 다해 강윤의 몸을 끌어안았다.
푹―!
동시에 서정탁의 칼이 은재의 몸으로 서슴없이 파고들었다.
“아…….”
“은재야!”
주르륵 미끄러지려는 은재를 강윤이 붙잡았다.
그의 팽창한 동공이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들어왔다.
경악 이상의 충격받은 얼굴이 안쓰러워 매만져 주고 싶었지만, 눈앞이 까마득하니 멀어졌다.
***
“깍!”
“강윤아!”
“상무님!”
끔찍한 피습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인터뷰 중이던 민경애 여사와 주차장에서 돌아오던 호석이 혼비백산해서 달려왔다.
“은, 은재야.”
서정탁은 뒤늦게 자신이 찌른 사람이 은재임을 깨달았다. 칼을 떨어뜨리고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도망치려 했다.
“잡아요!”
용감한 시민이 나섰고, 행사장 보안 요원이 그를 도와 서정탁을 제압했다.
“은재야…….”
강윤은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꺾이는 은재를 부여잡았다.
“정신 차려.”
정신이 아득했지만,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급히 행커치프로 손을 감싸서 왈칵왈칵, 시뻘건 핏줄기를 쏟아내는 은재의 몸을 지혈했다.
“서은재!”
“도강윤….”
강윤을 올려다보는, 나뭇결 같은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들었다.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힘겹게 웅얼거렸다.
“…미안해.”
그리고 눈꺼풀이 맥없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