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작가님, 어젯밤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작입니다.”
민서의 전달로 비닐 포장된 책 몇 권이 은재의 품에 안겼다. 눈에 익숙한 책 표지를 보며, 은재는 반색했다.
“작가님 증정본은 택배로 도착할 겁니다.”
“와, 순식간에 나왔네.”
“작품이 좋은데 길게 끌 이유 있나요? 작가님, 고생하셨습니다.”
“예, 대표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민서와 은재는 인사도, 책과 사인도 주거니 받거니 장단을 맞췄다.
책의 속지에다 ‘고맙다’라는 표현을 잊지 않은 은재의 사인에 활짝 웃은 민서가 슬며시 새 계약서를 내밀었다.
“작가님, 새 계약서에도 사인 부탁드려요.”
“계약서를 왜 또?”
“반응도 좋고, 메모리에 작품도 워낙 많고 해서요. 저희가 적절하게 분배해서 시리즈로 나올 계획을 세웠거든요.”
“이래서 오셨군요, 대표님.”
“겸사겸사, 꿩 먹고 알 먹고.”
야무지게 계약 사인을 받아내며 소정의 목적을 이룬 민서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인제 간다.”
“바로?”
“데이트 있다니까. 지금 가도 저녁 되겠어.”
“하긴.”
“다음엔 옷 가방 싸들고 올 테니까 재워줘야 해.”
“글쎄. 그때 봐서.”
“얄미운 년.”
구시렁거리는 친구를 은재는 선착장까지 배웅했다.
뼛속 깊이 사업가가 된 민서는 페리호를 타기 직전 또 다른 제안을 던졌다.
“먼젓번에 보니까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더라. 그 카메라 작품도 출간하는 게 어때?”
“필름은 취미로 찍는 거야.”
“아날로그 감성이 매력인 시대잖아. 이 점 고려해 주세요, 작가님.”
“내 뿌리까지 쪽쪽 빨아먹을 속셈이지?”
“사랑해요, 작가님.”
뻔뻔한 민서가 떠난 후, 은재는 생각난 김에 암실로 들어갔다.
미리 건조해 뒀던 필름의 인화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은재에게는 힐링이었다.
암등의 붉은 빛은 심리를 안정시켰으며, 현상액 담긴 인화지에 필름의 상이 드러나는 순간은 달뜬 설렘을 안겨줬다.
“이건 가장 최근 거네.”
남모르게 간직했던 기억의 비밀을 꺼내는 기분이랄까.
“뭐가 나올 거니?”
검은 얼룩이 또렷한 윤곽을 그리며, 숨어 있던 상이 서서히 나타났다.
“아…….”
일순 은재는 아연했다.
“두 분도 찍어드릴까요?”
결과물엔 페리호에서 만났던 남학생이 찍어줬던 은재와 강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은재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자신에게 밀착시킨 강윤의 표정은 달랐다.
감정이 풍부했다.
환하고.
고결하고.
이토록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남자였다니…….
‘이런 표정이었구나.’
심장이 조였다.
아리도록 아프게 옥죄는 심장으로 끅끅거리던 은재의 망막이 인식할 새도 없이 젖어들었다.
‘보고 싶어.’
뜨겁고 짠 눈물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고, 흐느낌처럼 감정이 새어 버렸다.
“보고 싶어, 도강윤.”
양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질끈 감아도 소용없었다.
그때.
“은재야.”
암실 너머에서 강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상무님, 어디십니까?
―안녕하세요, 상무님. J금융 한 실장입니다. 재무팀 결재 관련해서…….
―도강윤 상무님, 대만지사 주재원 김형욱입니다…….
쉴 새 없이 핸드폰이 울렸지만, 강윤은 전부 무시하며 쉴 틈 없이 운전했다.
―목포 도착했어.
―한 실장님, 재무팀 김 팀장님께 일임했으니….
―김형욱 주재원님, 중고차 수출 이슈는 영업 3팀 오상식 과장님과 논의하십시오.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페리호에 오른 후에야 업무 관련 메시지에 회신했다. 회신이랄 것도 없었다. 죄 떠넘기는 답변이었으니.
업무를 미뤄본 적 없던 강윤이었지만,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제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도 될, 한 사람에게 달려가는 길이었기에.
―상무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호석의 답장을 읽고 강윤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겨우 한숨 돌린 강윤은 난간에 팔을 걸친 채 아련히 바다를 응시했다.
오롯이 은재만 생각하며.
“우리 관계, 그만 끝내자.”
실상은 숨기고, 그 말을 내뱉기까지 네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은재야.’
짠한 마음이 깃들어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바다를 횡단하는 페리호의 속도는 왜 이리 더딘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뿌웅―
이윽고 우렁찬 기적 소리와 함께 페리호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린 부둣가로 나오자마자 강윤은 질주했다.
숨 가쁘게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올라, 닫히지 않은 대문에 도달했을 땐 안도의 숨마저 나왔다.
“은재야.”
컴컴한 미닫이문을 마주하며 행여 ‘네가 이곳에 없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에도 떨었다.
“은재야, 나 왔어.”
만약, 이곳에 없으면.
너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암담하기도 했다.
유럽을 숱하게 뒤졌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던 너인데.
이대로 널 또다시 잃어버린다면…….
드르륵―
아득한 시야 너머 미닫이문이 느리게 열렸다.
은재는 무표정하게 나왔지만, 눈빛은 미묘한 두려움이 뒤엉켜 있었다.
“왜….”
건조한 입술을 축이며, 그녀가 헛기침했다. 그러고선 쌀쌀맞은 목소리를 냈다.
“왜 왔어?”
강윤은 줄곧 보고 싶었고 그리웠던 여자를 잠시도 놓지 않고서 지그시 바라봤다.
‘너는 모르는구나.’
네 눈동자에 붉은 기가 감도는걸.
사나운 표정을 가장하지만, 너의 갈색 동공은 바람맞은 나뭇잎처럼 흔들리는데.
“불편하게 여기까지…….”
강윤은 움직였다.
성큼성큼, 주저 없는 걸음으로 직진하여 은재의 팔목을 휙 잡아, 제게로 강하게 당겨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풀썩.
맥없이 휘청하며,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가두듯 으스러지게 안았다.
“…도강윤.”
“쉿.”
들썩이는 머리통도 억압하듯 누르며, 짤막한 호흡으로 가로막았다.
“알아.”
단호한 말소리에 은재는 미동을 멈췄다.
“내가 다 아니까, 그냥 있어.”
“…….”
“있어도 돼.”
못다 한 감정을 다독이고 있었다.
네 사정을 아니, 내 곁에 있어도 된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다.
내가 있으니, 너는 그냥 마음을 놓아라.
내 곁에만 있어라.
“하아.”
강윤의 몸짓, 확고한 목소리만으로도 은재는 그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숨겨진 본심을 헤아린 남자의 심해 같은 감정을 세세히 느꼈다.
“흑.”
은재는 결국 울고 말았다.
강윤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그의 품에 파묻힌 채 애처로울 정도로 심장을 불끈불끈 들썩이며, 애써 억눌렀던 감정을 토해냈다.
“흑흑.”
강윤은 듬직한 나무처럼 그녀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안았다. 안쓰러움과 안도가 교차하는 눈동자에도 붉은 노을이 졌다.
***
밤이 바다로 내려앉았다.
먹먹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멍한 은재에게 강윤이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옆에 앉았다. 은재는 까만 수평선에 뒀던 눈길을 거뒀다.
“고마워.”
“진정이 좀 됐어?”
강윤의 음색은 세심하고 차분했다.
“응. 덕분에.”
자신의 기분을 헤아리는 배려에 은재는 잔잔히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강윤이 내린 커피는 여느 때보다 향긋했지만, 말을 시작하는 입술은 썼다.
“아빠를 만난 거지?”
“음.”
“하, 진짜 양심 없어.”
그의 묵묵한 고갯짓에 칠흑의 바다 같은 절망이 밀려들었다.
“미안해.”
“서은재가 내게 미안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은재가 죄인처럼 떨군 시선을 들지 못하자, 강윤이 다소 냉담하게 지적했다.
“뭔지 알아?”
“숨기고 도망간 거.”
“잘 아네.”
“어쩔 수 없었어.”
은재는 체념 어린 한숨을 쉬었다.
“나의 아빠, 서정탁 씨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아버지를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잘잘못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데다, 출소한 후에도 자기 성찰은커녕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지 않은가.
“아니까, 더더욱 내가 필요한 거야.”
강윤이 은재의 손을 꾹 쥐었다.
큰 손에 그득하게 담긴 손으로 따스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거야.”
“해결이 어디 있어. 천륜은 끊을 수 없는데…….”
“끊고 싶어?”
“마음 같아선 수백 번.”
아빠의 존재는 엄마와 아기를 잃었던 날의 아픈 기억에 매개체였다.
아빠를 마주하자마자 아물지 않은 채 심장에 딱지로 응고되었던 상처가 터져 버렸다. 또한, 그 지독한 이기심을 더는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법으로도 친족관계는 소멸시킬 수 없잖아.”
“잘라내기 어렵다면, 경계를 둬야지.”
“경계?”
“접근금지신청을 하는 건 어때?”
“나하고?”
“그분의 표적이 되는 전부.”
“가능할까?”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일단 서은재와는 반드시. 그래도 되겠어?”
그는 신중했다.
딸의 입장을 존중하며, 은재의 의중을 꼼꼼히 재확인했다.
“네가 허락하면 최 변호사님께 맡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