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개의치 마십시오. 며칠 철야를 해서 그렇습니다.”
“몸 챙기면서 일해라.”
“네.”
눈에 띄게 수척한 강윤의 얼굴이 못내 거슬린 도형호가 잔소리하듯 부언했다.
강윤은 감흥 없이 차에 오르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
오후 3시.
체결식이 끝난 후, 비즈니스 센터에서 빠져나온 강윤이 뒷좌석에 오르자, 호석이 호들갑스레 룸미러로 넘겨다봤다.
“상무님, 식사하러 가실 거죠?”
“삼현가로 가.”
“본가에서 식사하실 거예요?”
“식사 얘기는 그만하면 안 될까?”
“예.”
시무룩한 호석이 운전을 시작했다. 강윤은 시트 등받이에 깊게 기대며 고단한 눈꺼풀을 닫았다.
얼마 후.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그사이 깜짝 잠들었는지, 호석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강윤이 눈을 뜰 때였다.
난데없이 흐릿한 형상이 세단 앞으로 튀어나왔다.
끼익―
급브레이크를 밟은 호석이 운전석 차창을 열며 버럭 고함쳤다.
“아저씨! 위험하게 뭐 하시는 겁니까?”
벙거지를 눌러쓴 노숙자 같은 행색의 남자였다.
강윤의 무심한 눈초리가 전방의 그로 옮겨졌다. 노숙자가 벙거지를 벗으며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차가 오는데 왜 튀어나오세요!”
이마부터 훤히 드러나는 얼굴.
낯익은 이목구비.
쓱―
뒷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강윤의 상체가 느른히 들렸다.
“장인어른?”
“예? 누구요?”
차창에 턱을 걸치고 있던 호석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뒤돌아봤다. 확신한 강윤은 세단에서 내려 의아한 눈길을 건넸다.
“아버님.”
곤혹스러웠다.
남루한 행색도,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도.
“오! 도 서방!”
반면, 서정탁의 낯엔 화색이 돌았다.
“잘 지냈는가?”
“언제 출소하셨습니까?”
“면회 한 번, 사식 한 번 넣어준 적도 없으면서 지난 얘길 해선 뭐 해.”
서정탁은 변함없었다.
자신의 탐욕으로 비롯되어 파국에 치달았음에도 일말의 죄책감 없이 되레 서운한 티를 내며 힐책했다. 음흉스럽게 눈동자를 빛내며.
“여긴 왜 오셨습니까?”
“자네 사는 데서 몇 날 며칠 기다렸는데, 도통 자넬 만날 수 있어야지.”
“저 사는 데요?”
“그렇대도. 한데 이게 웬 떡인가. 혹시나 해서 여 왔는데, 자네 차가 딱 들어서지 않는가.”
“아.”
흉포한 소름이 강윤의 갈비뼈 안쪽을 훑었다.
“은재를 만나셨습니까?”
“못된 것.”
서정탁이 입술을 이지러뜨렸다.
“제 아비가 이 꼴이 되었다고 괄시나 하고……. 나나 되니까 저를 대단한 삼현에 시집보냈지. 저 주제에 언감생심 꿈이나 꿨겠어?”
딸을 내씹는 그의 모습에 강윤의 가슴팍은 뻐근했다. 묵직한 폐에 산소를 주입하고, 나직하고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은재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건 자네가 알 것 없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서정탁이 불쑥 강윤의 팔뚝을 잡았다.
“도 서방, 돈 좀 주게.”
시큼하고 쾨쾨한 냄새가 진동했다.
쓰레기가 가득한 시궁창처럼.
“돈이요?”
“좋은 투자처를 찾았어. 자네가 현금 5억만 융통해 주면, 내가 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
강윤은 비로소 답을 찾았다.
은재가 무정하게 자신을 떠나야만 했던 진짜 이유.
삼현가는 그를 떼어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자네도 훗날 삼현의 주인이 될 터인데, 이런 몰골의 장인어른을 둘 수 없지 않은가.”
“은재에게도 이러셨군요.”
“내가 번듯해야지 우리 은재 앞날도 훤하고.”
“아버님.”
강윤은 제 몸에 들러붙은 그의 손을 물렸다.
“은재가 거절했죠?”
심해의 온도처럼 냉랭한 음색에 서정탁이 움찔했다.
“저도 은재와 뜻이 같습니다.”
“자넨 이러면 안 되지.”
그러곤 엄포를 놓았다.
“내 딸과 동거하지 않는가! 내 딸에게 책임질 짓을 했으면, 아비인 내게 그만한 보답을 해야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재는 제가 평생 책임지겠습니다.”
강윤은 단호하게 표명했다.
“그 부분 염려 마시고, 조심히 가십시오.”
“도 서방!”
차갑게 등을 돌리자, 서정탁이 눈알을 희번덕희번덕 부라리며 앞길을 막았다.
“이러지 말게.”
그러곤 연막작전을 치듯 의뭉스럽게 회유했다.
“내가 도 서방을 위해서 입조심하느라 억수 고생스러운데 말이야.”
“그러십니까?”
“어허.”
강윤이 비소를 짓자, 서정탁이 잔뜩 뻗댔다. 야비하게 눈썹을 실룩거린 그가 협박조로 속닥였다.
“백지연, 자네 친모 말일세.”
꿈틀.
“타격이 클 테지?”
강윤의 뇌리에 번뜩 카페에서 스쳐봤던 벙거지가 떠올랐다.
‘그때구나.’
줄곧 자신의 주위에 맴돈 것이다. 기가 차서 강윤은 헛웃음이 나왔다.
“웃어? 원체 비범한 사람이라 삼현의 극비가 들통날 위기인데도 여유롭군.”
서정탁이 우위를 선점했다고 생각하는지 껄껄 웃어젖혔다.
“이것만 알게나. 10억은 받아야 할 사안이지만, 내가 양심껏 5억에서 끝내는 거야. 그래, 현금은 언제 가능한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천기누설도 아닌걸요. 언젠가는 밝혀질 사안이었습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강윤은 의연히 반격하고, 그의 옆으로 비껴갔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서정탁이 붉으락푸르락 언성을 높였다.
“후회하지 말게!”
탁.
세단의 뒷좌석을 강윤은 강하게 닫았다. 심각한 사태를 예견한 호석이 소심하게 룸미러로 넘겨봤다.
“상무님…….”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
“예? 예, 알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호석이 명령에 따랐다.
혐오스러운 욕설을 퍼붓는 서정탁을 유유히 지나친 세단은 큰 도로로 나와 인근의 지하철역 앞에 정차했다.
“내려.”
“상무님!”
강윤은 호석을 내리게 하곤,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정쩡하게 차 밖으로 나온 호석을 길에 두고, 주저 없이 출발했다.
목포를 향하여.
***
선착장에 도착한 페리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상생 프로젝트로 명소가 된 섬을 찾은 관광객이 대다수였다.
“은재야!”
그들의 틈에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시간 맞춰 마중 나온 은재는 빙긋 웃으며 손들었다.
“야, 징글징글하게 멀다. 서울 촌년 오느라 고생했어!”
“그러게 오지 말라니까.”
“우리 작가님 보고 싶어서 왔지.”
민서가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를 못 가지고 들어올 만하네. 섬이 작긴 하구나. 은닉하긴 적당하겠다만.”
서울 촌년답게 섬마을이 생경한 그녀는 관광객들이 몰려 있는 포토존을 발견하고, 방정맞게 발을 동동거렸다.
“와! 너무 예쁘다! 나도 사진 찍을래!”
“가자.”
“딱 한 장만 찍자.”
“가.”
은재는 단호히 그녀를 잡아채어 제집으로 이끌었다.
“벽화도 새로 그렸나 보네. 이야, 지붕 색 예쁜 거 봐라.”
미련 남은 민서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섬 전체가 포토존인데? 도강윤이 기획한 거라 했지?”
“응.”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투입됐겠다?”
“대부분 지역 인력을 동원했어. 단기지만, 일자리 창출 개념으로 목포시청을 통해 미리 모집하거나 협약해서.”
“도강윤 일 잘하네. 업계에서 인정하는 인재는 역시 달라.”
상생 프로젝트에 관련해서는 도강윤에 대한 화제가 당연지사 따르기 마련이었다. 은재는 무던히 대답하면서도 반대로 묻고 싶었다.
‘어떻게 지낸대?’
호석으로부터 강윤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메시지는 받았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잘 지내는지 듣고 싶었지만, 은재는 화제를 전환했다.
“배고프지?”
“어, 뱃가죽에 등에 붙겠어.”
집 안을 민서가 호들갑스레 구경하는 동안, 은재는 미리 준비한 음식을 평상에 차렸다.
“네가 했어? 맛이 끝내주는데?”
“옆집 사는 동생이 갖다준 거야.”
“그럼 그렇지. 무진장 맛나게 먹었다고 전해줘.”
민서는 정경이 한 반찬에다가 밥 한 공기를 뚝딱 했다. 그러고서 볼록 나온 배를 두들기며 한가롭게 담장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세상 평화롭구나. 네가 왜 이곳에 자리를 텄는지 알겠어.”
“그렇지?”
은재는 시원한 커피를 내와서 건네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근데 우리 대단한 미도 작가님 집이라기엔 너무 소박해. 멋진 별장으로 새로 리모델링하는 건 어때?”
“지금이 좋아. 괜히 섬마을 주민들과 위화감만 조성할 거고.”
“과연 현명한 우리 작가님이셔.”
금세 민서가 태세 전환을 했다. 은재는 단순한 친구에게 핀잔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자고 갈 거지?”
“안 돼. 저녁에 데이트 약속 있어.”
“데이트? 누구?”
“저번에 발표회 연회에서 봤던 남자 기억하지? 나 맞선봤다는.”
“아! 본격적으로 연애하는 거야?”
“아직은 썸.”
민서의 표정은 설렘으로 들떴다.
전이되듯 은재의 입술에도 미소가 맺혔다. 연애에 관해선 까탈스러운 민서이기에 신중한 선택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금방 갈 거면서 이 멀리까지 왜 왔어?”
“사인 받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