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서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은재의 시야가 밝아졌다. 창문 너머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앗! 깜빡이야!”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침실에서 나오던 민서가 질겁했다.
“이년아, 거실에서 밤새운 거야!”
“잤어. 방금 일어난 거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딱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며 민서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은재는 커피를 내려서 건넸다.
“오늘 갈 거지?”
“응.”
“아예 안 올 거야?”
“응.”
“나한테 말없이 멀리 떠나거나 하진 않을 거지?”
“가게 되면 말할게.”
“독한 년. 곧 죽어도 안 간다는 소리는 안 하네.”
한국에서 도망친들 도강윤의 그림자를 떨쳐내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 어디에 숨더라도 의미가 없을 거다.
감정에 벽을 치는 것만이 답.
콘크리트처럼 딴딴해지면, 살 수 있을까?
“터미널까지 데려다줘야 하는데, 하필 출판사 사장님들과 조찬 모임이 있어.”
“내가 애야? 혼자 갈 수 있어.”
“아쉬워서 그러지. 내가 조만간 내려갈게.”
“멀어.”
민서를 먼저 내쫓고서 은재는 천천히 목포를 내려가기 위한 짐을 챙겼다.
완전히 못 박은 상태기에 도강윤이 오진 않으리라.
장담한다.
“응? 필름 카메라가 어디 갔지?”
마지막으로 카메라 가방을 정리하던 은재는 당황했다. 자신의 애착 카메라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본 바람에 혼이 나간 상태로 펜트하우스에서 나왔었다. 그때 잊어버린 모양이다.
“출근했겠지?”
기껏 여자와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하여, 결근할 도강윤이 아니었다.
하물며 삼현그룹의 상무님 아닌가.
‘문제는 따로 있지.’
은재는 소리소문없이 펜트하우스에 들를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 서정탁이 진 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에 택시로 선택했다.
‘아, 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성공적으로 펜트하우스에 진입했는데,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시큰한 기분이 용솟음쳤다.
“꿀꺽.”
은재는 침을 삼키며, 긴장감을 풀었다. 그러고서 좀도둑처럼 까치발로 거실로 걸어가며 두리번거렸다.
‘저깄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다. 인기척은 없었기에 은재는 안심하며 서둘러 다가갔다.
순간.
‘합!’
은재는 비명을 지를 뻔했고, 엉덩방아도 찧을 직전으로 휘청했다.
‘왜?’
도강윤이 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미동도 없이.
‘어떻게 있지? 여태 자는 거야?’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은재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유령 보듯 강윤을 내려다봤다.
새벽 6시에 운동하는 세상 부지런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도강윤의 패턴으로선 기이한 늦잠이었다.
‘그래도, 사람이니까.’
은재는 행여 들킬까 싶어 숨죽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이 자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은재는 살금살금 접근했다. 가까이 가서야 그의 몸 상태가 비정상임을 알아차렸다.
‘아픈 거였어.’
이마와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번들거렸으며, 열감이 오른 듯 뺨이 울긋불긋했다.
“미열 있는데?”
섬에서 느꼈던 미열과 자신의 영향으로 그가 이렇게 아픈 것 같아서, 은재는 못 견디게 심장이 저렸다.
‘도강윤, 미안해.’
자신을 탓하며 서둘러 욕실에 들어가 물수건을 만들어 왔다.
뜨끈뜨끈한 강윤의 이마에 내려놓자, 열기를 중화하는 찬기에 그의 몸이 움찔했다.
“하아.”
그의 입에서 홧홧한 숨소리가 흘렀다.
‘강철 체력인 남자가 나 때문에…….’
은재는 그의 곁에 앉아 펄펄 끓어오르는 열로 끙끙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남자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강한 남자의 약한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이…
‘왜 아프고 그래.’
속상하다.
속상해서 미치겠다.
‘왜 혼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은재는 젖어드는 망막에 힘을 주며 물수건을 교체했다.
열이 도통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어.’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적합한 사람은 정 비서뿐이었다.
통화하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나는데, 강윤의 손이 은재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
은재는 호흡마저 멈췄다. 삽시간에 굳어버린 목을 간신히 돌려, 그를 내려다봤다. 강윤의 흐릿한 눈동자가 파르르 열렸다.
“…은재야.”
식은땀의 젖은 강윤의 입에서 희미하고 맥없는 말소리가 이어졌다.
“…나 버리지 마.”
울컥.
버리지 말라니.
은재의 심장이 울렁울렁 뛰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누구보다 월등한 도강윤이었다.
그런 그가 버림받는 게 무서운 아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요한 공기로 흩뿌려지는 숨결마저 절실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버리지 마, 은재야.”
주르륵.
은재의 눈동자에서 막을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통곡 같은 소리가 터지려고 해서 은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륵.
강윤의 눈꺼풀이 가라앉듯이 감겼고, 은재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도 기력 없이 풀렸다.
툭.
은재는 소리 없이 흐느끼며,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도망치듯 펜트하우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메시지를 발송했다.
―정 비서님. 도 상무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니, 빨리 병원에 모셔가세요.
아랫입술을 악물며 덧붙였다.
―제 얘긴 하지 마시고요.
***
“…네, 대표님. 보내주신 제안서는 제가 직접 검토하겠습니다.”
첫 번째 상생 프로젝트가 많은 지지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수많은 기업에서 자발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 혁신적인 제안을 해오는 경우도 허다해서 강윤은 더없이 바빴다.
‘컨디션 회복도 덜 되었는데…….’
전화 통화에 여념 없는 강윤을 호석은 볼멘 표정을 주시했다.
‘저렇게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작은 사모님의 연락을 받고 호석이 펜트하우스에 갔을 땐 강윤은 고열로 정신마저 혼미했다.
과로와 스트레스성 위장염이 겹친 증세에 주치의는 최소 3일 동안의 입원을 진단했지만, 하루 만에 퇴원해 버린 강윤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강윤은 미친 듯 일만 한다.
‘작은 사모님과 헤어지신 게 맞나 보네.’
강윤의 퇴원 소식은 작은 사모님께 전해놓고도, 그녀의 신신당부대로 그날의 메시지는 비밀을 엄수하고 있는 호석으로선 현 상황이 좌불안석이었다.
‘우리 상무님 어떡하지.’
강윤은 일호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무정한 사모님이셔. 상무님이 그토록 애태웠던 걸 아시면서…….’
괜히 작은 사모님에 대한 원망만 늘어갔다.
“저희 상생 프로젝트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이윽고, 강윤의 통화가 끝났다. 호석의 일정 보고에 강윤은 무표정하게 접었던 셔츠 소매를 풀고 슈트 재킷을 걸쳤다.
“점심 식사 안 하셨는데, 이동하며 드시게끔 제가 샌드위치라도 사 올까요?”
“필요 없어.”
“체결식은 적어도 오후 3시나 넘어서야 끝날 텐데요. 식사 거르시다 위장염이 도지면 어떡합니까?”
“가자.”
강윤은 냉정함으로 일관했다.
감정 없는 사람처럼 구는 그를 살피며, 호석은 체념했다.
***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도형호와 수행비서인 비서실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호석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강윤은 묵례하며 내부로 들어섰다.
“어딜 가느냐?”
“일전에 보고드렸던 K화학과 연장 협약서 체결식이 있습니다.”
“그래.”
강윤의 명확한 대답을 듣던 도형호가 돌연 몸체를 비틀었다. 불쑥 올라온 손이 그의 넥타이를 만졌다.
뜻밖의 행동에 강윤은 경직했다.
“바빠서 경황이 없더라도 항시 매무시를 살피거라. 특히 타이는 놓치기 쉬우니.”
“네.”
“핀도 빼먹지 말고.”
도형호는 강윤의 넥타이를 반듯하게 조이며 지적했다. 내내 불면의 밤을 보내는 바람에 철저한 습성을 잃은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됐다.”
무뚝뚝하게 응수한 도형호가 자신의 넥타이핀을 빼내어 강윤의 넥타이에 채웠다.
“……!”
넥타이를 만져준 행동도 놀라운 일이건만. 몹시 놀랐지만, 강윤은 긴장한 채로 아버지의 손길을 받았다.
딩동―
엘리베이터에 1층 로비에 도달했다.
“나가자.”
“네, 감사합니다.”
도형호 회장이 앞장섰다.
“회장님.”
비서실장이 자신의 넥타이핀을 풀어 내밀었지만, 도형호 회장은 거절의 손짓을 했다.
로비의 직원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강윤은 눈인사로 답례하며 회장님이 차에 오를 때까지 수행했다.
“도강윤.”
대기하는 세단에 오르기 전, 도형호가 뒤돌아봤다.
“시간 날 때 들르거라. 네 엄마는 네가 달래야 하지 않겠느냐.”
서은재의 방문 이후 민경애 여사는 몸져누웠다. 도형호까지 나서서 재결합을 허락하였으니, 꼿꼿하던 그녀의 정서도 파괴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형호는 미동하지 않은 채 아들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느냐? 안색도 안 좋고.”